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아침 일찍 일행은 막고굴로 향했다. 안내는 그곳 돈황연구원의 전문 해설사 영가화씨가 맡았다. 북경외국어대학을 나온 재원으로 한국어가 유창하였다. 한국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대학 시절 한국 친구를 만나 2년 정도 한국말을 배운 뒤 스스로 독학을 하였다고 하는데 놀랍기만 하다. 나는 그녀를 2시간 동안 졸졸 쫓아다니며 질문 공세를 펼쳐 나갔다.
우선 막고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예비지식이 필요하다. 돈황과 막고굴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막고굴 없는 현재의 돈황은 존재할 수 없다. 돈황이 현재와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막고굴이 있기 때문이다.
막고굴은 벽화예술의 정점이자 실크로드 석굴예술의 집합소이다. 중국 내 석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그 보존 상태도 상대적으로 좋다. 492개의 석굴이 현존하며 채색된 조소상이 2400점, 벽화의 면적은 4500평방미터(㎡)가 넘는다. 막고굴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막고굴의 상태가 현재와 같이 그래도 잘 보존된 것은 돈황 사람들이 대부분 불교 신자이기 때문이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많은 전란 속에서도 이곳을 지켜냈고 특히 현대 중국의 아픔인 문화혁명기에도 이곳을 파괴하지 않았다. 다만 꼭 알아야 할 것은 돈황 예술의 약탈사다. 20세기 초 중국이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에 있을 때 서구열강의 문화재 약탈자들에 의해 돈황의 보물들 상당수가 국외로 반출된 것이다.
천하의 매국노 왕원록? 이런 사정 있었네
이 약탈사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되는 석굴이 17호굴인데, 이 굴은 1900년 당시 돈황석굴을 관리하고 있었던 왕원록이라는 도사에 의해 발견되고 거기에서 불교 경전과 각종 회화류가 쏟아져 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고고학자 마크 스타인은 왕원록을 찾아와 헐값에 수많은 경서류를 낙타에 싣고 가버린다. 이것들은 지금 런던의 대영(영국)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이어 당시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동방학자 펠리오가 찾아와 또다시 왕원록을 꼬여 헐값에 남은 경서류를 낙타에 싣고 간다.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되어 있다. 이 보물들은 지금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오타니 백작도 행운의 막차를 탄다. 그는 이곳을 찾아와 남은 보물을 쓸어 갔다. 이것들은 지금 동경국립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일부는 한국의 중앙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왕원록이라는 자는 천하의 매국노인 셈이다. 그런데 현지 해설사의 설명은 그게 아니었다. 왕원록은 그 당시 막고굴을 관리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는 것이다. 서방의 동방학자들에게 돈을 주고 보물을 판 것도 관리비를 대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 17호굴에서 나온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도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의 사후 공덕비가 막고굴 입구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국내의 어떤 관광안내서는 왕원록이 문화재를 팔아버린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제대로 사실관계를 알고 썼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막고굴의 예술적 성격과 그 내용을 적절히 설명하고 싶지만 그것은 내 능력을 넘는 것이다. 전문적 경지의 해설은, 이미 많은 서적들이 나와 있는 상태니 그것들을 참고할 일이다.
아마추어 여행가들 중에도 이곳 석굴을 면밀히 답사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긴 분들이 있다. 최영도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그분은 <앙코르 티베트 돈황>(창작과 비평사 펴냄)이라는 책에서 막고굴의 여러 석굴을 주요 전문서적을 참고하며 자세히 묘사하고 고미술사적 관점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막고굴의 여러 석굴을 전문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여행 중에 알게 된 몇 가지 사항만 기록하려고 한다.
17호굴, 돈황 약탈사의 대명사이자 세계적 명소로 만든 주인공우선 17호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17호굴은 위에서 본대로 돈황 약탈사의 대명사가 된 석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돈황을 세계적 명소로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서구인들은 만일 20세기 초반에 스타인 등 동방학자들이 막고굴 17호굴에서 발견된 불교경전 등을 서구로 가지고 가 그것을 세계에 알리지 않았다면 혼미 속에 있던 중국이 과연 그들 보물을 지켜낼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아주 틀리지는 않는 말이다.
