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칠순 넘은 시인의 독설이 거침없다. '늙고 외로워지면 보수화된다'는 통념을 몸소 실천하며 일깨워 주기로 작심한 듯하다. 자기 몸 하나도, 생각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서슬 퍼런 1970년대.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가 운영체제의 기반이던 박정희 유신 독재시절에 저항 시로 맞섰던 그가 유치한 언행을 일삼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다.
김지하 시인이 4일 <조선일보>에 쓴 '한류-르네상스 가로막는 '쑥부쟁이''란 제목의 칼럼을 보면 한때나마 그의 시 '오적'을 읊조리며 저항정신을 흠모했던 한 사람으로써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김지하가 <조선일보> 통해 쏟아낸 궤변 김지하 시인은 칼럼을 통해 "못된 쑥부쟁이가 한류-르네상스를 가로막고 있다"면서 못된 쑥부쟁이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실명 비판했다. 열가지 이유를 들어 백 교수를 '사기꾼', '깡통 빨갱이' 등으로 비유하면서 인신공격성 독설을 퍼부었다.
특히 고 리영희 선생을 깡통 저널리스트라고 표현한 대목은 압권이다.
"그(백낙청 교수)의 사상적 스승이라는 '리영희'는 과연 사상가인가? 깡통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리영희를 앞세워 좌파 신문에서 얄팍한 담론으로 사기행각을 일삼았다." 1991년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랐을 때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에 기고했다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직과 회원자격 정지 결정을 당한 김지하 시인이 떠오르게 하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보수신문을 통해 후안무치의 궤변을 쏟아냈다. 그동안 그가 이곳저곳을 돌며 열변을 토했던 '사상과 정치의 대변혁 필요성'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모습이다. 대선을 앞두고 왜 그는 무절제한 독설로 세간의 주목을 끌려는 것일까.
그는 실천적 비평과 민족문학 운동을 일관되게 펼쳐온 백 교수를 향해 뜬금없이 "북한 깡통들의 '신파조'를 제일로 떠받들고 있다"는 둥, "전혀 무식하다"는 둥, 심지어 그의 평론 행위 대해 "그것은 공연한 '시비'에 불과하다"고 멸시하기까지 했다.
그는 고인이 된 박경리 소설가의 작품평까지 언급하면서 백 교수의 문학평을 "너절하고 더러운 방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했다. 참으로 민망하고 듣기 거북한 궤변이다. 더욱이 이 같은 상식밖의 그의 행보가 최근 대선을 앞두고 자주 목격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활동한 그가 지난달 26일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혀 충격을 주었다. 범시민사회단체연합이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한 그는 "이제 여자가 세상일 하는 시대가 왔고 나는 여성들의 현실통어 능력을 인정한다"며 "여자에게 현실적인 일을 맡기고 남자는 이를 도와야 하는 때가 왔다"고 작심한 듯 말했다.
그가 이날 지지하며 추켜세운 박근혜 후보는 한때 그를 감옥에 투옥시킨 독자재의 딸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새누리당이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다음날 브리핑에서 "박 후보가 (김지하 시인의) 진솔한 말씀에 감동을 느꼈다"며 "진심으로 고마운 일"이라고 반긴 대목 또한 가관이다.
유신독재 저항시인의 '독재자의 딸' 지지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김지하'라는 사람이 '박정희의 딸'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험악한 시대를 만들어 그의 육신을 영어에 가두며 심신을 고문했던 세력의 품으로 돌아간 까닭을 알 수 없다.
엄혹한 독재시절, 그의 시를 몰래 읽고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 투쟁의 의지를 불태웠다. 한때 그의 생명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이 민주화운동의 정신적·사상적 기반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자괴감마저 느껴진다. "부끄러울 줄 알아야 큰일을 할 수 있다"던 그의 말이 더 없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늘 깨어 있던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을 포함해 진보적 지식인 백낙청을 '깡통'으로 표현하고, 야권 단일화를 빗대 '개수작'이라고 표현한 부분에는 노망기가 가득 묻어난다. 그리고도 그는 민청학련 사건과 오적 필화 사건으로 7년간 수감생활을 한 지난 세월의 명예회복을 위해 38년 만에 법정에 섰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원범)는 지난 3일 대통령긴급조치제1호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김씨에 대한 재심 결심공판을 진행했다.
이날 법정에 출석한 김 시인은 "세월이 흐르는 바 역사의 변경 과정에 따라 판결해야 하는데도 항구적인 판결로 고정시켰다"며 "세월이 갈수록 타당한 법적 판결이라고 느껴지지 않으니 다시 판단해 달라"고 주장했다. 그의 변호인은 "당시 김씨는 개개의 정부를 타도하려 했을 뿐 기본 정치체계를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며 "국가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을 뿐 반국가 단체를 조직한 바도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그는 1970년 <사상계>에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시 '오적'을 게재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100일간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구속돼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이후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10개월 만에 풀려난 그는 유신독재의 진상을 알리는 글을 쓰고 재수감 돼 6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그토록 모질고 힘들게 했던 유신독재자의 딸을 이 나라 대통령감으로 지지하고 나서는가 하면 보수신문 <조선일보>에 기고글을 통해 진보적 지식인을 노골적으로 비난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변절의 굿판, 걷어 치워라 유신시대 지하의 영웅이었던 그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그가, 저항적 문인이었던 그가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는 뭘까. 변절일까? 오판일까? 대선을 앞두고 온갖 추악한 변절이 판을 치고 있지만 '저항 시인 김지하' 만큼은 변절이 아닌 오판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조선일보>에 쓴 칼럼에서 김 시인은 "이번 선거의 개 똥구멍 같은 온갖 개수작들이 역설적으로, 과거가 끝났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려는 과거는 어느 누구의 과거를 얘기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더 이상 기억하기 싫은 오욕의 과거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선거가 아무리 '개 똥구멍' 같다고 할지라도 그건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할 일이다. 제발 변절의 굿판이라면 걷어 치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