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빚 권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하루에 서너 번쯤, 기계적으로 지워도 여전히 차고 넘친다. 'X천만 원까지 24시간 긴급대출!' 따위의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 말이다. 프로야구 중계의 막간도 온갖 대출광고가 점령해 버렸다. 그 요란함이 야구장의 응원열기 못지않다. 지하철을 올라 타도, 구석에는 '급전'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종이쪼가리가 붙어있기 일쑤다. 어느새 일상 곳곳의 대출광고는 익숙한 일이 되었다. 그들은 손짓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간편하게, 돈을 빌리라고.
그렇다고 대출광고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부채의 대부분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한국장학재단에서 학자금을 대출한 인원이 2011년에만 73만 명을 넘어선다. 한 해 등록금이 천만 원을 웃도는 상황에서, 부채 이외의 다른 해결책을 찾기는 힘겨울 터다. 졸업을 한다고 빚낼 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언론에서는 부동산 시장의 침체라 시끄럽지만, 서민 입장에서 주택가격은 여전히 큰 부담이다. 결국 '내 집 마련'은 부채 없이 꿈꾸기 어렵다.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로 대표되는 정부의 정책도 부채를 권장하는 꼴이다.
그리고 남겨진 것은 워킹푸어, 하우스푸어 같은 신조어들이다.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열쇳말 중 하나로도 '가계부채 1000조 시대'가 꼽힌다. 일자리도 구하고 내 집까지 마련했건만, 어째서인지 이자 갚기도 급급하다. 원금 상환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삶 전반에 부채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다. 개인만 부채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는 공기업을 포함한 한국의 국가부채 역시 1000조를 넘어섰다는 보도도 등장했다. 모두가 채무자로 살아가는 시대, 무엇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을까.
부채의 확산은 신자유주의에서 비롯된다계속되는 금융 위기는 우리에게 '부채인간' 혹은 '빚을 진 사람', 즉 채무자의 형상을 난폭한 방식으로 드러내보였다. 이 '채무자'의 형상은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공공 영역 전체를 점령해 버린 주체의 형상이다. (…) 이 책이 제시하는 것은 '부채인간', '즉 '빚을 진 인간'이 주체적·경제적 차원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하나의 탐구이자 계보학이다. - <부채인간>, 머리말에서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부채인간>(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 펴냄)에서 우리시대의 '부채 경제'를 성찰한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 현대인을 '부채인간'이라 정의내리며, 부채의 관념이 인간을 통제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개인과 공공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부채를 양산한다는 지적도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부채의 담론'과 싸우라고 조언해온다.
저자는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관계를 '자본가-노동가' 혹은 '생산자-소비자'가 아닌, '채권자-채무자'라고 파악한다. 현대의 자본은 생산수단이 아니라, 채권을 소유하는 것으로 형상이 변화했다는 발상이다. 신자유주의의 기초가 범세계적인 금융에 있음을 상기시키며, 어떤 방식으로 부채가 확산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한다.
2008년 6월을 기준으로 미국의 부채 총액은 510조 달러를 넘어섰다. 당시 미국 국내총생산(GDP)인 140조 달러의 3배 수준이다. 저자는 그 근원을 1979년의 제2차 석유파동에서 찾는다.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점이라 꼽히는 이 시기를 기준으로 미국의 금리가 치솟았다. 특히 부채 상환을 위한 이자인 명목 금리 인상이 9%에서 20%로 추진된다. 이전 기간, 명목 금리의 변동은 평균 마이너스였다. 이로써 미국의 공공 부채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가 가난해지자 정책적인 변화가 이어졌다. 이른바 긴축정책으로 복지나 사회보장 부분의 지출이 줄어든 것이다. 공공의 영역에서 해결되던 문제들이 '민영화'되자 개개인의 경제적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공공 부채의 확산이 개인 부채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책은 최근에 경제위기를 겪는 그리스와 포르투갈도 마찬가지라 지적한다. IMF와 유럽연합이 강력한 긴축을 요구하지만, 이는 구제계획이 아니라 '새로운 민영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복지와 사회보장의 축소뿐만 아니라, 연금이나 임금의 삭감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이러한 설명은 맞아 떨어진다. 1999년 214조 원이던 가계부채는 2002년에 439조 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한다. 199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는 한국에서도 강력한 긴축과 공기업의 민영화 등을 관철시켰다. 유럽의 경우처럼, 공공 부채가 개인 부채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이때가 한국 신자유주의 확산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지적한다. 이는 최근에도 마찬가지다. 2008년의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공공 부채가 급증하자, MB정권이 내세운 주요한 해결책 중 하나는 고속철도, 인천공항 등의 민영화였다.
