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7시 군산시평생학습관(구 여성회관)에서 열린 '群山學'(군산학 : 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세 번째 강의에서 군산문화원 이복웅 원장은 군산의 월명산(月明山), 월명동(月明洞) 등의 지명을 일제잔재로 인식하는 분이 많은데, 순수 고유지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원장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제35대 경덕왕(?~765) 때 명승 월명대사(月明大師)가 지은 <도솔가:兜率歌>와 <제망매가:祭亡妹歌>에 '월명리'란 지명이 등장한다"며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월명(月明)'을 일본인들은 '명월(明月)'을 즐겨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신라 경덕왕 19년(AD 760년) 4월 초하루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 동안이나 계속되는 괴변이 일어났어요. 이에 왕은 향가 작가인 월명대사를 불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하여 그 변을 물리치도록 청합니다. 이에 월명대사가 <도솔가>를 지어 부르자 괴변이 곧 사라졌어요. 월명대사는 피리도 잘 불었는데, 달밤에 피리를 불면 그 아름다운 소리에 지는 달마저 기울기를 멈추니까 그 길을 '월명리'라 명했다고 전합니다." 이 원장은 "조선 성종 17년(1486년) 완성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 중종 25년(1530)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산군 편과 철종 12년(1861년)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도 '월명산'이 표기되어 있다며 "일제 식민통치 이전(1907)에 다녀간 일본인이 쓴 기행문(부지군산)에도 '군산공원에 오르니 인근 남쪽에 월명산이 있더라'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부연했다.
이 원장은 "1934년 제작된 군산부(府) 전도에 '월명동'이란 동명이 등재되기 시작한다"며 "일부 시민단체와 시민은 '월명산과 월명동도 일제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민족적 감정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이어 "군산에서 학교에 다니던 일본인 자녀들이 해방(1945) 후 본국으로 돌아가 결성하고 왕래하는 친목단체 이름(월명회)에서도 자극을 받았을 것"으로 내다봤다.
군산은 경술국치(1910년) 이전까지는 지금의 해망로(본정통)를 시점으로 영화동이 중심지였다. 그 후 1920년대 후반 부청(시청) 건물을 중앙로(지금의 이성당 앞)에 신축하고 도시가 명산동까지 확장되면서 중심지가 된 월명동 지역(천대정)은 일본인 부자들만의 거주지가 되었고, 해방 후 최근까지도 고위 공직자나 회사 사장 등 부유층이 살던 동네였다.
이 원장은 "재미있는 야사와 깊은 의미가 담긴 고유지명을 일제는 1914년 행정 개편을 하면서 마을 이름을 모두 일본식 한자로 바꿔 놓았다"면서 "대야(배달메), 개사리(가세골), 내유리(안 버들리), 외유리(밖 버들리) 등이 대표적인 예이며 그 외에도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순수 우리말 지명에는 메(뫼), 멀(마을), 말(마을), 동(깊은 마을), 골(고을), 실(산이 감싸고 있는 마을), 이(리), 뜸(10가호 이하 들녘마을) 등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군산의 월명산은 어떤 산?
식민지 시절 일제의 쌀 수탈의 전진기지로 활용되다가 1937년 소설가 채만식(1902∼1950)에 의해 <탁류>를 잉태했던 도시 군산(群山). 일제의 손에 마을의 고유지명까지 찢기고 발겨지는 군산을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감싸며 지켜온 산이 있다. 군산의 진산(鎭山)으로 알려지는 월명산(月明山)이다.
높이 100m 남짓의 월명산은 시내(구도심권)를 둘러싼 수많은 산 능선 중 가장 높은 봉우리로 전북 장수군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금강(401km)과 더불어 군산의 상징이기도 하다. 해서 시내 초·중고등학교 교가(校歌)에서도 '월명산'이란 지명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월명산은 70년대만 해도 봄에는 움막을 짓고 양봉업을 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아카시아 꽃이 지천이었다. 여름에는 맑은 공기를 내품는 숲이 하늘을 가렸다. 가을엔 단풍으로 물들었으며 겨울엔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이렇듯 계절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제공해주어 시민의 휴식처로, 청춘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는 소풍 장소로 인기가 좋았다.
조선 백성이 신성시했던 산, 일제 때 개인 정원으로 사용
군산의 주산(主山)으로도 불리는 월명산은 조선 시대부터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름에 가뭄이 들면 주변의 내영리(금동), 상정동(월명동), 노루목골(송풍동), 큰 절골(신흥동), 작은 절골 농민들이 나무 장작을 지고 정상에 올라 장작불을 태우며 비가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한다.
이렇게 조선 농민의 손으로 지내던 기우제는 일제강점기에 관(군산부청) 주도로 바뀌게 된다. 1926년 일제가 산 정상에 '慈雨惠民'(자우혜민: 자애로운 비로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 음각된 2층 기단 규모의 화강암 비를 세우고 군산신사의 일본인 신관이 제례를 주관하는 일본식 기우제를 지냈던 것.
월명산은 조선 시대부터 동이 트기 전 정상에 올라 오성산 방향에서 떠오르는 해를 가슴으로 품으며 무병장수를 기원했던 해맞이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인근에 당산, 서낭당 등이 있었고, 주민이 신성시해서 무덤도 쓰지 않았던 산이다. 그토록 신성한 장소를 일제는 개인 사유지로 정원을 조성하고 공자묘와 보국탑(5층)을 세우도록 허가했다.
보국탑은 군산 미곡취인소(미두장) 이사장과 도의회의원, 부의회의원을 역임한 모리키쿠(森菊五郞) 대농장주가 1935년 6월, 자기 아들이 천왕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국가에 보은한다는 의미로 세웠고, 공자묘는 석가, 예수, 공자를 모시고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의 맹주가 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모시는 제각이었다 한다. 아래는 1층 면석에 새겨진 보국탑 건립 배경이다.
"그는(모리키쿠) 군산에 와서 농업을 일으켜 조선 백성에게 곡식을 넉넉히 먹일 수 있게 되었고, 남은 곡식은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의 식량 사정에 도움을 주어 일본인이 이로움을 얻었다.(중략) 이 탑을 보국탑이라고 한 이유는 그의 후손이 이 탑 아래에 영원히 살면서 나라에 보국의 뜻을 더욱 굳건히 하길 기약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군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230쪽에서)
군산시청 김중규 학예연구사는 "당시 군산에 살던 일인들 의식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소중한 자료로 석탑을 가루로 만들어 비행기에 싣고 가 일본 열도 상공에 뿌려도 시원치 않을 오만방자한 뜻이 담겨 있다"며 개탄했다. 그는 "모리키쿠 농장주 분신을 이 땅에 포로로 잡아두고 영원히 죗값을 치르게 해도 될 것을 철거해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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