땡전 = 가치가 떨어진 당백전을 이르는 말1866년에 발행된 화폐인 당백전. 백성들은 '당백전'에서 '당전'을 세게 발음하여 '땅전'으로 '땅전'은 다시 '땡전'으로 발음되었다고 한다. 어째서 당백전은 '땡전'이 되었을까?
흥선대원군은 집권 이후 내적으로 60년간의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실추된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조치를 펼치게 된다. 외적으로는 계속되는 서구 열강의 문호개방요구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비 증강을 통한 국력 증대에 온 힘을 쏟게 된다.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흥선대원군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했던 것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이었다. 군비의 확장과 경복궁 중건에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리한 공사로 민심은 흉흉했으며 국고마저 텅 비어버려 재원확보를 위해 조선정부는 당백전을 주조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당백전 주조의 직접적 동기는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당시 통용되던 화폐의 단위 가치가 너무 작아 고액 거래를 하는데 불편함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흥선대원군 집권초기 함경도 지방의 갑산동광(甲山銅鑛)이 폐쇄되어 동전의 원료난이 더욱 심해지자 한정된 동전 원료를 가지고서는 도저히 급증하는 재정 수요를 충당할 수 없었기에 당백전을 주조하고자 했다.
우의정(右議政) 유후조(柳厚祚)는 아뢰기를, '국용(國用)을 통제하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하는 것은 천하고금의 상리(常理)입니다. 방금 변란을 겪고 공비(公費)가 날로 늘어 나라의 재정이 어렵고 백성들의 곤란하기가 지금 같은 때가 없는 만큼 마땅히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힘을 펴는 방책부터 강구해야 하지만 지금 경제가 궁핍하여 밤낮 근심스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당백전을 주조하자고 한 좌의정(左議政)의 계(啓)는 실로 옛일을 상고하고 오늘의 형편을 참작한 훌륭한 계책입니다. 다만 유포시켜 통행시키는 것은 비록 유사(有司)에 조처하는 책임이 있으나, 지출과 수입을 따지고 비용을 절약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제때에 크게 변통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역(易)>에서 이른바 재정을 다스리는 방책으로서 국용도 넉넉해지고 백성들의 재산도 풍족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널리 하문(下問)하여 재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판부사(判府事) 김병국(金炳國) 이하 사람들의 의견도 다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주조하는 문제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호조(戶曹)로 하여금 전적으로 맡아 거행하며 장소는 금위영(禁衛營)에서 하라." - <조선왕조실록> 고종 3권, 3년(1866 병인/청 동치(同治) 5년) 11월 6일(신유)당백전은 종래 주로 사용되던 상평통보에 비해 실제로 들어간 구리의 양은 5, 6배에 불과했지만 액면가는 상평통보의 100배인 고액전이었다. 화폐의 실질가치와 명목가치가 20배가량 차이 나는 대표적인 악화(惡貨)였던 것이다. 이 악화의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모든 공사거래에서 종래의 상평통보와 함께 통용하게 하고 관청을 경비 지출과 공납(公納)에도 당백전 2/3와 상평통보 1/3의 비율로 쓰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당백전(當百錢)을 통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미 주전소(鑄錢所) 초기(草記)가 있습니다만, 공사(公私)에서 거래하는 돈은 장차 신구(新舊) 화폐를 함께 유통하게 되었습니다. 관청과 상하 각 읍의 공납(公納)은 새 돈 3분의 2와 낡은 돈 3분의 1을 상호 편리하게 섞어서 쓰도록 한다는 내용으로 중앙과 지방에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권, 3년(1866 병인/청 동치(同治) 5년) 12월 2일(정해)하지만 상평통보보다 100배의 명목가치를 가진 당백전은 그 화폐단위가 너무나 커서 일반 백성들에게 통용되지 못하고, 조선정부도 당백전을 물품 구입의 수단으로만 사용했을 뿐 조세수납에는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했다. 1866년 11월 당백전을 주조하라는 하명이 있은 이후 이듬해 4월까지 1600만 냥이라는 거액이 주조되었고 그 결과 당백전의 가치는 폭락한 반면, 물가는 급등하게 되었다.
당백전 발행 초기에 7, 8냥이던 쌀 한 섬의 가격이 1, 2년 사이에 약 6배 폭등했으며 또 상평통보를 녹여 당백전으로 위조화폐를 만드는 일이 성행했다. 이로 인해 조선정부는 재정적자의 해결은커녕 물가폭등과 함께 체제 위기까지 맞게 되었다. 결국 발행되기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주조가 중단되고, 10월에는 유통조차 금지되었다.
최익현이 올린 상소에 당시 당백전의 폐단이 자세히 나와 있다.