부채는 개인을 '스스로' 옥죄게 만든다부채의 힘은 억압이나 이데올로기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채무자는 '자유롭지만' 그의 행동과 태도는 그가 계약되어 있는 부채에 의해 규정되는 범주 안으로 제한된다. 이는 국민이나 사회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부채 상황 능력 내에서만, 소비·고용·세금·사회 비용 등 삶의 양식을 자유롭게 영위할 수 있다. 개인은 매우 이른 시기에, 심지어 고용 시장에 발을 내딛기도 전부터 부채를 관리하는 기술을 터득한다. - <부채인간>, 58~59쪽그렇다면 확산된 부채는 어떻게 기능할까. 저자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원용하여, 부채가 도덕적 가치로서 삶을 통제한다고 설명한다. 도덕의 근본 개념인 '죄'가 '부채'라는 매우 물질적 개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앞서 언급처럼, 인간 사이의 가장 원천적인 사회적 관계는 채무자-채권자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또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자'로 형성되면서, 이미 확산시킨 부채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에 의한 삶의 통제가 가능하다는 파악이다.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다. 그가 대학교를 마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학자금 대출이 필요할 터다. 즉 취업이라는 사회진출이 이뤄지기 전부터 그는 부채를 끌어안고 시작하게 된다. 이제 '부채상환'은 삶의 중요한 목표로 자리 잡을 것이다. 부채를 갚아야하는 기한은 이미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삶의 양식을 '스스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 취업, 주거형태, 소비방식 등을 결정할 때마다, 그 최우선 기준은 '부채를 어떻게 갚을 것인지'가 되기 쉽다.
저자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시민의 삶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처럼 '스스로' 옥죄게 만드는 것을 다시금 강조했다. "인간들은 법률적·강제적 억압이 아니라도 빚을 갚기 위해 '자율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게 된다"며, "체제는 우리에게 '당신은 자유롭다 부채를 갚기 위해 일하고 생활할 자유가 있잖아'라고 속삭인다"고 지적한다.
가장 시급한 임무는 산업사회에서 파업이 그랬던 것처럼 봉쇄 효과가 있는 투쟁 방식을 고안하고 실험하는 일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명령을 탈영토화시킬 수 있는 수준이 필요하다. (…) 근본적으로 두려움의 윤리라 할 수 있는 부채 경제와의 투쟁, 특히 죄책감의 윤리에 대한 투쟁은 또한 특수한 주체의 변화를 요구한다. (…) 따라서 이는 단순히 부채를 탕감하거나 파산 신청을 내는 것이 아니라―이런 일들이 매우 유용할 때조차도―우리를 가두고 있는 담론 및 부채의 도덕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다. - <부채인간>, 222~223쪽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저자는 내면화된 부채에서 벗어나는 것을 꼽는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자본' 혹은 '보편적 채권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들었지만, 이를 깨트려야 한다는 조언이다. 또 우리가 부채에 대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수많은 시간을 잃었다고 역설한다. 앞으로는 가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재앙으로 몰아넣는 권력 장치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다는 것이다.
한국은 '빚 권하는 사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대선을 앞두고 후보들마다 '부채 경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들이 전혀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정부와 금융기관에 의존하는 방향이어서, 가계 부채를 공공 부채에 떠넘기는 꼴이라고 비판도 거세다. 심지어 이 같은 정책을 향해 부채는 개인책임이라며, 도덕적 해이와 형평성을 문제 삼는 언론도 있다.
그러나 <부채인간>은 '부채 경제'가 단순히 개인이나 정책적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시킨다. 어떤 대통령이, 어떤 정책을 실현하다고 하여도 부채를 일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지금 필요한 것은 저자의 조언처럼 '새로운 인식'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확고한 우상으로 기능했던 신자유주의 체제가 흔들리는 지금, 부채에 대한 사유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대안은 거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옛 수메르 제국에서는 부채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이면, 그것을 기록한 점토판을 모두 파괴해버렸다고 한다. 물론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방안이다. 하지만 그 만큼의 혁신적인 해결책이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한국은 '빚 권하는 사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 고민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부채인간>의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부채인간>,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지음,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 펴냄, 2012년 10월,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