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날씨지만 땅에 엎드렸다 일어나기를 30번 반복하니 땀이 나기 시작한다. 조양진성(35) 청년노동광장 대표가 108배를 하는 곳은 국회 앞, 점심때를 맞춰 국회직원들과 관람 온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양 대표는 대선을 앞두고 뜨겁게 끓고 있는 '투표시간연장' 요구를 '성의 있게' 하는 중이다. 그의 몸도 점점 뜨거워지는 게 보인다. 108배는 15분 정도 걸려 그의 숨이 가빠질 때 끝이 났다.
31일 정오, 조양 대표가 이곳에 두꺼운 방석을 깔고 신발을 벗은 후 땅에 엎드리기를 108번 반복한 지 28일째, 한 달이 다 돼간다. 그의 옆에는 인기 개그프로그램의 유행어를 본뜬 '투표시간이 짧아도 너~무 짧아'라는 문구와 '투표시간 성의 있게 연장하자'고 적힌 현수막이 세워졌다. 뒤에 문구는 "투표는 성의 문제"라고 한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말을 따온 것이다. "'성의'를 보일 테니 투표 시간을 연장하라"는 취지다.
"어렵게 성의 내는 게 투표? 제도 개선하는 게 당연"
조양 대표가 몸담고 있는 청년노동광장은 1년에 한 차례 '청년노동자학교'를 개최하고 역사탐방·노동현장탐방·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등을 진행하는 청년노동자 교육기관이다. 청년노동자 학교는 그동안 4회에 걸쳐 200여 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이곳에서 만난 청년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 조양 대표가 이번 투표시간연장 운동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저희 회원 중에 백화점 노동자가 있는데, 새벽같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 오후 8시가 넘어 퇴근해요. 투표일에 백화점이 쉬는 것도 아니고, 투표를 하지 말라는 얘기죠. 오후 9시까지 연장된다고 해도 뛰어가야 할 판이에요. 아이 맡기고 출근 전에 하면 될 거 아니냐고 하지만 투표가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건데, 투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면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조양 대표는 자신이 '생계 문제'로 실제 피자가게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을 소개했다. 그는 "오전 8시 출근해 오후 9시에 끝났다, 선거가 한 번 있었는데 오전 6시에 부인과 교대로 투표를 하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했다"며 "아주 어렵게 성의를 내서 투표를 하기 했지만, 같이 일하는 친구들 중에는 일 때문에 몸이 힘들고 휴가를 내거나, 외출 시간을 달라는 게 눈치 보여 투표를 포기하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SBS와 <중앙일보>, 한국리서치 패널여론조사에 따르면 투표를 포기한 이유를 묻는 말에 2006년 55%, 2007년 41%, 2008년 44.9%, 2010년 55.8%가 "바빠서"라고 답했다. 이 조사에서 "찍을 사람이 없다"는 답변은 2008년 총선에서만 34.7%를 기록했고 나머지 선거에서는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고용이 불안정한 비정규직의 확대가 불러온 결과라는 게 투표시간 연장을 요구하는 측의 주장이다.
3년 전 24시간 투표 제안한 친박 의원들... "정치권, 유불리 따지지 마라"'투표시간 연장'은 대선 정국에 최대 화두가 되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표가 일찌감치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한 데 이어, 안철수 후보도 최근 "오후 8시까지 연장"을 이야기했다. 박근혜 후보만 "연장에 100억 원이 든다"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발언으로 박 후보는 "실제 비용은 36억 원이면 충분" "아예 선거를 안 하면 1000억 원 예산 절감"이라는 비판을 받는 상황이다.
조양 대표는 "늦은 감이 없지만 두 대선 후보가 투표시간 연장의 필요성을 밝힌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평했다. 다만 "민주당은 실질적인 법 계정 움직임 없이 정치공세로만 투표시간 연장을 말하는 건 비판 받을 만하다"며 "안철수 후보도 뭔가에 쫓겨서 한 느낌인데다가, 노동계와 시민사회에서 이미 오후 9시까지 연장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독자적으로 오후 8시간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나,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 후보의 결단을 촉구하며 정치권 전반의 진정성 있는 태도를 요구했다.
"박근혜 후보가 추가비용 100억 원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문제죠. 국민의 참정권을 확대하는 일에 비용 문제를 꺼낸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요. '투표는 성의 문제'라고 한 것에서 한 치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지금의 투표 시간은 40년 전 농경사회에나 어울립니다. 정치권은 투표시간에 따른 자신들의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진정성 있게 이 논의를 진행해야 할 때입니다." 조양 대표는 계속되는 새누리당의 투표시간 연장 반대에 "친박계 의원들이 예전에 24시간 투표제까지 발의했다"며 "비용과 성의를 운운하는 게 지금 태도가 그들이 비판하는 정치적 책략"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009년 친박연대 비례 1번이었던 양정례 전 의원 등 10명은 "생업에 종사하는 선거인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선거권 행사의 편의를 위해 투표시간을 선거일 0시부터 24시까지 연장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엎드려 있으면 정치권도 절 하겠죠"
조양 대표가 108배를 하는 동안 주변에 관심은 계속됐다. 큰 키에 덩치도 있는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마지막 1배를 하고 자리를 정리하자 근처에 있던 경찰이 찾아와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결혼식에서 투표시간 연장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여 SNS에서 화제가 됐던 신랑과 신부도 한복을 차려입고 와 108배를 함께했다.
조양 대표는 "매일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는데 그걸 보고 같이 참여하겠다고 오시는 분들도 있다"며 "지금까지 20일 정도는 혼자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투표시간을 연장하자는 요구가 국민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걸 느낀다"며 "11월 25일 후보 등록 마감 전 확정 돼 이번 대선부터 적용되길 기대한다, 그때까지는 계속 절을 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엎드려 절 받기'라는 속담도 있는데, 계속 엎드리면 정치권이 언제가 같이 절을 하지 않을까"라고 웃으며 말했다.
11월 2일에는 국회 앞에서 조양 대표와 함께 108명이 함께 108배를 진행한다. 4일에는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투표시간 연장을 촉구하는 '투표락페스티벌-투표행SHOW'가 서울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시민사회가 준비한 '투표시간 연장 10만 청원 서명'도 곧 국회에 제출된다. 이제 새누리당이 다시 응답할 때다.
"대선 후보들, 투표시간 연장 결단하라" 교수·변호사 513명, 시국선언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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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및 변호사 513명은 정치권이 즉각 투표시간을 연장하는 법적 조치에 나서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31일 발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214명), 민주주의 법학 연구회(80명), 민주화를 위한 전국 교수 협의회(73명), 전국교수노동조합(100명), 학술단체협의회(46명) 소속 교수 및 변호사 513명은 선언문을 통해 "여야 정당과 국회는 속히 행정안전위원회를 소집해 투표시간을 연장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11월 초까지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특히 "여기에는 대선 후보들 역시 앞장서야 할 것"이라며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후보라면 국민의 투표권을 최대한 보장한 가운데 지지층 확대를 위해 노력해야지, 당선을 위해 선거제도의 유불리를 따지는 꼼수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선거일에도 노동자의 절반이 근무하고, 행여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투표할 시간을 달라 하지 못하는 비정규직들과 자신이 운영하는 가계의 일과시간에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영세한 자영업자가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의 동의로부터 나오므로 유권자 중 한 명이라도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면 그 개선책을 내놓는 것이 정치권의 의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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