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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 만들기 1천만 선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 낮은 곳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우리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핍박받고 홀대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반드시 개선시켜보자고 많은 이들이 맘과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10월 27일 '10만 촛불행진'을 준비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비정규직 없는 사회를 위한 마음을 모아봅니다. [편집자말]
2003년, 김주익과 정은임

"새벽 3시, 고공크레인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 일을 고공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혼자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2003년 10월 22일 MBC 라디오 <FM 영화음악> 진행자 정은임의 오프닝 멘트다. 그해 10월 17일 한진중공업의 노동조합 지부장이었던 김주익이 35미터 고공크레인 위에서 목을 매 숨졌다. 닷새 후 정은임이 한 노동자의 죽음을 공중파 라디오 방송에서 호출했다. 켄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의 배경음악을 들려주면서.

정은임은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이 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귀족이라고 매도하던 그때, 수구보수언론이 하이에나마냥 그 이데올로기 무기를 탄환 삼아 현장노동자들의 절박한 생존권 투쟁을 무자비하게 사냥하던 바로 그때, 노동 귀족의 현실을 군더더기 없이 알리면서 퍽 감동적으로 옹호했다.

그 심야에, 김주익이 생을 버리기 전에 이런 음악방송을 매일 들을 수 있었다면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누구라도 바깥에서 김주익에게 진심 어린 구명줄을 던졌다면 그가 세 아이를 두고 차마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이제 와서 부질없지만 그때 방송을 다시 들으며 상념이 깊어진다. 그 실낱 같은 희망이 절실했던 그때 김주익은 완전히 고립됐고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2011년, 김진숙과 희망버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309일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과 137일간 농성을 벌인 사수대 3명이 2011년 11월 10일 오후 노사잠정합의안이 노조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면서 크레인을 내려왔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309일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과 137일간 농성을 벌인 사수대 3명이 2011년 11월 10일 오후 노사잠정합의안이 노조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면서 크레인을 내려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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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후 김진숙이 죽음이 어른거리는 바로 그 크레인에 올라 309일 동안 외로운 싸움을 이어갔다. 독재정권에 희생된 박창수와 85호 크레인 위에서 민주노조 사수를 염원하며 산화한 김주익, 아끼는 동생을 먼저 보낸 아픔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그 크레인이 내다보이는 도크 아래 몸을 던져 숨진 곽재규의 영정까지 가슴에 묻고 그 오랜 싸움을 질기게 이어갔다.

희망버스가 없었다면…. 김주익과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을 비롯한 숱한 노동자들의 희생이 희망버스를 만들었고 그 희망버스란 구명줄이 김진숙을 살려냈다. 노동이 찬밥 신세인 한국 사회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진숙의 몸짓이 한국 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건 그 진정성이 죽음을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소박하고 절실했으며 무엇보다 진실했기 때문이다. 30여 년 넘게 해고노동자로 살아오면서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자기 삶의 무게를 온전히 견디며 살아낸 그 내력에 시민들이 감응했다. 김여진도, '날라리' 연대도, 그 숱한 익명의 시민들 모두 김진숙의 삶에 감응하여 달려갔다.

그 김진숙이 현장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자기보다 수십 배 많은 평범한 중년 노동자들을 기억해달라 호소했을 때, 왜 김진숙이 거기 올라갔는지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 없이 숫자로 기억되는 그 가장들이 평온하고 행복한 저녁 만찬 한 끼를 가족과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호소를 들으면서 모두의 가슴 속엔 다시 부산으로 가야 할 이유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그리 주목받지 못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김진숙이 사내하청 노동자 문제를 포함한 비정규직 문제에 누구보다 관심이 컸고 오랜 세월 가장 밑바닥의 비정규직·중소영세 사업장·이주노동자들과 어울려 연대하고 투쟁해왔다는 것. 그랬기에 그이가 굳이 따져 정규직 해고노동자임은 관심 대상이 아니게 됐다는 사실.

그가 해고됐던 때 그 정규직이 지금의 비정규직보다 그닥 나은 것도 아니었지만 여느 때 같으면 늑대 떼처럼 달려들었을 '조중동' 찌라시들이 되먹지도 않은 흑색선전을 제대로 못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이에 대한 공격이 되레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김진숙이 민주노조운동의 가치와 정신을 올곧게 지키며 살아오게 한 원동력인 박창수 열사와 김주익 열사, 곽재규 열사가 김진숙을 살린 것이다. 정은임은 그 김주익을 잊지 않았고 귀족으로 자처해도 될 자신의 신분 안에 갇히지 않았다. 손 내밀었고 그 손내밈이 너무 늦은 데 대해 미안해했다.

그이가 노동운동을 한 건 아니지만 그 감수성은 이미 노동운동의 자장 안에 들어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노동운동이 잃어버린 그 노동인권 감수성을 2003년 정은임은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김주익에 대한 정은임의 그 안타까움이 김진숙에 대한 희망버스 승객들의 안타까움 바로 그것이지 않았을까.

