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너무했다. 내비게이션도 잘 모르는 훈련장을 찾아오라고 하다니. 예비군 동대에 전화를 해서 물었더니, 상근 예비역의 답변은 더 놀라웠다.
"병무청 홈페이지에서 아마 확인하시면 될 거예요." "저기요. 이미 찾아봤고 다른 괜찮은 방법이 있나 해서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습니다."그랬더니 갑자기 말이 없다. 얼마 후 전화를 건네받은 다른 사람이 대답한다.
"우선 수원역까지 지하철로 가세요. 거기서 버스로 환승해서 약 20분 정도 가면 비봉 정류장이 나올 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훈련장까지 약 1.5km니 걸어가시는 건 어려울 거예요. 택시를 부르거나 카풀을 이용하셔야 합니다."지난 19일 아침 오전 8시 50분 입소에 맞춰 내가 사는 경기도 안양에서 수원역까지 지하철로 이동했고, 이후 버스로 환승한 뒤 콜택시를 불러 훈련장까지 타고 들어갔다. 집에서 훈련장까지 걸린 시간은 1시간 40분, 교통비는 8000원이 나왔다.
아무튼 어려움은 있었지만 훈련은 시작됐다. 그런데 왜 군복만 입으면 춥고 졸리고 배고픈 것일까. 매서운 날씨인데도 다들 훈련 시작과 동시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선배님, 지금 주무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셔야 합니다. 지금 부사단장님이 예비군 훈련 점검하신다고 훈련장에 급습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비군 교관들은 '후방'이 털렸다고 갑자기 부산스럽다. 야외 훈련 내내 안보이던 대대장은 어느새 '높으신 분' 옆에 차렷 자세로 서 있다.
"후배야. 저런 모습 보면 어떤 생각 들어? 나는 왜 이렇게 슬프지. 아까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가. 만날 군대 바뀐다 하면서 어떻게 더 나빠지기만 하는지. 눈에 보이는 것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 저기 그대로잖아. 그래서 나는 안 일어 날란다. 혹시라도 부사단장님 오면 왜 변한 게 없냐고 '건방지게' 한 번 따져 보려고." 하지만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등병을 외면할 수 없었다. 높으신 분이 왔으니 방탄 헬멧과 군복까지 고쳐 입고 추위에 달달 떨며 그를 기다렸다.
이어진 안보 교육 시간, 전방의 모 부대 사단장 출신이라는 나이 지긋한 신사분이 강연자로 왔다.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떨던 역전의 예비군들은 이내 잠에 빠진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떠졌다. 기가 막힌 내용이 들려왔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설마 했는데 정말로 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종북주의자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들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의심이 필요해요. 예비군 여러분의 관심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종북주의자를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릴 게요. 주변에서 '유신'에 과격하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인다, 철저하게 '종북세력'으로 의심하세요. 우리 주변부터 경계를 강화해야 종북주의자들을 뿌리 뽑을 수 있어요." 후방에서 '경계'와 '감시'를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두 시간의 강연 동안 강연자는 지난 10월 전방에서 있었던 '노크 귀순'에 대해선 한 마디 하지 않았다는 사실. 도대체 우리가 강조하고 관심 가져야 할 경계 방향이 어디인지 묻고 싶었다.
새벽이 되었다. 야간 경계근무 투입. 그런데 머리가 가렵다. 종일토록 방탄헬멧을 쓰고 있던 탓도 있지만, 지난 밤 영하의 날씨에서 찬물로 샤워하고 머리 감을 용기를 감히 내지 못한 이유가 컸다. 그러니 군복만 입혀 놓으면 거지 꼴 된다는 말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머리를 긁적이는 내 모습이 측은했는지, 함께 근무를 서던 현역 김 상병이 말한다.
"선배님, 진짜 너무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해가 갑니다. 왜 예비군들이 훈련 들어오면 대충 하는지. 전혀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안 생길 것 같아요. 밥이며 시설, 보여주기식 사열, 안 보이면 대충 넘기려는 생각까지."이 이야기를 끝으로 김상병과 나는 근무 시간 동안 푹 잤다. 후방을 철저하게 감시해 줄 이등병의 매서운 눈초리만 믿었을 뿐이다. 물론 이등병 역시 선배들이 잠들고 나서 바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2박 3일의 동원훈련, 무사히 잘 마쳤다. 그런데 이 씁쓸한 뒷맛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개운치 않다. 그래서 과한 욕심 하나 고백하면, 내년 훈련엔 좀 달라진 모습을 보고 싶다. 이것이 과연 나만의 바람일까. "선배님, 진짜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던 현역 후배의 말이 떠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