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은 반크 교회 이곳저곳을 본 다음 이스파한의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인 자메모스크로 향했다. 이곳 또한 그 규모나 역사성에서 이란을 대표하는 모스크다. 특히 이 모스크는 원래 사산조의 조로아스터교의 사원이었다. 그 후 셀주크 터키의 지배 하에서(12세기) 이슬람 모스크로 다시 건축된 것인데, 보존 상태가 극히 양호하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 이라크의 폭격으로 일부 파손된 곳이 있어 복구한 것 이외에는 한 모스크 안에서 셀주크 시대와 몽골시대 그리고 사파비 왕조의 모스크 양식을 전부 볼 수 있는 아주 보기 드문 모스크라 생각되었다.
이곳 안내는 이스파한의 전문 가이드가 담당하였는데 그의 세심한 설명이 내가 가지고 간 안내서보다 훨씬 알기 쉬웠다. 우선 이 모스크에 도착하여 정문을 들어가려 하니 쇠사슬이 걸려 있다. 셀주크 시절에 이 모스크에는 사람만이 들어가지 낙타 등 동물은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바로 이 쇠사슬은 낙타가 들어갈 수 없다는 표식이다.
몇 발자국 더 들어가 보니 모스크의 벽면은 오로지 진흙 스터코와 흙벽돌로만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안내자는 벽면을 가리키며 그것이 셀주크 방식과 사파비 양식의 큰 차이라고 일러 주었다. 사파비조의 모스크에는 수많은 컬러타일이 붙여졌지만 셀주크 시대에는 이런 타일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스크의 중심에 들어가자 한가운데 정방형의 표시가 있다. 이것은 조로아스터교 시절에 불이 타던 곳이라 한다. 우리는 발길을 옮겨 몽골(티무르 제국) 침입 후 만들어진 부분을 살펴보았다. 벽면의 스터코 부조가 있는데 안내자는 이것이 이 모스크의 보물이라 설명한다. 왜인고 하니 반질반질한 대리석 표면에 이런 진흙 스터코를 붙여 부조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옆방의 문을 여니 바로 이것이 겨울의 방이다. 이곳은 평상시에는 전혀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단번에 몽골의 냄새가 난다. 예배소 전체적인 모습이 몽골의 게르(천막집)를 닮았기 때문이다. 알라바스터라는 방법으로 자연채광을 하는데 정오 무렵 태양이 하늘 정중앙에 있을 때 천정의 대리석을 빛이 투과하여 바닥을 비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기후적으로 몹시 덥거나 추울 때 사용된 예배 공간이라고 한다.
예배실에 나와 모스크의 중앙을 돌아보니 커다란 검은 돌 하나가 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하다. 그렇다. 이것은 바로 메카에 있는 카바의 돌이다. 즉 전 세계의 이슬람 순례객들이 메카 순례를 할 때 만나게 되는 그 검은 돌말이다. 이곳이 작은 메카인 셈이다.
모스크는 삶의 공간, 소통의 공간
자메모스크를 나와 잠시 모스크를 둘러싸고 있는 바자르를 걸어 보았다. 안내자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바자르의 길이는 자그마치 5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페르시아의 모스크와 바자르의 사회적 기능을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아마도 단지 페르시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열사의 사막으로 이루어진 중동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모스크는 단순한 예배처가 아니다. 이곳은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자 소통의 공간이다. 지리적 특성상 유목민들이 많이 사는 이곳에는 사람들이 사는 공간마다 모스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니 필시 여러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에 그 지역의 공동 모스크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볼 수 있게 만든 것이 모스크의 최소한의 기능이다.
그러나 모스크가 예배처의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모스크는 주변에 형성되는 바자르와 함께 거대한 그늘 집의 역할을 한다. 열사의 사막에서 지친 나그네나 주민들은 예배를 드린다는 명분으로 모스크와 바자르에 모여들어 모처럼 만의 쉼을 얻고 필요한 물품을 산다.
또한 모스크와 바자르는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모처럼 만나 정보를 교환하는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예배를 마치고 쇼핑을 하면서 사람들은 세상의 소식을 이곳에서 듣게 된다. 그리고 삶의 유희도 맛보게 된다. 재수가 좋으면 왕과 함께 폴로 경기도 관람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메모스크를 다시 바라보았다.
모스크를 둘러싼 수많은 발코니가 보였다. 아마도 우리 일행이 4~5백 년 전에 이곳에 도착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수많은 무슬림들이 모스크의 발코니에 운집해 있으면서 큰 환호성을 지르고 있지나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메 모스크를 빠져나왔다.
20개의 기둥이 40개로 보인다
이스파한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는 체헬 소툰 궁전, 체헬 소툰이란 40개의 기둥이라는 뜻으로 궁전 내의 20개 기둥이 연못과 궁전의 천정에 있는 거울에 반사되어 40개로 보인다는 것에서 연유하였다. 여하튼 이 궁전은 규모에 있어서는 그리 크지 않다. 왕이 외국 등에서 온 귀한 손님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푸는 장소라고 여겨진다.
전면부의 20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홀에서 뒷방으로 연결된 문이 있다. 이것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4면에 대형 프레스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대개는 사파비 왕조가 외적과의 싸움에서 승리(샤 압바스가 오스만 튀르크(제국 : 터키)와 전투하는 장면)하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외국의 손님을 접대하는 그림(샤 이스마일이 인도의 왕 후마윤을 접대하는 장면)이다. 이들 그림은 소위 세밀화로서 대단히 높은 경지의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이스파한에서 점심을 먹고 테헤란으로 떠났다. 이란의 1번 국도다. 자그로스 산맥의 한가운데 분지는 좌우로 멀리 산맥의 산세를 읽을 수 있는 광대한 평원이다. 망망대해라고나 할까. 아마도 인간이 사는 사막으로서는 세계 최대가 아닌가 싶다.
10여 년 전 미국의 네바다주의 모하베 사막을 차로 몬 경험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미국이 참으로 넓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모하베 사막보다 몇 배나 넓은 이란 고원을 달린다. 멀리 자그로스 산맥의 만년설이 보인다. 비록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산이지만 그 산세와 붉게 물든 석양의 조화는 신비한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이렇게 400여 킬로미터를 달려 밤 9시가 넘어 테헤란에 도착하여 바로 한국대사관으로 직행했다. 이날 밤 김영목 대사는 우리 탐사단을 위해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이란의 문화 관계자도 초청하여 우리 탐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자리였다.
만찬 중 김병모 교수는 이번 탐사에서 지난 40여 년간 연구한 쌍어문의 이란 부분을 드디어 완성하였다고 감격스러운 연설을 하였다. 파사르가데에서 발견한 물고기 문양의 의미를 유창한 영어로 이란의 전문가들에게 설명하자 참석한 이들 모두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