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첫 번째 방문지로 선택한 것은 이란 국립박물관이었다. 이란의 고대문명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박물관에 대한 첫인상은 참으로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은 루브르도 아니고 대영박물관도 아니다, 아니 우리의 용산 국립박물관과도 비교가 안 되는 초라함 그 자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물까지 무시하면 안 된다. 안내자는 그래도 이 박물관의 외형은 프랑스 건축가 앙드레 고다드가 사산시대의 궁전을 기초로 설계한 것이라고 자랑하였다.
초라한 외관... 놀라운 소장품
이 박물관의 주요 전시품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출토품이다. 즉, 페르세폴리스와 수사 등에서 출토된 도자기와 토기, 석재 부조 등 화려한 소장품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컬렉션은 수사에서 출토된 함무라비 왕의 법전이 조각되어 있는 비석이다. 그러나 이 비석은 아쉽게도 진품이 아니다. 현재 진품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루브르에서 본 함무라비 법전 비석이 생각난다. 원래는 이곳에 전시되어 있어야 할 물건인데 서양인들의 무자비한 컬렉션에 의해 명품 중의 명품은 이국땅에서 고향을 그리며 관람객을 맞고 있다.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곳 박물관에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나온 알현도, 몸통은 잘렸지만 다른 소장품을 압도하는 다리우스 대왕 동상, 그리고 이란의 어디를 가도 만날 수 있는, 그래서 이란의 상징물이 된 쌍두마석 등 볼 만한 유물이 셀 수 없이 많다.
수많은 전시물 중 내 눈을 특별히 자극한 것은 한 소금광산에서 발견된 남자의 머리와 그의 가죽 구두를 비롯한 몇 가지 유물이었다. 1700여 년이 지났지만 소금광산에 매몰되었던 것이라 그 원형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유물을 자세히 보다 보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우선 가죽 구두를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신을 수 있는 현대적 감각의 부츠이다. 더욱 놀랄만한 것은 조그만 모직 천 조각이다. 이것은 당시 이미 높은 수준의 모직이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복식사 연구에도 큰 의미가 있는 유물이라고 생각된다.
경주에서 본 유리잔, 테헤란에서 다시 보다
테헤란에서의 두 번째 목적지는 유리박물관이었다. 이 박물관이 있는 빌딩은 카자르 시대에 지어져 어느 돈 많은 사람의 저택으로 사용되다가 한 때는 이집트 대사관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다지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동서양의 특징이 잘 어우러져 있고 중앙의 나무 계단은 특히 아름다웠다. 이곳에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시대순으로 유리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유리제품과의 관련성이다. 즉, 신라의 고분군에서 발굴된 각종 유리그릇은 대체로 이쪽 지역(중동지역 포함)에서 수입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1층의 파르티아조 시절의 유리그릇을 보다 보면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5세기경의 유리그릇(소위 '로만 글라스')과 그 모양과 투명도에서 흡사하다(나는 이 여행을 마치고 일부러 용산 국립박물관에 가서 신라의 유리그릇을 직접 카메라에 담았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이미 페르시아와 어떤 식으로든지 문명의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미국의 꼭두각시, 팔레비의 흔적을 찾다테헤란에서의 세 번째 목적지는 사드 압바드 박물관, 이 박물관은 엘브로즈 산맥의 경사면에 위치하면서 테헤란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있다. 이곳은 원래 왕들의 여름 궁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종합 박물관이라고 해도 될만한 곳으로 백궁, 청궁, 국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다.
우리 탐사단은 시간적 제한으로 위 시설 중에서 백궁과 국립현대미술관을 탐방하는 것으로 관람을 끝냈다. 백궁은 아주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1953년 팔레비 국왕이 당시의 수상이었던 모하마드 모사데그를 축출하기 위해 미 중앙정보부 간부였던 커밋 루스벨트(이 사람은 1900년대 초의 미국 대통령이었던 데오도로 루스벨트의 손자임)과 친위 쿠데타를 모의하였던 장소로 유명하다.
백궁을 들어가기에 앞서 하나의 이상한 조형물을 볼 수 있다. 사람의 상체는 없고 오로지 허벅지 이하 발부분만 남겨져 있는 청동상이다. 언뜻 보면 이것은 현대 미술의 추상작품으로 오인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팔레비 왕가의 첫 왕인 레자 칸의 동상의 일부이다. 1978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자 성난 군중들에 의해 몸통이 잘려나간 것이다.
이후 혁명 정부는 이 몸통 잘린 청동상을 이대로 전시해 왔다. 팔레비 왕가에 대한 원한을 이런 식으로 30년 동안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온 것이다. 이곳 백궁을 들어가면 1층에 접견실과 화장실이 있고, 2층에 식당이 있어 실각 전의 팔레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팔레비 국왕이 실각되기 전에 극도의 화려한 생활로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백궁의 내부를 돌아보면 그 말의 진정성에 의심이 간다. 그것은 백궁의 규모나 그 내부가 너무 평범하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의 개인 저택 수준에 불과한 이런 생활에 대해 이란 국민이 분노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의문은 이번 탐사의 마지막 여행지였던 라시트의 팔레비 여름 궁전에서도 들었다. 그곳에는 현재 궁전을 개조한 군사박물관이 있는데 그것도 그 규모나 위치에서 도저히 팔레비 왕가의 영화를 상상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팔레비를 사치스럽다고 한 것이 무엇일까, 자연스러운 의문이었다. 이란인들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사회주의적 평등의식이 강해서 그런가.
우리 탐사단은 이곳 박물관을 나오면서 현대 미술관에 잠시 들렸다. 18세기 이후의 근대 회화를 볼 수 있는데 유럽 작가와 이란 작가의 그림들이 걸려 있다. 팔레비가 그 많은 오일 달러로 사들였을지 모를 유럽의 대가의 작품을 기대하였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한 점도 그런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실망스런 미술관 탐방이었다.
테헤란의 밤이 시작된다. 우리 탐사단은 이제 다음 코스인 시라즈를 향해 떠나야 한다. 테헤란을 떠나기에 앞서 우리들은 공항 근처의 아자디 광장에서 아자디탑(자유의 탑)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탑은 1971년 팔레비 시절 페르시아 제국 2500주년을 맞이하여 만든 국가 기념물이다. Y자를 뒤집은 듯한 형상의 이 탑 주변에서 1978년 혁명 군중들은 팔레비에게 자유를 외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