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조산사 자격증을 취득해 영남대의료원 산부인과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스물일곱에 들어간 첫 직장이었으니 남들보다 사회생활이 다소 늦은 편이다. 늦게 시작한 만큼 열의도 컸다. 그러나 병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녹록하지 않았다. 밥 한 끼 먹을 시간, 화장실 한 번 제대로 다녀올 시간도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심지어 생리대 한 장 갈 수가 없어 양이 많은 날이면 어김없이 속옷은 피범벅이 되곤 했다. 그래도, 상상하던 미래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지금, 쉰 둘의 '해고노동자' 박문진 지도위원은 지난 10월 23일부터 서울 삼성동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집 앞에서 매일 3000배를 하고 있다. 쉰 둘에 이런 모습으로 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6년 전 4일간의 부분파업 대가로 해고돼 아직도 복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해고된 10명 중 7명은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박문진(보건의료노조 영남대의료원지부 지도위원), 김진경(영남대의료원지부 지부장), 송영숙(영남대의료원지부 부지부장) 이 세 여성노동자는 6년째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복직투쟁 중이다.
박문진 지도위원은 동터올 무렵 방석을 챙겨나와 해가 지면 3000배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3000배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돌부처도 돌아앉게 만드는 게 3000배다", "저렇게 살아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나중에 제대로 된 몸뚱이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2006년 사학법 재개정 날치기 통과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1970년대 설립된 영남대의료원은 건립 당시 한강 이남 사립대 병원 중 최고 규모와 설비를 자랑했다. 박근혜 후보는 1980년 당시 29세의 나이로 영남학원 이사장에 취임했으나 이내 학내민주화의 열기로 불명예 퇴진하고 만다. 이후 영남학원은 임시이사제, 총장직선제로 꽤 안정적으로 운영됐다.
사건은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2006년 사학법 재개정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며 시작된다. 이후 당시 교육부는 임시이사 파견대학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영남대는 재개정된 사학법의 '수혜'를 받아 임시이사제와 가장 먼저 결별한다. 그때부터 소위 '재단정상화'가 추진됐고, 결국 2009년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이사진 7명 중 4명의 추천권을 '설립자 유족' 자격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줬다. 그 자리는 모두 박근혜 후보의 측근들이 차지했다.
그 뒤로 영남학원 산하 부속기관(영남대의료원·영남대학교·영남이공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재단정상화로 기대했던 전입금은
오히려 더 축소됐다. 김기석 영남대 교수는 10월 30일 국회 토론회에서 "재단전입금의 법정부담금 부담률은 2010년 50%에서 2011년 16%로 줄었고, 2012년 12%, 2013~14년은 10% 내외로 전망한다"고 지적했다.
영남이공대 총장은 재단에 과잉충성하며 학교 이름을 '박정희대학교'로 변경하려고 했다. 집무실에는 박정희 사진을 걸어놓고 2012년 교양과목으로 '새마을 정신과 리더십'이라는 과목을 편성했다. 영남대는 박정희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연구소와 대학원을 설립했다. 1명의 학생을 제외하고 모두 외국인으로 구성돼 있다는 '박정희대학원'이 바로 그것인데, 이들은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새마을 운동 및 제3세계 개발 모델 연구'를 하고 있다.
함종호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부이사장은 지난 10월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주관한 영남학원 관련 국회 토론회에서 "연구소와 대학원 모두 경상북도, 대구시, 산림청 등에서 일정 예산을 지원하는데, 독재자의 경제모델을 맹종하고 학습하는 데 도민의 혈세가 투입되는 것이 옳은가"라고 반문했다.
6년 전 '흰 장갑'의 공포... "우리는 여전히 악몽 속에"
영남대의료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영남대의료원 사태는 2006년 영남대의료원 단체교섭 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최근 불법 노조파괴 행위로 인가가 취소된 창조컨설팅이 개입된 '작품'이다. 2006년 영남대의료원 교섭 당시 사측은 돌연 구조조정과 근로조건 저하로 이어지는 직제개편안 수용을 요구했고 노동조합은 "직원들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니 교섭 끝나고 다시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음 날 병원은 노조와의 합의를 무시하고 직제개편안을 일방적으로 시행했다. 이같은 사측의 행태에 반발하며 노동조합은 4일간의 합법적인 부분파업을 전개했으나 이후 대가는 가혹했다. 56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 청구, 조합비 통장 및 조합원 개인통장 가압류, CCTV 설치로 노조활동 감시, 10명의 해고자 포함 28명 대량 징계 및 두 번의 단체협약 일방해지를 자행한 것이다.
