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가보면 난관이란 늘 있게 마련이다. 어려서 가난을 지고 살아서인가? 웬만한 고생은 고생으로 알지를 않았다. 하지만 정말 지금 생각하면 그 고생이 참 지긋지긋했다. 그래도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어 행복했다고,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식자재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주)유진상사 한원찬(남·49) 대표의 이야기다.
1964년 경남 포항에서 청송으로 가는 길목인 시골마을에서 자라나면서부터 어려움이 시작이 되었다. 그 당시야 학교를 걸어서 다녔겠지만, 어린 나이에도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지를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늘 소먹이를 한 망태씩 해다 놓아야, 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고생"5남매인 저희들은 그 당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저 먹고 살기도 버거울 때니까요. 중학교 때는 거의 두 시간을 걸어서 학교를 다녀야 했죠. 제 깐에는 동생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등학교를 공고를 가려고 했지만, 선생님의 만류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갔습니다."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에 합격했지만, 바로 군에 입대를 해버렸다. 그리고 울산에 있는 세원산업이라는 꽤 괜찮은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월급만 갖고는 이미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켜 세울 수가 없어, 1986년에 수원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길고 힘든 남의 집 살이가 시작이 되었다.
"처음에 남의 집에 배달원으로 취직을 했는데, 일요일도 없이 일을 했어요. 월급을 135,000원을 책정을 했는데, 하도 부지런히 일을 하니 150,000원을 주시데요. 그것만 해도 저에게는 고마운 일이죠. 몇 년간 참 부지런히 일을 했어요. 지동 재래시장에서 생선가게에 취직을 했는데, 아무리 씻어도 냄새가 배어 어쩔 수가 없었죠."당시는 6촌 형님 댁에서 기거를 했는데, 단 칸 방이었다는 것이다. 미안하기는 해도 어쩔 수가 없이, 형님 내외와 조카들과 한 방을 사용했다고. 그런데 말이 없던 형수가 '삼촌에게서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고 하더라는 것. 그 뒤 형님 댁을 1년 만에 나와 여기저기 2년 동안 남의 집 살이를 해오다가, 그래도 당시는 부자 동네라는 우만동의 아파트촌에 슈퍼 종업원으로 취직했다.
쓰레기도 치워주어야 했던 시절
지난 7일, 오후 7시가 넘어서 수원시 팔달구 지동 475-20에 소재한 (주)유진상사 사무실에서 만난 한원찬 대표. 옛날 목욕탕을 그대로 개조해 만든 창고였다. 지하부터 3층까지 가득 쌓여있는 물건의 종류는 5천여 가지나 된다고 한다. 잠시 옛날 생각을 하는 듯 말을 멈춘다.
"그 당시 현대아파트라면 꽤 잘사는 곳이었어요. 수원시 부시장님의 관사도 그 아파트에 있었고요. 배달을 시켜서 물건을 갖다 주면, '총각 저 쓰레기 좀 갖다 치워져'라고 이야기들을 하죠. 수도 없이 그렇게 심부름을 해주었죠. 그렇다고 단골인데 싫다고 할 수도 없었고요"그렇게 어렵게 생활을 하다가 50만 원을 갖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도 결혼을 할 때 전셋돈으로 받은 돈을 갖고. 처음에는 차도 없어 남의 차를 빌려서 물건을 떼고, 그것을 팔고나서 차를 갖다 주기도 했단다. 그렇게 노력을 하다가보니 차츰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입북리 골짜기에 방을 하나 얻어 살았는데, 큰 길을 나오려면 한참이나 걸어야 합니다. 한 번은 아내가 아이를 업고 나왔는데 보니, 아이 얼굴에 파리가 까맣게 달라붙어 있는 거예요. 큰 아이에게는 지금도 마음에 빚이 있습니다. 어려서 너무 많은 고생을 시켜서요." 인생을 망쳐버린 IMF, 하지만 다시 일어나
"구멍가게를 하다가 한 번 망한 적이 있는데, 그래도 열심히 한 덕에 단골도 생기고 좀 살만하다 싶으니까 98년 IMF가 닥쳤죠. 당시 거래처 사장에게 가게수표를 빌려 준 것이 있는데, 이 사람이 은행에 돈을 넣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또 가진 것을 다 날리고 말았죠."앞이 캄캄했다. 지갑이며 신원을 알만한 것을 다 꺼내놓고, 영동고속도로를 밤새 걸었다. 그저 죽고만 싶었다고 한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오자 정신이 들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살자'고 다짐을 했다. 창피하기도 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를 않아 허기가 졌지만,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집사람이 저에게 하는 말이 '당신은 할 수 있어요.'라는 겁니다. 그 말에 정신이 들었죠. 그렇게 식자재 유통에 뛰어든 것이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살면서 저는 믿음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누구나 다 마음을 열고 인정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저 사업의 정신이기도 하고요"지금은 6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식자재의 모든 것을 도매한다. 아침 5시면 일어나 10시가 넘도록 일을 한다. 처음 거래를 시작한 거래처가 벌써 20년 가까이 된 지기가 되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다 보니,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 수원대학교에 들어가 사회복지를 택했다.
"이제는 조금은 사회에 환원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너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만 했지, 남을 위해서 쓰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지금 4학년인데, 이제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앞으로는 사회복지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적기업에 더 많은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지난 11월 2일에는 바르게살기 수원시협회장의 자격으로 대통령표창을 받기도 했다. 전 회원을 대표해 받았을 뿐, 자신의 공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소문도 내지 않았노라고.
"그동안 힘이 든 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함께 걸어 온 아내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한 달이라도 아내와 둘이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마음 편하게 다녀보지를 못했거든요. 둘만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것이죠."환하게 웃는 한원찬 대표에게서 우리는 그의 소탈함을 느낀다. 역전의 명수도 좋지만, 이제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역전이 없었으면 한단다. 대담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밤바람이 제법 차다. 벌써 계절이 이리 바뀌었나? 그리고 보면 참 세월이란 놈은 누구를 기다려주지를 않는가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경기인터넷신문과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