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는 유신선포 40년을 맞아 유신독재의 본질을 조명하는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 전국순회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6월 9일부터 30일까지 부산 민주공원, 8월 8일부터 9월 9일까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특별전이 열렸다. 10월에는 고양, 광주, 인천, 울산, 춘천, 서울청계광장, 대구에서, 11월에는 창원, 진주, 원주에서 전시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회를 유치하려는 지역 시민단체들은 많지만, 예민한 전시 주제로 인해 예산확보는 물론 전시장조차 구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탓에 서울, 부산, 창원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전시회가 패널 야외전시로 진행되며 실물자료는 전시되지 않는다. <오마이뉴스>는 실물전시를 볼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서대문형무소 제12옥사에서 열렸던 '유신의 추억전'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말] |
1970년대 대한민국의 아침은 확성기로 울려 퍼지는 <새마을노래>로 시작됐다. 박정희 지지자들은 새마을운동을 "하늘만 바라보고 가슴을 치던" 무기력한 농민들에게 "하면 된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위대한 정신개혁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소득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으며,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농촌개혁운동이었다고 격찬하기도 한다. 심지어 '풀뿌리 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 지방자치의 선구가 되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결코 살기 좋은 농촌을 만들지 못했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던 1970년대, 농가의 평균 소득은 10배 증가했으나 부채는 21배 증가했다. 저곡가정책 등으로 인한 도농 불균형발전은 이촌향도 현상을 가속화했다. 잘 살기 운동인 새마을운동 기간 내내 수많은 농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정든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새마을운동이 성공한 운동이라고?새마을 모범부락과 같은 성공 사례조차도 대부분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집중된 곳이었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가 마치 전체적인 양상인 양 과대 선전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이 전개한 일부 사업은 농민의 이익과 배치되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붐을 이뤘던 마을도로 개선사업은, 시멘트 수출이 막히자 농촌을 새로운 소비지로 선택한, 공업 우선 정책의 사례 중 하나이다.
초가지붕을 강제로 개량하면서, 지붕이 바뀌는 만큼 농가 부채도 늘어났다. 이 때문에 마을 이장이나 새마을지도자들의 건의는 관의 개입이나 전시 행정을 자제해달라는 데 집중되었다.
획일적인 농촌개량사업은 전국의 시골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곳을 가도 시멘트 길에 벽돌담과 원색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단장된 모습이었다. 전통과 다양성은 통일과 질서를 우선시하는 군사문화 아래서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고 말았다.
대대적인 새마을운동 전개에는 경제적 동기보다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정권이 상대적으로 통제가 용이했던 농촌사회를 조직하고자 했던 정치적 동기가 더 작용했다.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이나 '농촌중견인물양성'이 실제로는 전통향촌사회를 재편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듯이, 새마을운동 또한 1인 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선전과 체제동원의 매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1972년 유신체제를 선포하면서 새마을운동을 '유신체제의 실천도장'으로 규정했다. 해마다 전국적으로 실시된 새마을연수교육도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을 찬양하고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주입하는 각종 정치교육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었다.
유신시대 새마을운동 교육 이수자는 연인원 약 7000만 명에 달했다. 전국민이 1인당 2회 꼴로 세뇌교육을 받은 셈이다. 날이 갈수록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저항이 커져가자, 새마을운동은 당초 표방한 '잘살기운동'의 본질마저 던져버리고 유신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국민정신개조운동'으로 변질된 것이다. 농촌새마을운동을 도시새마을운동으로 확대하고, 유신체제 하에서 5년이 넘게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가 충효이념을 모토로 '새마음운동'이란 광풍을 일으킨 것도 국민정신개조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장밋빛 새마을운동은 이제 거대한 관변조직만 유지하면서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만약 새마을운동을 농촌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꾼 세계적인 성공사례라고 주장하려면, 오늘날 텅텅 비어있는 수많은 슬레이터 집들과 노인만 남은 암담한 농촌 현실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대답해야 한다.
불편한 진실, 성장의 그늘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론은 강력한 리더십 아래 국가가 경제정책을 입안해 산업 질서를 재편하고, 선별한 특정 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지원하는 국가주도형 개발독재였다. 특히 슬로건을 내걸고 고지를 점령하듯 성장목표를 향해 돌격하는 국가총력전 방식의 경제운용은, 일찍이 '고도국방국가'를 표방한 만주국의 '산업개발 5개년계획(1937~1941년)'과 매우 유사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정경유착에 기반한 거대한 부패구조를 국가 차원에서 재생산하고, 노동자들의 희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전개되었다. 특혜의 대가로 막대한 불법 정치자금이 만들어졌고, 각종 국토개발사업은 개발정보를 사전에 독점한 정권 또는 권력자에 의해 거액의 정치자금과 부를 축적하기 위한 부동산 투기로 연결되었다.
정경유착과 정치헌금은 으레 부실경영을 초래하기 마련이었으나, 정권은 기업의 불법을 눈감아주거나 조장하기까지 했다. 수출주도형 경제는 대외의존성을 심화시키고 내수 불균형을 가져왔다. 공업입국을 표방한 경제정책 아래 농업은 일방적으로 희생되었다. 조국근대화의 기수, 산업전사라는 허울만 쓴 노동자들은 장시간·중노동·저임금으로 고통을 겪었고, 최소한의 권리인 노동3권조차 박탈당했다. 희생은 민중에게, 성장의 과실은 특권계층에게 돌린 것이 박정희식 경제개발이었다.
조국근대화를 내건 경제개발은 안보이데올로기의 하나이자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정치이데올로기로서, 원천적으로 민주주의를 거부한다. 경제개발의 최고 슬로건인 조국근대화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며 북한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경제전쟁'으로 규정되었다.
또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 '총력수출' 따위의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안보와 경제를 일체화시켜, 노동조합 결성이나 파업 등을 반국가적인 행위로 지목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제O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대망의 80년대' '조국근대화의 완성' 따위의 구호 아래 그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위대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국민들이 일치단결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기약이 없는 조국근대화의 완성을 핑계로 지도자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한 것이다. 특히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은 안보와 경제지상주의를 내세워, 조국근대화를 위해서라면 유신과 같은 독재도 불가피하다는 해괴한 논리를 내세웠다. 이는 (그 성과조차 논란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본권도 유보할 수 있다는 그릇된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
사회 저변으로 확산된 경제지상주의는, 부의 축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금만능 물신숭배의 풍조를 만연시켰다. 이는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는 담을 쌓은, 1%만을 위한 천민자본주의를 잉태하는 씨앗이 되었다.
목적을 달성한다면 과정은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국가가 앞서 사회통념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일제 때 유행했던 조선 기생관광은 유신정권 시기 국책사업으로 부활했다. 정부는 야간통행증까지 발급해가며 매매춘 등 불법적 외화벌이를 부추겼으며, 심지어 이들을 산업역군 또는 애국자로 미화하며 이를 조장했다. 주한미군철수를 막기 위해 추진했던 대대적인 기지촌 정비사업도 유사한 사례의 하나였다. 도대체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하는 일들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와 고도성장의 금자탑 아래에는 세칭 "공돌이와 공순이"로 홀대받으면서도, 오로지 대망의 80년대를 기다리며 희생한 지난 세대 노동자들의 피와 눈물이 배어있다. 굳이 경제도약의 공로를 따지자면 마땅히 이들에게 영광이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박정희 추종자들은 알량하게도 노동자들에게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라는 허명만 부여하고, 산업화의 모든 영예를 독재자 개인의 탁월한 영도력에 돌리며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에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