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새벽같이 수상시장으로 가는 미니밴에 올라탔다. 어제는 물갈이를 하는지, 방콕에 와서 갑자기 먹고 싶은 게 많아져 과식을 한 탓인지, 배탈 나고 설사 하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그래서 파타야에 하영, 상훈, 유진, 윤미가 함께 가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또 나운이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단다. 그래서 아내가 간호를 하다 병원에 다녀오기로 함으로써 또 두 명이 게스트하우스에 남았다.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아픈 아이들이 자꾸 생겨나고 있다. 아내와 나도 그랬다. 잘 여행하다가도 꼭 돌아올 때쯤 되면 아팠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놀다 와서는 왜 아프냐고 놀리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랬다. 그동안 여행의 피로가 쌓여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여행이 끝나가면서 긴장도 풀리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데에서 오는 부담 같은 것 때문인 듯싶다. 아무튼 나운이가 수상시장을 많이 보고 싶어 했는데 그것이 못내 아쉽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수상시장은 그야말로 물 반에 고기 반, 아니 현지인 반에 여행자 반이었다. 그만큼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아 정신없이 복작거렸다.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수상시장 방문을 고대해왔다. 그들은 시장 초입에서부터 들뜬 목소리를 드러낸다.
"와아~! 똑같다, TV에서 보던 거랑!""TV에서?""네! TV에서 보고 진짜 신기해서 꼭 와보고 싶었거든요!""뭐가 신기해?""쩌거! 배에서 과일도 팔고 생선도 팔고!"그래서 여행이란 여행자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찾아가는 것이다. 아이들이 수상시장을 좋아하는 것도 배를 탄 채 물건을 팔고 사는, 우리에게는 없는 문화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은 곧 모둠별로 헤어졌다. 나는 나운이가 빠진 윤미네 모둠과 함께 다니기로 했다. 수상시장은 여러 겹으로 얽힌 수로를 따라 열대의 과일과 해산물을 가득 실은 배들이 빽빽이 떠다녔다. 그 사이사이에 야채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배들이 끼어들었고, 가끔은 국수나 볶음밥을 싣고 다니면서 장사꾼들의 한 끼 식사를 해결해주는 배도 보였다.
또 수로의 양쪽으로는 역시 열대과일과 해산물과 야채를 쌓아둔 가게와 다양한 색상의 옷이나 장신구들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상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곳에서 여행자들은 때로는 관광객용 배를 타고 때로는 수로에 걸쳐진 다리를 넘나들면서 수상시장이 뿜어내는 들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독특하면서도 화려한 색상과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대로의 전통적인 수상시장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관광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그런 시장도 아니었다. 현지인들의 경제활동과 관광객들의 문화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묘한 균형감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삶의 공간과 관광의 공간이 공존하는 형국이었다.
우리는 시장의 끝머리에서 돌아서지 않고 수로를 따라 더 걸어나갔다. 길은 수로를 따라 한 쪽으로 벽돌과 시멘트를 쌓아 만들어 사람이 딱 한 명만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소로였다. 길모퉁이에서 두 번을 더 꺾어 돌았더니 갑자기 수상시장 풍경이 사라지고 수로 양쪽으로 가정집들이 나타났다.
예쁜 화분들이 가꾸어져 있고, 빨래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집 창문 안에서는 팬 선풍기가 돌고 TV에서는 이 나라 가수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내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던 승현이는 이 평범한 풍경들이 오히려 신기한지 그 특유의 구렁이 어법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다.
"삼촌 있잖아요, 이거 진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게요, 저기 시장하고 조금밖에 안 떨어졌잖아요. 그런데도 진짜 완전 다른 집들이잖아요. 화분도 있고 안에 사람도 살고 있고요. 이거 신기하지 않아요?"
그래, 신기하다. 항상 삶의 이면은 신기한 법이다. 삶이란 흔히 눈에 보이고 잘 드러난 부분 그 이면에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평소와 다른 얼굴이라 낯설 것 같지만 때로는 더 친숙해서 오히려 신기한 것이 삶의 이면이다.
나의 경험상 여행에서는 이러한 삶의 이면과 마주하는 기회를 더 자주 갖게 되는데, 이는 여행이란 것 자체가 삶의 이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삶이 여행의 이면이거나. 아무튼 나는 나이가 들수록 삶이든 여행길이든 수상시장 그 너머 혹은 도시의 번화가 뒤편 골목길 같은 삶의 이면의 공간을 찾아가는 것이 즐겁다.
