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른 것은 '재벌개혁' 문제다. 2012년 총선에서는 출자총액제한·순환출자금지 등 경제적으로 재벌을 압박하고, 더 나아가 재벌 자체를 해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대선을 앞둔 현 시점에도 각 진영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제민주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복지'와 '재벌개혁'을 너나 할 것 없이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반(反) 재벌적 움직임은 1980년대 민주화의 바람이 불면서 일어나기 시작해 1997년 IMF 사태 이후, 그 바람은 더욱 거세져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벌을 해체하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개혁의 강도가 더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비난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재벌 그 자신들이다. 국민 정서에 반하는 온갖 불법·탈법·부정부패를 일삼아 왔고, 이렇게 많은 비판이 이는 데도 반성은커녕 강력한 자본의 힘을 앞세워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2007년 삼성 X파일 사건·반도체 공장 노동자 백혈병 사망 사건·한진중공업 사태·쌍용차 사태·탈법적인 재산권 상속·골목상권 침해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며 상대적 박탈감으로 얼룩진 서민들의 가슴에 더욱 깊은 피멍을 들게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재벌의 패악을 청산하기 위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재벌개혁의 방향에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총제 부활이라든지 순환출자금지 등의 재벌규제는 결국 종국에 이르러서는 재벌해체를 그 목표로 하는 일련의 정책적 규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들이 행해지게 된다면 과연 한국 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피멍으로 얼룩진 서민들의 가슴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있을까? 또 경제민주화를 부르짖는 많은 이들이 주기적인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재벌과 박정희식 국가주도 경제개발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이며 올바른 문제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재벌은 사회에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한국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분명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조차 눈감아 버린 채 무조건 재벌해체가 능사라는 주장은 미래 한국 경제 발전에 있어서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현재 한국 경제의 문제와 재벌개혁의 방향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문제점과 더불어 재벌의 문제와 재벌개혁 방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금융시장 자유화와 재벌의 위기1990년대 중반 우루과이 협정으로 자유무역을 기조로 한 WTO체제가 도래한다. 이에 한국은 1996년 OECD 가입의 조건으로 '금융선진화' 조치를 단행하게 되는데, 그 골자는 노동유연화와 금융개방정책이다.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촉발된다. 국내의 대기업들은 당시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채가 500%가 넘을 정도로 재무구조가 건전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개방화체제를 받아들이게 되고 거기에 해외 금융시장에서 자금 조달까지 받으며 위태로운 경영 상태를 유지해 나간다. 은행 또한 제대로 된 리스크 평가 없이 무리한 기업·가계 대출을 지속하게 되고 결국 기업 자본의 부실과 은행의 유동성 위기로 해외자본이 한 번에 빠져 나가면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결국 동남아시아의 외환위기로 유동성이 악화되고 기업들이 시장에서 퇴출되기 시작한다. 금융권과 기업들은 해외 단기 자금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으나 경상수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던 한국에 달러가 충분할 리는 없었다. 결국 한국은 IMF 구제 금융을 요청하게 되고 이후 1년 동안 한국의 경제적 주권은 IMF로 넘어가게 된다.
준비되지 않은 금융자유화 조치는 많은 부작용을 잉태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금융 감독 시스템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고, 기업의 재무구조도 건실화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자금은 끝없이 유입되었으며 그 결과 금융시장이 불안에 요동치고 수많은 기업이 파산하면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가계가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이후의 조치들도 문제가 많았다. 구조조정이라는 미명 하에 재무구조가 부실하다는 이유 하나로 많은 기업들이 시장에서 퇴출되었고, 공기업들도 방만한 경영을 일삼는다고 해 7개 기업을 민영화 시켜버린다. 이렇듯 한국 경제 환경이 IMF의 요구대로 개편되었으며 규제완화와 금융자유화를 더욱 가속시켜 나간다.
IMF 이후 한국의 경제 구조는 이전과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영미식 자본주의가 이식이 되고 시장에 되도록 국가가 개입을 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적인 모델로 경제체제가 완성된다. 신자유주의는 각종 규제 완화와 금융자유화·정부의 시장 개입 금지 등을 강조한다. 또 금융자유화에서 파생되는 경제적 구조는 주주자본주의이다. 한국의 기업들은 그 자본주의 원리를 충실히 따랐고, 해외의 자본들이 투자하기 좋고 말 잘 듣는 한국으로 투입되기 시작한다. 모든 불행의 조건을 충족하게 된 것이다.
이후 외국 자본이 한국의 자본 시장을 잠식하게 된다. 결국 한국이 투기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내 대기업의 지분 구조를 봐도 그 양상을 알 수가 있다. 외국 자본이 대부분 50~60%의 대기업 지분을 점유하고 자칫 잘못하면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즉 주주 배당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적대적 M&A로 경영권을 빼앗겠다는 협박을 할 수가 있게 되었고 또 그런 사례가 현실에서도 속출하고 있다. 자본시장 개방 이전에는 대체로 주주배당이 순수익의 2% 내외였다. 하지만 개방 이후엔 주주 배당이 50%에 이르는 곳도 비일비재하다. 이제 기업의 모든 경제적 권력과 중심이 주주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한국 경제가 영미식 자본주의로 개편이 되면서 주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대기업의 경영권 하나 정도는 손쉽게 빼앗을 수 있는 구조가 되었고 이로써 재벌 대기업은 생산·투자·고용 등 기업의 기본적인 경제적 역할마저 주도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재벌의 위기이자 한국 경제의 불행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재벌과 금융자본의 결탁금융자유화 이후 한국의 재벌은 과거 국가 권력과 손잡는 대신 신자유주의에 편승해 거대 금융자본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적대적 M&A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기업은 주주들에게 이익환원율 30~50%로 가능한 한 많은 수익을 안기기 위해 노력한다.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정규직을 최대한 줄이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워야하고, 투자금과 설비자금이 많이 들어가는 장기적인 산업 대신 당장 수익이 나는 단기성 사업이라든지 골목상권 침투 등 대기업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사업을 확장할 뿐 아니라 원자재 단가를 낮추기 위해 끊임없이 하청업체를 억압해서 납품 단가 후려치기를 밥 먹듯 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이고 이 문제의 뿌리는 영미식 자본주의 이식, 즉 금융자유화와 규제 완화에서 비롯되었다.