2012년, 정은임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

정은임은 필자의 대학교 같은 과 후배다. 학번으로 치면 4년 아래다. 학생운동과 야학, 위장취업을 거쳐 군대를 기피하는 '도바리' 끝에 결국 부모님 성화를 못 이겨 군대에 입대하고, 30개월을 다 채우고 제대한 후 복학한 교정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예쁘고 착한 후배였다는 기억이 가물거릴 뿐 특별한 에피소드조차 없다.

그런 그녀를 십수 년 후 김주익 덕분에 목소리로 다시 만난 셈이다. 김주익을 지켜야 하는 일이 생업이 된 처지에서 찾아들은 후배의 얘기가 반갑고 살가웠지만 당시 참 아프게 심장에 꽂혔다. 귀족 노동자를 여봐란 듯이 감싸면서 그 귀족이란 표현이 얼마나 잘못되고 비틀린 언사인지를 담담한 목소리로 전파한 정은임을 떠올리며 새삼 부끄러움이 크다.

자기 같은, 먹고살 만하고 집도 있고 사회적 인정도 받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이 귀족인 줄 알았는데 세 아이에게 사줄 인라인스케이트값 19만3000원이 없어 애끓는 부정을 유언으로 남긴 노동자를 귀족이라고 부르더라며, 우리 사회 주류 기득권의 뒤틀린 인식에 한방 어퍼컷을 먹이는 그이의 목소리 앞에서 자괴감이 커진다. 그이라면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비정규직 노동자도 섞여있을 청취자에게 뭐라 얘기를 건넸을까.

솔직히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감상에 젖긴 싫다. 세상사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대선 소용돌이 속에 비정규직 문제가 한갓 듣기 좋은 립서비스로 치부돼가는 경향을 나 같은 놈이 외친다고 바뀌지 않는 줄도 안다. 정규직 노조들에게 다른 건 다 빼고 노동자들끼리의 연대와 단결을 위해서라도 정규직 요구를 선뜻 양보해서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정규직화 요구를 얻어내야 결국 정규직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해봐야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더구나 독재자 박정희를 여전히 사모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또아리 틀고 있는 이 분단조국에서 노동문제, 그것도 난제인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대중적 열망을 모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게 아직은 얼마나 가당찮은 고집인지 안다.

정은임이 부러운 건 그 지점이다. 공중파임을 개의치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과 <인터내셔널가>를 트는 그 용기와 진정성.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이길 갈망하며 소통하고 교감하려는 진실한 몸짓. 비정규운동이랍시고 뛰어다니고 있는 나는 과연 지금 여기 누구와 무엇을 온몸으로 느끼고 교감하고 소통하고 있는지 부끄럽다.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소시민으로 자족하면서 노동운동입네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프게 자문해본다.

2012년,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25일 오후 울산 북구 현대차 공장 명촌중문 앞 송전탑에서 지난 17일부터 정규직 전환 이행을 촉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최병승씨(아래)와 천의봉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25일 오후 울산 북구 현대차 공장 명촌중문 앞 송전탑에서 지난 17일부터 정규직 전환 이행을 촉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최병승씨(아래)와 천의봉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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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12년,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현재 한국 사회 노동자들을 가장 우울하게 하고 비통하게 만드는 문제다. 2003과 2012년이 노동자들에겐 다를 게 없다. 재능 학습지 교사들은 1800여 일 가깝게 장기투쟁 중이고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은 곡기를 끊은 지 오래다. 울산에선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2명이 목숨을 걸고 송전철탑에 오른 데 이어 유성기업 아산지회장도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이제 정당한 이 투쟁들이 승리하길 바라서만이 아니라 이들을 진정 살리기 위해서라도 이 노동자들 어깨에 얹힌 무거운 짐을 나눠질 때다.

대선이 코앞이다. 안철수 후보가 가세한 3자 구도 속에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복지는 대선주자 그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과제로 굳어졌다. 야권 주자들은 물론이고 여당의 박근혜 후보마저도 비정규직 문제 개선을 약속하고 있다. 마침내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의 전기를 맞게 된 것일까.

노동 문제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계급 문제다. 불법파견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라고 대법원이 판결해도 현대차 정몽구 회장은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묵살한다. 그 누구보다 진정성을 인정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한탄하지 않았던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은임이 김주익을 부르던 그 심정으로,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오르던 그 심정의 일단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기 자리보다 더 낮은 곳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힘겨운 삶의 가장자리에서 휘청대고 있는 이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 가족과 이웃 중에 이미 상당수가 비정규직이다.

10월 27일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 만들기' 10만 촛불행진이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돼야 행복한 직장이자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 행복해지는 걸 주저하지 말고 함께 행동하자는 것, 작년 희망버스처럼 다른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면서 교감하자는 것, 여기에 동의하는 모든 이들이 모인다.

삼삼오오 가족과 이웃, 친구, 연인의 손을 맞잡고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세상,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지 말고 함께 꿈꾸자. 포기해야 할 이유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견뎌야 할 이유가 더 많은 모든 이들과 함께 어깨동무하자.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소통과 공감의 광장에서 한마디 외쳐보는 것은 어떨까.

"외롭게 하루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 만들기 10만 촛불행진' 포스터
 '비정규직 없는 일터와 사회 만들기 10만 촛불행진' 포스터
ⓒ 비정규직없는일터와사회만들기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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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입니다



태그:#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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