그곳 수상시장 너머 수상가옥에서 승현이와 내가 무엇보다 신기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집집마다 작은 자가용 배가 있었는데, 좁은 수로의 교통 흐름을 막지 않기 위해 공중으로 매달아 올릴 수 있는 주차시설을 다 갖추었다는 점이다. 아니, 주배(?)시설이라고 해야 하나? 여행을 하면서 즐거운 순간 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다. 그곳의 독특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형성된 사람들의 문화를 이렇듯 작고 일상적인 것에서 발견할 때면 내가 인류학자라도 된 것처럼 흐뭇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느낀다.
그렇게 수상가옥이 있는 삶의 공간을 둘러본 후 다시 수상시장에 돌아와서 열대과일을 샀다. 다른 모둠 아이들은 배를 타고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과일도 사고 한 모양이었다. 몇 명은 과일 말고도 손에 향, 인형, 티셔츠 등 여러 품목들이 들려 있다.
"삼촌, 저 스카프 샀어요. 할머니 드릴 거예요.""색이 예쁘네. 구경은?" "아! 배 탔거든요, 그런데 장사하는 분들이 여기저기서 작대기로 끌어당겨서 좀 짜증났어요. 뭐, 그래도 재밌었어요. 스카프 할머니가 좋아하시겠다, 그죠 삼촌?"뭔들 좋아하지 않으실까. 강아지 같은 손자 손녀들이 먼 타국으로의 여행을 무사하고 건강하게 다녀온 것만도 기특할 텐데, 그들이 사온 선물이라면 말해 뭣할까.
수상시장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또 쇼핑을 했다. 며칠 전부터 가족과 친구들 선물을 사 모으더니만 그래도 아직 쇼핑할 것이 남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덩달아서 우리 부부도 뭔가를 쇼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카오산로드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보지만, 마땅한 것이 없다.
사실 우리 부부는 쇼핑을 잘 못한다. 돈도 넉넉지 않지만, 우선 취미가 없어서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뭘 사다줄지 그것이 곤욕이다. 주는 사람은 한 명이어도 받는 사람은 여러 명이라 각각의 취향에 맞출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물은 정성이라는 생각으로 내 나름으로만 사갔다가 자칫 욕만 듣는 것은 아닐지 늘 고민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 부부는 그 나라의 특징이 있는 저렴한 물건 한 가지를 여러 개 사고 만다. 이번 여행에서 쇼핑에 서툰 우리 부부에게 선택을 받은 것은 '말린 망고'다.
이제 정말 마지막 밤이 왔다. 내일이면 인천국제공항을 향해 비행기에 오를 것이다. 아이들 말대로 아직은 언제까지고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날이 왔다. 27박 28일 여행 중에서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밤이 오늘이다. 그 마지막 밤을 아이들과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아내와 나는 마지막 만찬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태국의 제대로 된 전통 음식점을 찾아보려고 했다. 아이들이 이곳 음식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고 또 그것이 여행의 의미도 더해줄 것 같았다. 그런데 전날에 다른 일로 여행사에서 들렀다가 그곳에 놓인 광고 리플릿을 보고 그만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방콕에서 제일 높은 빌딩 바이욕스카이호텔(Baiyoke Sky Hotel). 그 스카이라운지에서 인터내셔널 푸드(International Food)!
자그마치 83층이었다. 그곳 72층에서 식사를 한다고 했다. 여행에서 보통 어느 도시에 도착하면 아내와 내가 꼭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루 동안 도시의 골목 이곳저곳을 목적 없이 그냥 걸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들은 방콕에서 두 번째 것을 못해보았다. 더구나 메트로폴리탄의 야경이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들의 여행학교 마지막 만찬은 방콕에서 제일 높은 곳에서 가지게 되었다. 뷔페 음식은 깔끔하고 풍성했고 크고 넓은 창밖으로 보이는 방콕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세 번에서 네 번, 혹은 여섯 번까지 떠다먹고서야 가득 부른 배를 부여잡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식사 후에는 83층 회전 전망대에 올라 고공의 방콕 공기를 마셨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퍼펙트'한 마무리야."
돌아보니 상훈이였다. 도솔이는 화려한 마무리에 야경이 대박이라고 했다. 영준이는 한 달만 더 놀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호는 여행이 끝나는 것이 슬프다고 했고, 유진이는 "저 지금 많이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또 수경이와 승현이는 '삼촌과 이모'에게 감사하다고 표현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을 방콕의 밤하늘에 풀어놓았다. 나도 한 마디 했다, 마음속으로.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시내버스를 타고 방콕의 밤거리를 달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 복잡하다. 이제 그들도 일상으로의 복귀를 생각하는 모양이다.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