만약에 대기업이 주주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수익이 낮아지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당장이라도 재벌 경영권을 위협하는 발언과 행위들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KT&G-칼 아이칸 경영권 분쟁의 예에서도 살펴 볼 수가 있다. 미국의 투기자본인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은 2005~2006년 KT&G의 주식을 대량 매입해서 KT&G가 보유한 부동산을 매각하고 자회사 인삼공사의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라고 압박했다. 칼 아이칸의 경영권 도전에 특별 수익 배당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소액주주들도 동조해서 부동산 매각을 관철시킨다.
KT&G는 유휴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원래 담배 농사짓던 곳이었고 위치도 좋아 계속 소유하고 있으면 땅 값이 오를 것이 분명해 매각 계획이 없었다. 또한 바이오 벤처 사업 등 신사업 투자에 대비해서 가지고 있던 부동산이었다. 하지만 칼 아이칸이라는 외국 투기 자본이 들어와 단기 수익을 노리고 매각을 단행케 했고 결국 이 게임에서 KT&G는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주주와 투기자본의 뜻대로 2005년 KT&G 주주 이익 분배율은 156%, 2006년은 96%에 이른다.
국제 투기자본이 한국 경제를 잠식하고 대기업의 생사를 좌지우지한다는 예는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많이 찾을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으로 그룹에서 분리 해체된 많은 기업들이 이런 국제 투기자본에 헐값에 매각되었다. 대우차·쌍용차·삼성차·하이닉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러한 기업들은 주주 자본주의의 원칙대로 R&D투자도 줄이고 정규직을 해고하고 설비투자도 줄여 장기성 산업 계획 대신 단기적 수익을 올리기 위해 열을 올리고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 시켰다. 이후 해외자본에 매각된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어버릴 때가 오면 투기자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싼 값에 다시 매각을 해버리고 자국으로 돌아간다. 일명 '먹튀'라고 부르는 투기자본으로 인해 대기업들이 경쟁력을 잃고 장기적인 투자를 할 동기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과거와 달리 투기자본에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어지고, 적대적 M&A의 위협이 재벌들을 굴복케 했기 때문에 주주 자본주의의 원칙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 구조가 형성되었다. 금융 자유화로 인한 재벌세력과 금융자본의 결탁은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을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기업이 국민 경제를 위해 존재하기 보다는 오로지 주주의 단기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소수만을 위한 집단이 되어 버린다.
재벌해체가 능사는 아니다출총제 부활·순환출자금지만으로 재벌의 경제력 집중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순환출자를 금지하게 된다면 많은 재벌 그룹들이 부분 해체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해체된 그 기업은 어디에 매각이 되겠는가. 바로 국제 투기자본에 매각될 것이다. 결국 외환위기 이후 그랬듯 우량 기업을 해외에 매각하는 일이 또 다시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한국 경제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고 오직 국제 투기자본에게 공짜 밥상을 차려주는 일이 될 것이 뻔하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고 눈앞에 보이는 행위가 거슬리고 불편하다고 그런 큰 기업을 통째로 해외로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진정한 재벌 개혁과 경제 민주화는 출총제 부활·순환출자금지라는 지엽적인 조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금융 자유화를 통해 들어오는 단기성 국제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조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국제 투기자본을 견제하지 못하고 주주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계속 만연한다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비정규직 문제, 양극화 문제 등 이런 서민의 삶과 직결된 한국 경제의 문제는 절대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자본 규제 조치로 득을 보는 집단은 경영권이 안정화되는 재벌 대기업들이다. 이들은 국제 투기자본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주는 만큼 그 사회적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 설비투자, R&D 투자를 늘이고 골목상권이 아니라 산업 고도화를 일으킬 수 있는 신사업 분야에 지속적으로 투자·진출해야 하며 중소기업과의 상생은 물론 법인세 인상·부자 증세 등 복지국가로 향하는 사회적 여망에 부응해야 할 책임이 있다. 투기성 자본에 잠식당하는 대신 경제민주화에 일조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투자를 통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만들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경영권도 안정화 되고, 신사업 진출을 통해 이익창출과 새로운 일자리도 많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니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진정한 경제민주화를 위하여역사적으로 봐도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경제력 집중 문제와 양극화 문제는 당연한 것이었다. 경제가 발전하기 전에는 모두가 가난했기에 양극화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없었고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산업 고도화에 따른 대규모 자본의 투입과 규모의 경제 발생으로 인해 대기업이 탄생하고 양극화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노동자 사이에서도 고급 기술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등이 발생해 같은 계층 내에서도 양극화는 당연히 발생하고 이는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도한 경제적 격차와 양극화 문제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계층 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고 한 국가의 경제성장 동력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경제민주화 논의가 대두되었으며 재벌을 개혁해서 양극화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
위에서도 알아보았다시피 재벌만 규제한다고 그 세력만 해체한다고 절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경제민주화는 한국의 자생 능력을 키워주는 동시에 사회 모든 구성원이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금융자유화로 인해 망신창이가 된 자본주의를 적절한 규제를 통해 바로 잡고 복지사회를 구현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경제민주화의 세상이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