"당시 로비농성을 진행했는데 의사와 수간호사들로 꾸려진 구사대가 수시로 농성장을 침탈했어요. 여성 조합원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그 억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얻어맞아 병원에 입원한 이들도 많았죠. 심지어 2007년도에는 당시 임신 중이던 간부를 밀어 넘어트렸어요. 숨도 못 쉬고 태동도 고르지 않고, 혈압은 오르지 산모는 갑자기 경련증세까지 보이면서 구토까지…. 급히 응급실로 후송했는데,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요.""구사대는 보통 새벽에 오더라고요. 새벽이면 병원이 아주 어두워지는데, 여성들만 자고 있는 농성장에 몇십 명의 구사대가 살금살금 들어와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요. 어둠 속에서 마주친 흰 눈과 흰 장갑이 얼마나 공포스럽던지. 처음에는 말도 안 나오고 악몽도 거의 안 꿨는데 3년 동안 악몽에 가위에 시달려서 한동안 병원에 다니며 상담도 받았어요"- <오마이뉴스> 2011년 9월 박문진 지도위원·송영숙 부지부장 인터뷰 <"어둠 속에서 본 흰 장갑… 공포였어요"> 중 무력화된 노동조합... 중간관리자부터 '토사구팽'
'6년 전 그 날' 이후 현재 보건의료노조 영남대의료원지부의 조합원은 70여 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 2006년 파업 이후 2년 만에 8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탈퇴했다. 1000명 가까운 조합원들을 이끌어왔던 박문진 지도위원 이하 노조 간부들에겐 상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들의 심정이 이해돼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조합원과 비조합원간 극심한 차별과 조합원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조에 가입돼 있다는 이유로 승진을 못하고 한참 어린 후배가 자기 위로 치고 올라오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을 절망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노동조합의 힘이 무력화되자마자
2007년 단체협약에서 생리휴가가 폐지되고 그해부터 2010년까지 4년간 임금이 동결됐다. 임금은 2011년에야 3% 인상되는 데 그쳤다. 심지어 노조탄압, 조합원 탈퇴에 가장 앞장섰던 중간관리자들이 가장 먼저 구조조정 대상자로 올랐다. 해마다 물가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솟는데 임금과 근로조건은 제자리를 맴돌고 "병원이 살아야 직원이 산다"는 전형적인 직원들 쥐어짜기식 경영이 수반되고 있다.
'납득'이 안 되는 근로조건과 윗사람 눈에 '찍히면' 자기도 언젠가 '나가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상시적으로 조장돼 있는 곳이 바로 영남대의료원이다.
'간호사가 행복해야 국민이 행복하다'는 박근혜 후보
박근혜 후보는 지난 여름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대선 슬로건으로 '국민이 행복한 나라',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를 발표한 바 있다. 영남대의료원 해고 노동자들은 그 슬로건에서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가질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 나라는 가장 먼저 정리해고 걱정 없고 비정규직 없는 일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영남대의료원의 해고자 세 명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복직을 위해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을 복직시키는 것이 진짜 복지의 시작이자 선결조건이다.
"국민소득 2만불, 경제순위 11위라는 수치상의 성적은 우수하지만 여전히 밥줄 걱정하며 사는 사람이 천만 명이 넘는 나라. 우리나라가 진짜 근본부터 튼튼한 경제강국이 되려면 노동자들이 밥줄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소득창출과 건강한 분배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영남대의료원 해고자들은 말한다.
"얼마 전 박근혜 후보가 2012년 간호정책선포식에서 이런 말을 했더군요. '밤낮으로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간호인력을 적정수준으로 확충하겠다. 우리 국민이 아플 때 편안한 위로와 안정된 치료를 받기 위해선 국민 건강을 지키는 주체인 간호사부터 행복해야 한다'고요. 확실히 옳은 방향입니다.그러나 박근혜 후보는 되돌아봐야 합니다. 영남대의료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결코 행복하지도 않고, 만족하고 있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병원이 살아야 직원이 사는 게 아닙니다. 직원이 살아야 병원이 사는 거죠. 월급 몇 푼 받고 언제든지 맘 내키면 일 하는 사람들이 그만둬버리는 영남대의료원이 돼선 안 됩니다."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3000배... 보고 계시죠?
박근혜 후보는 바쁜 일정이지만 식사는 항상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 한다고 한다. 그때마다 집 앞에서 3000배를 올리고 있는 박문진 지도위원의 머리맡을 차를 타고 지나간다. 분명히 박근혜 후보는 박문진 지도위원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영남대의료원 해고자 문제 해결하라"고 외치는 송영숙 부지부장의 절규도 들었을 것이다. 벌써 23일째(11월 14일 기준)다. 그 사이 박문진 지도위원은 7만 번의 절을 올렸고 하루가 다르게 어깨와 무릎의 통증이 심해지고 있지만 올 겨울이 끝나기 전 복직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 진짜 목적이 뭐냐"고. 노동조합 간부, 노동운동가라는 직책을 이유 삼아 "박근혜 후보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려고", "잘만 돌아가고 있는 영남대의료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쏟아놓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들은 6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다, 서울의 곰팡이 핀 지하방에 방을 얻으면서까지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만 외쳤다.
외마디 비명 같은 호소였지만 메아리로조차 돌아오지 않았던 말. 더러는 억센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고, 더러는 이 작은 사람들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내팽개쳤다. 부당하게 해고됐고, 억울했던 6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영남대의료원도, 법도, 제도도 그 누구도 이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죽을 각오를 다해 "우리는 일터로 돌아가고 싶고, 진짜 책임자인 박근혜 후보를 만나 이야기 하고 싶다"고 말하기 위해 이 어마어마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님, 이제 6년간 놓고 있었던 저희들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불편하고 아파, 눈엣가시처럼 따가워 마주치지조차 않았던 저희의 눈을 다시 바라봐 주십시오. 6년 전 영남대의료원에서 일어난 일들이 여전히 저희에겐 상처이자 악몽이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이만큼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언젠가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었습니다.아물지 못하고 벌어지기만 했던 상처라 스치기만 해도 쓰라리지만 이제 그 상처와 직면할 수 있는 선택과 결단을 박근혜 후보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상처의 봉합과 화해의 시작은 같으며 그 시작에 저희와 박 후보님이 함께 서는 순간 영남대의료원의 새로운 역사가, 그리고 여성 정치인으로서 박근혜 후보님의 입지도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 <영남대의료원 노동자들이 박근혜 후보에게 드리는 글> 중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보건의료노조 선전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