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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0월 26일, 서울의 한 지인에게서 특이한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약사로 약국 일을 하시는 중년여성인데, '10․26'의 감회를 적은 내용이었다. 그는 김재규씨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궁정동의 안가에서 김재규씨가 '거사'를 벌이지 않았다면 그 후 수많은 국민들이 참혹하게 피를 흘리고 희생되었겠지만, 박정희씨는 필경 가다피 신세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로서는 일찍이 생각해보지 않은 얘기였다. 나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거사가 없었다면 국민들이 더욱 참담한 불행을 겪었을 것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거기에서 내 생각은 멈춘 상태였다. 그 후 박정희를 계승한 전두환의 출현과 광주학살 등을 떠올리면 내 생각은 도저히 진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10․26'을 지내면서 받은 그 여성 지인의 메일 내용에 나는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이 제시한 그 '가정'은 내게 참으로 미묘한 울림을 주었다.

박정희 '향수'의 본질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7월 10일 오전 대선출마 선언식이 열리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 밝은 표정으로 도착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이 7월 10일 오전 대선출마 선언식이 열리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광장에 밝은 표정으로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궁정동 안가의 술자리에서 '부마사태'의 실상을 보고받고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완화정책 건의를 묵살하고, 경호실장 차지철의 대학살까지 감행하는 탄압정책 의견을 수용했던 박정희. 그러나 오른팔 격이었던 부하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그 사실로 말미암아 오히려 많은 국민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오늘 우리 사회에 강고한 성채처럼 존재하고 있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의 저변에는 박정희의 그런 비극적인 죽음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수 국민들은 '부마사태'의 참혹한 실상도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승자 전두환이 저지른 광주학살도 실은 박정희가 뿌린 씨앗의 결과임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박정희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동정심을 가슴에 켜켜이 쌓아놓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오늘도 우리 사회에 창궐하고 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박근혜의 존립도 강고함을 지닌다. 외국의 언론들은 박정희를 지칭할 때 '독재자'라는 말을 달고, 박근혜에 대해서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지만, 대략 35%로 집계되는 박근혜의 고정적인 지지 기반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런 박근혜의 강고한 지지 기반은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한 영남인들과 50대 이상의 연령층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부활을 꿈꾸는 유신독재의 망령

최근 한 문학단체의 모임자리에서 시인이라는 명색을 내걸고 사는 사람과 재미있는(?) 격론을 벌인 적이 있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60대 초반인 그는 그 연령대의 보편적 기류에 따르기라도 하듯 열렬한 박근혜 지지자였다. 그가 박근혜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의 5․16쿠데타와 유신독재에 대해 '사과'를 했다는 것에 모아진다. 그는 박근혜의 사과를 '용단'이라고 표현했고, 그 용단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처음부터 사과를 한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5.16쿠데타와 유신독재를 옹호하며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 태도에서 역풍과 역효과를 감지하고 궁여지책으로 사과를 한 것인데도, 그 시인은 그 사과의 전후좌우를 고찰하지 않고 사과 자체에만 온 시선을 모을 뿐이었다. 그 사과의 진정성 여부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사과가 깊이 있는 역사의식의 산물이 아니라도 것도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박근혜가 아버지와는 다를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정치행적을 거울삼아 좋은 정치를 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박근혜가 아버지와 다를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일이다. 오늘의 박근혜가 40년 전의 아버지와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가능치도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박근혜의 언행에서는 알게 모르게 독선과 불통의 그림자가 너울거리곤 한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생리적 유전자와 유신 시절에 습득 받은 가치관이 어떤 사안에서는 심각한 양상으로 작용하거나 표발할 수도 있다.

그녀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집착하는 모습을 줄곧 견지해왔다. 우리 사회의 일부 계층에 팽배해 있는 '박정희 향수'에 고무되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이루려는 태도를 노골화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되려는 그녀의 야망 속에는 아버지의 부활을 현실화하려는 꿈이 내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당선은 박정희의 부활을 의미할 수밖에 없고 더불어 유신의 부활을 상징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녀의 당선은 아버지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5.16쿠데타까지 정당화시켜주는 일로 발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다.

정치적으로는 암흑이나 다름없었던 유신독재를 일부 사람들은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유신시대로부터 40년 가까이 흐르고 있는 오늘, 유신독재의 망령이 그런 식으로 되살아나려는 조짐은 35%로 추산되는 박근혜 고정표의 강고함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박근혜와 박정희 그리고 이명박 

박근혜 지지 세력의 강고함은 참으로 철저하다. 그들은 박근혜의 존재 자체가 유신독재의 유산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지지 이유다. 박근혜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철학은 매우 불투명하고, 민주적 정치역량이나 정치경험이 확실한 것도 아니건만 그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와 같을 수는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박정희의 테두리 안에서 생겨났고 존재하고 있다. 박정희 때문에 그녀의 존립이 가능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박정희가 뿌린 씨앗들이기도 한 추종세력이 그녀의 기반과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저 일제 때로부터 연유하는 수구 기득권층, 오랜 독재시절 내내 양지를 독점하며 독재의 관성 속에서 살아온 정치세력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박근혜를 현 대통령 이명박과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든다. 박근혜를 이명박과 분리해 놓으려는 의도적인 노력들이 상당 부분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명박을 혐오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박근혜의 본질은 이명박과 똑같은 부류다. 그들은 같은 물에서 지금까지 한 배를 타고 왔다. 과거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집안싸움을 한 적은 있지만, 동지적 관계와 동질성을 알게 모르게 수시로 확인하며 살아왔다. 그러므로 이명박의 실정과 악정들의 책임은 박근혜에게도 있다.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든 이명박의 패정을 알고 심판의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같은 물에서 논 박근혜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얘기들을 예의 그 시인에게 열렬히 설파했다. 열렬함 속에서도 나는 논리 정연함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인에게는 내 얘기보다 자신의 주관이 더 중요했다. 이미 강고해져 있는 그의 주관은 요지부동이었다.

저 유신의 주입식 이데올로기 교육으로 그의 사고방식은 이미 일방통행을 고수하고 있었고, 사통팔달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시인이었고, 그래서 시인이기도 했다. 고뇌할 줄 모르는 치장의 시인이랄까. 하여간 그 친구는 시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근혜#박정희#이명박#차지철#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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