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가 가까웠는데도 볕조차 들지 않는 국가인권위 빌딩 앞은 기자회견 현수막을 붙잡고 있던 손이 얼어 입김을 호호 불어야 할 정도로 추웠고, 바람은 칼바람처럼 매서웠다. 반면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노예제도'라는 이주인권·노동단체 활동가들의 목소리는 바람을 뚫고 또렷하고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13일 오전, 고용노동부의 '외국인 근로자 사업장 변경 지침' 철회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 진정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 모습이다.
이들은 지난 8월 1일부터 사용자에게만 구직자 명단을 제공하고, 사업장을 변경하려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구인사업장 명단을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주노동자의 직장선택의 자유, 계약의 자유, 노동권 등을 침해하는 한편 이주노동자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라고 판단하여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기자회견에서 민변 노동위원회의 윤지영 변호사는 "고용노동부 지침 변경이 결정된 후, 이주인권 관련 단체들의 거센 비판에 직면한 고용노동부가 고용센터의 알선기능을 보완하겠다고 했으나 컴퓨터 추천을 통한 알선에서는 구인 신청이 끝난 업체를 알선하는 등 이주노동자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면서 "국가인권위가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하는 사업장 변경지침에 대한 인권침해 결정과 함께 철회를 권고하여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한편 우다야 라이 민주노총 이주노조 비대위 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을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모는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노동허가제 등을 도입함으로써 이주노동자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법제도의 개선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며 정부와 국회가 관련 논의를 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피해 사례를 직접 언급하면서 "한국어에 서툰 이주노동자들은 보이스 피싱 전화가 걸려 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하였다가 낭패를 당하는 등 지침 시행 이후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지침 변경 이후 구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우리나라가 1978년 가입 비준하여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에 따라 유엔인종차별위원회는 협약체결국가들을 대상으로 협약 이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 위원회는 8월 31일자로 한국 내 이주민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우려를 표명하는 권고문을 발표하였다. 위원회는 특별히 고용허가제 하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차별, 착취, 저임금과 임금체불의 상황에 처해 있음에 대해 우려한다"고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구체적으로는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바꿀 기회를 제한당하고 있는 문제를 개선하도록 권고안을 한국 정부에 전달한 바 있다.
아픈 손목으로 일 못 하는데도 옮기는 건 안돼? |
이주인권단체들은 이명박 정부 들어 고용허가제가 '이주노동자는 사업장 변경을 절대 꿈꾸지 말고 사업주의 입맛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으로 개악을 거듭해 왔다고 주장한다. 과거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비판받던 산업연수제보다 더 악하다는 것이다. 왜 고용허가제가 노예제도와 다를 바 없고, 아니 오히려 더 악하다고 말을 하는 것일까.
필리핀인 T는 경기도 용인시 소재 **유통에 2011년 9월에 입사하여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T는 입사 이후부터 냉동창고에서 10-15킬로그램 무게의 생선 박스를 들고 와서 칼로 자르고 다듬는 일을 반복적으로 해 왔다. 그러던 중 입사 석 달 만에 손목통증으로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다. 최초 진료 이후 동 업체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점점 커지는 통증에 물리치료를 계속 받았지만 손목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좌측 완관절 인대손상 및 외상성 관절염으로 향후 손목에 무리가 되는 일이나 운동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면서 손목을 쓰지 않는 업체로의 이직을 권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근무처 변경을 요청한 T에게 사장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장은 "회사 사정이란 게 있는 거다. 근무처 변경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회사 사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사장은 "몸 아프다고 해서 회사 그만두게 해 주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럴 거 아니냐. 그러면 우리 같은 회사는 사람 못 쓴다"고 답을 했다.
T가 손목이 아파서 박스를 들지도 못하고, 아픈 사람을 데리고 있으면 효율도 없을 텐데, 왜 굳이 데리고 있어야 하는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쉬었다가 멸치포장 등 가볍게 왼손을 쓸 수 있는 일을 배정시키면 된다. 3년 계약이 끝날 때까지 청소라도 시키면서 일을 시키겠다"며 근무처 변경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뜻을 분명히 했다. 이 말은 'T는 내가 데리고 있는 노예야. 노예계약이 끝날 때까진 풀어줄 수 없어'라는 것과 똑같은 의미였다.
사장의 말대로 T는 현재까지 아픈 손목에도 불구하고 근무처를 변경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 직원들이 생선을 절단할 때 끼던 장갑을 빨고, 사내 청소를 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손목이 회복되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부어 오른 손목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해당업체가 T의 근무처 변경 사실을 임의로 조작하여 근무처 변경을 못하도록 심리적 압박까지 넣었다는 것이다. T는 입사 이후 한 번도 근무처 변경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상 이유로 해고되었다가 재입사했다고 사측이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했다는 사실이 고용센터 상담 과정에서 드러났다.
문제가 이러한 데도 용인고용센터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팔짱만 끼고 있다. 아니 T의 근무처 변경 의도를 불순하다고 지적하면서 근무처 변경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용인고용센터 담당자는 선심쓰듯 "손목이 아프면 일자리 구하기 힘들 텐데 그곳에서 치료받으면서 지내면 되죠"라는 말로 민원을 묵살해 버렸다.
통증이 원인이 되는 곳에서 계속 일을 하라는 고용노동부 직원이 있으니, 고용허가제에 대한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 30조에서 "상해 등으로 외국인근로자가 해당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계속 근무하기는 부적합하나 다른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의 근무는 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에서 허용하고 있는 사업장 변경마저 원천적으로막겠다는 고용센터의 초법적이고 월권적인 의도는 분명하다.
유엔인권이사국 선출을 자랑하는 2012년 대한민국 현실이 더없이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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