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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세폴리스의 전경.
페르세폴리스의 전경. ⓒ 박찬운

페르세폴리스는 시라즈에서 이스파한으로 가는 간선도로를 타고 약 70여 킬로미터를 가는 곳에 있다. 이곳은 통상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로 알려진 곳이나 좀 더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아케메네스는 수도를 행정적 수도와 왕이 사는 왕도(또는 종교적 수도)로 나누어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왕조를 연 키루스 대왕은 바빌로니아의 옛 수도였던 수사를 행정적 수도로 정하였으나 왕이 사는 왕도로는 파사르가데를 새로이 만든다. 그 뒤 다리우스 1세는 왕도를 파사르가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신도시 페르세폴리스로 옮긴다.

페르세폴리스는 아케메네스의 최전성기인 다리우스 1세 시절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9년) 때 완성된 도시다. 이곳은 알렉산더의 원정 때 그의 군대가 술을 마시며 저지른 방화로 완전히 전소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거대 대리석 궁전이 하룻밤의 불로 주저앉을 수가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그에 대한 해답으로 당시 이 궁전의 기둥은 모두 석주였지만 지붕은 통나무였을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 따라서 지붕에 불이 붙자 그것과 연결된 모든 부속품들은 녹아서 궁전 전체가 주저앉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마치 9·11 사태 때 뉴욕의 월드트레이드 빌딩이 녹아서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페르세폴리스는 지난 2000년 이상 땅속에 파묻혀 있다가 1931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동방연구소 고고학팀에 의해서 발굴됨으로써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왕 중의 왕' 다리우스의 흔적을 찾아

 페르세폴리스의 그 유명한 조공행렬도.
페르세폴리스의 그 유명한 조공행렬도. ⓒ 박찬운

그럼 지금부터 현재 남은 이 궁전의 모습을 설명해 보자. 우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궁전 입구 계단을 올라오면 만국의 문을 만나게 된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번성기에는 외국의 사신이 이곳을 방문하면 계단의 맨 위에서 우렁찬 트럼펫이 울렸다고 한다. 그러면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가 나가 사신을 맞이하여 만국의 문으로 안내한다. 이들이 들어 오는 문 양편에는 돌로 만든 목우상과 사람의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 몸뚱이를 한 유익인면수신상(有翼人面獸身像)이 나타난다.

이 날개에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말이 새겨져 페르시아어와 바빌로니아어 및 엘람어로 쓰여 있다.

"나 크세르크세스 대왕은 왕 중의 왕이며 많은 종족의 왕이며 다리우스 대왕의 아들이다…."

이 만국의 문을 거치면 의장대 사열로가 나타난다. 길옆에 의장군인이 도열해 있는 장소가 지금도 선명하다. 사열로 오른쪽으로 큰 궁성의 터가 보인다. 높이가 20미터가 넘는 석주 십수 개가 지금도 위용을 자랑하는데 그것이 백 개나 서 있었다고 하는 백주지(百柱址)와 아파다나 궁전이 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백주지는 조금 작은 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왕이 접견하는 곳이고, 아파다나는 큰 나라의 사신이나 제국의 중요 인물이 왕을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아파다나의 계단 벽면과 중앙 궁전에 새겨져 있는 부조다. 아파다나 계단의 부조에서는 조공자행렬도와 사자가 목우를 습격하는 동물투쟁도를 볼 수 있는데 아주 사실감있게 새겨져 있다. 여기서 보는 행렬도가 바로 이란의 어느 선물가게에 가도 볼 수 있는 석판 부조다. 주변국에서 말, 소, 금가락지, 향수병 및 상아를 각각 헌상하는 그림에서 고대 페르시아의 화려한 역사를 알 수 있다.

중앙 궁전 동문 입구의 부조에는 왕관을 쓴 다리우스 대왕과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를 볼 수 있는데 대왕의 옥좌는 28명의 속국에서 온 대표들이 받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궁전의 맨 오른쪽은 왕들이 이곳에 왔을 때 묵은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이 크다. 한편, 이곳 유적지에는 조그만 박물관이 하나 있다. 이 박물관은 크세르크세스 유적지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과거의 궁전을 훼손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의 박물관다. 이곳 발굴 과정에서 나온 돌사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페르세폴리스의 뒷산 라흐마트의 암굴묘 부조.
페르세폴리스의 뒷산 라흐마트의 암굴묘 부조. ⓒ 박찬운

마지막으로 꼭 봐야 할 것이 궁전의 뒷산 라흐마트의 암석에 있는 두 왕의 무덤이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3세의 무덤인데 모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암굴묘다. 이 묘의 상단에는 28국의 속국 대표들이 지고 있는 옥좌 위에 피장자가 있고, 그 앞에는 활활 타는 불이 있으며 하늘에는 선신인 아후라마즈다의 신상(이것은 앞으로 보게 될 야즈드의 아슈테가데 사원에서도 볼 수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심볼이다)이 조각되어 있다. 이같은 모양의 무덤은 아래에서 보게 될 낙쉐 로스탐의 무덤과 같은 형태이나 연대적으로 보아 페르세폴리스의 무덤은 낙쉐 로스탐을 모델로 해서 만든 것이 확실하다.