…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경비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시어 이렇게 의로운 발기를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 2년 동안에 사·농·공·상이 모두 그 해를 입었는데, 그 피해가 되풀이되어 온갖 물건이 축나고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이 전보다 줄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현 시기의 형편과 세상인심이 절로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이제 옛날 돈이 통용되어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모두 말하기를, '이 돈은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는데, 단지 집집마다 바치라는 방(榜)만을 볼 수 있을 뿐 영구히 혁파한다는 밝은 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혹이 점점 짙어가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도록 하소서.- <조선왕조실록> 고종 5권, 5년(1868 무진/청 동치(同治) 7년) 10월 10일(계축)역사 속의 하이퍼인플레이션역사 속의 당백전처럼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여 '땡전'이 된 경우를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후 연합국은 독일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당시 독일은 심각한 재정적자를 겪고 있었지만 이 배상금을 갚기 위해 무분별하게 돈을 찍어내고 결국엔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하게 된다. 1918년까지만 해도 50페니히(1마르크=100페니히)면 살 수 있었던 빵 한 덩이가 1923년 11월에는 천억 마르크였다.
당시 환율은 1달러에 4조 마르크였으며 이마저도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머리를 깎으려면 수레에 돈을 싣고 가야 했고, 물가가 시간 단위로 올라 공장 노동자들은 임금을 오전, 오후로 나누어 두 번에 걸쳐 받는 웃지 못할 일까지 생겼다. 또 술을 마시러 맥주 가게에 들어가면 들어갈 때 가격과 나올 때 가격도 달랐을 정도로 인플레이션 속도는 대단했다. 당시 독일의 인플레이션율은 1년에 1억%를 기록했다.
현대사 속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비단 독일뿐만이 아니라 남미의 국가들, 남아프리카의 짐바브웨 등 많은 나라들이 경험했다. 현재는 이란이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 위험성이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도대체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인플레이션은 일정기간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것으로 적절한 인플레이션은 경제 활성화를 촉진시키는 것이기에 결코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특히 경제 발전에 따른 물가상승은 개도국 발전 초기 어디서나 겪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국민들의 소득이 올라 새로운 수요창출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이기에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이다(물론 생산원가 상승, 환율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스테그플레이션을 초래하긴 하지만, 여기서는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초점을 맞춤).
대체로 각국의 정부는 재정정책보다는 금융통화정책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효과가 빠르고 조세 저항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과도하게 국채를 발행한다 생각해보자. 중앙은행에서 국채를 매입해 시중에 통화량이 늘어나 가계의 소비와 투자가 활성화된다. 결국 총생산량이 늘어나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경기부양의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이는 일시적 효과에 불과하다.
통화량이 늘어나 소비와 투자가 늘어난 만큼 물가 또한 상승한다. 물가가 상승하면 생산비용이 늘어나 결국 총공급이 감소하고 장기적으로는 물가만 높아졌지 국민소득은 변함이 없거나 오히려 줄어든 상황이 된다.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문제는 화폐 가치의 하락이라고 볼 수 있다. 통화량이 증가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화폐의 가치는 하락하고 그에 따라 금리도 하락한다. 금리가 하락해 저축의 매력을 못 느낀 돈들은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몰리고 그 가격이 상승하게 되며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된다. 이 상황에서 정부가 재정부족의 이유로 계속적으로 국채를 통화량을 증가시키게 되면 결국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위험성은 더욱 커지게 되며 또 다시 1920년대 독일의 상황이 올 수도 있게 된다.
정부의 정책은 무엇보다 신뢰이다미국의 본원통화 증가율이 2008년 이후 치솟고 있다. 양적완화 정책이 세계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침체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고는 하지만 미국 정부에 대한 신뢰가 만에 하나라도 계속 하락하게 된다면, 즉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이 통화정책을 통해 충분히 인플레이션을 제어할 수 있다는 믿음이 무너지게 된다면 세계경제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MB정권이 들어 선 이후 각종 국책 사업을 빌미로 엄청난 양의 국채를 발행해 정부의 재정적자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공기업의 부채는 감당을 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리고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가계의 부채는 날로 늘어만 가고 치솟는 물가에 서민들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이 하루 살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물가상승으로 인한 서민들의 고통이 심각한 가운데 여기에 만약 정부 경제정책 대한 신뢰마저 더 떨어진다면 한국경제의 앞날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암흑으로 치달을 것이다.
정부의 정책은 그 무엇보다 신뢰의 가치가 가장 중요하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남발함으로써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렸듯이 MB정권 또한 불통과 독단의 정책으로 서민들에게 더 이상 정권이 신뢰는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몇 달 후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서민들은 진정한 소통과 민생의 정치를 기대하고 있다. 이 와중에 현 정권은 더 이상 신뢰를 저버리는 정책을 삼가고 그동안 수습하지도 못한 채 벌여 놓았던 각종 국책 사업과 정책을 잘 마무리하고 자신들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조선왕조실록 인용문은 인터넷 누리집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