나는 이곳을 시라즈 문화재관리국의 직원(말리)과 함께 두어 시간을 함께 걸으며 안내를 받았다. 그녀는 페르세폴리스를 완전히 종교적 도시로 설명하였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이 도시는 노루즈(No Ruz)라는 신년 행사를 위한 도시라는 것이다. 이 도시 바로 뒷면에 위치한 라흐마트 산 위에서 신년이 되면 화려한 불의 제전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위해 왕을 비롯한 많은 신민들이 이곳에 운집하였다. 왕이 오면 묵을 곳이 필요했고 여러 속주로부터 오는 사신들을 맞이하는 알현 장소가 필요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이러한 의식을 아주 엄숙하게 진행한 모양이다. 수많은 의장 사열대가 도열해 트럼펫의 고음을 뽐내는 과정에서 속국의 사신들은 기가 죽은 채 다리우스 대왕과 그 옆에 서 있는 황태자 크세르크세스의 위용을 보았을 것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비참한 로마황제

 낙쉐 로스탐에서 볼 수 있는 암굴묘.
낙쉐 로스탐에서 볼 수 있는 암굴묘. ⓒ 박찬운

우리 탐사단은 페르세폴리스와 아쉽게 작별을 하고 이스파한으로 가는 간선도로에 들어섰다. 낙쉐 로스탐은 한 마디로 암굴묘군(岩窟墓群)이다. 사막 한가운데에 그리 크지 않은 바위산이 있다. 그 바위산의 한 면을 깎아 절벽 중앙에 구멍을 뚫고 묘를 만들고 그 위아래로 벽면 부조를 만들었다. 이곳에는 현재 4개의 묘가 있는데 암벽을 향해 왼쪽부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2세 순이다. 다만 다리우스 1세 외의 묘에 대해서는 그 주인에 대하여 이설이 있다고 한다.

이들 묘군은 앞서 본 페르세폴리스의 라흐마트 산 절벽에서 본 묘의 바로 전대에 속하는 것들로 거의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묘실 표면은 전체적으로 십자가 모양이며 상부에는 피장자가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과 조로아스터교의 선신 아후라마즈다의 신상, 그리고 불꽃이 그려져 있다. 다만 이들 부조의 상태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마모도가 심하다.

 샤푸르 1세에 사로 잡인 로마황제 발레리아누스.
샤푸르 1세에 사로 잡인 로마황제 발레리아누스. ⓒ 박찬운

각각의 묘실 아래에는 아마도 후대 사산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기마전투도 등이 부조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암벽 중앙인 크세르크세스 1세와 다리우스 1세의 묘실 사이에 있는 그림이다. 이는 260년 에데사에서 사로잡힌 동로마제국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말 위에 앉아 있는 사산 왕 샤푸르 1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이다.

말이 나왔으니 잠깐 발레리아누스에 대하여 한 마디 하자. 로마제국은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말까지 대략 100년간 오현제 시대를 맞이하여 이른바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제국은 기울기 시작한다. 변방의 군사령관들이 어느 날 갑자기 기존 황제를 살해하고 황제가 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제국의 변경에는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졌고 그 와중에 동쪽 변방에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예라고 일컫는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나타나 로마제국을 압박한다. 그 과정에서 군인황제 발레리아누스가 큰 맘 먹고 출정한 것이 샤푸르 1세와 한 판 붙은 에데사 전투다. 여기에서 발레리아누스가 샤푸르의 포로가 된 것이다.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로마황제가 전쟁 중에 죽는 일은 있어도 포로가 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역저 <로마인이야기> 제12권에서 아주 리얼하게 표현한다.

"260년 새해 벽두에 뉴스 하나가 전 세계를 휘저었다. 로마 제국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제국 밖에 사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그 정보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세계문명기행#페르시아 문명#페르세폴리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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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로스쿨에서 인권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30년 이상 법률가로 살아오면서(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역임) 여러 인권분야를 개척해 왔습니다. 인권법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오랜 기간 인문, 사회, 과학, 문화, 예술 등 여러 분야의 명저들을 독서해 왔고 틈나는 대로 여행을 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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