지금 막고굴에 가보면 많은 석굴이 연기에 그을려 훼손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920년대 러시아 혁명 직후 백러시아인들이 이곳에 몰려 왔을 때 돈황의 책임자가 이들을 막고굴에 연금시켰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러시아인들이 막고굴에 갇혀 있을 때 그곳에서 밥을 해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20세기 초 중국 정부의 문화재 관리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석굴에 들어가 불을 때도 이를 막기는커녕 방치한 실정이었으니 말이다.
여하튼 17호굴은 왕원록 도사가 16호굴 입구에 쌓인 모래를 치우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굴이다. 16호굴을 들어가 오른쪽을 보면 마치 16호굴의 쪽방처럼 파인 조그만 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17호굴이다.
굴 중앙에는 당나라 고승 홍변의 소상이 있는데, 해설사는 홍변스님이 바로 16호굴의 공양주이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17호굴을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홍변스님 뒷벽에 있는 벽화이다. 거기에는 매우 세련된 현대식 핸드백이 나무에 걸려 있다. 천 수백 년 전의 가방 디자인이 현대 여성의 핸드백과 비교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바로 이곳 17호굴에서 수만 점의 고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불교경전을 물론이요 황제의 칙령, 마니교의 기도문집, 고대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 경전 등등 온갖 것이 나왔다. 그래서 이곳을 장경동이라고 한다(우리나라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기억하라). 17호굴의 이런 특별한 역사를 기리기 위해 굴 앞에는 장경동진열관이 따로 설치되어 위에서 본 약탈의 역사와 그곳에서 발견된 주요 보물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막고굴의 주요 관람 포인트는? 벽화미술의 백미
다음으로 막고굴의 주요 관람 포인트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곳은 석굴 중 벽화미술의 백미라고 할 수 있으니 여기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2400여 점의 채색 소조상도 놓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벽화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제일 많은 것이 소위 경변벽화라는 것으로 불교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인데, 현재 97폭의 경변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다음은 불교역사벽화로 이것은 불교 역사인물, 민간전설 혹은 불교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40여 곳에서 그런 그림을 볼 수 있다. 나아가 다양한 생활사를 볼 수 있는 벽화도 있는데 고대건축, 결혼, 제사, 사회풍속을 알 수 있는 그림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우리 한반도와 관련된 작품을 살펴보는 것이다. 한반도와 관련 있는 석굴은 위에서 이야기한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17호굴이 대표적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석굴은 아무래도 61호굴이라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오대산도가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도는 북위 때부터 불교의 성지가 된 산서성의 오대산을 그린 폭 13.45미터, 높이 3.42미터의 큰 벽화이다. 이 벽화 속에 신라승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혜초 스님의 입적 장소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이야기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이러한 굴의 내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설사에게 특별히 이 굴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불발로 그쳤다. 해설사도 노력하여 그 굴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으나 마침 그 굴에서 벽화 복원을 위한 모사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도저히 일반 공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반도와 관계가 있는 또 다른 굴로는 237굴의 '유마힐경변'이라는 벽화인데 이곳에는 조우관을 쓴 신라왕자가 있다. 이번 관람에서는 61굴과 마찬가지로 이 굴 또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물론 더 아쉬운 것은 해설을 들어가며 찬찬히 본 석굴마저도 엄격한 통제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점이다.
실크로드에 서서 석굴암을 감격스럽게 극찬하다
이외에도 석굴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비천상(248호굴, 320굴, 329굴)이나 수렵도(249굴)는 고구려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아가 석굴을 개괄적으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석굴암이 바로 중국의 석굴문화에서 온 것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우리의 지질학적 구조가 중국과 달라 대규모의 석굴을 조성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지만 신라인들이 그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석굴암을 조성한 것은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석굴사원을 한반도에 옮겨 보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석굴암은 비록 규모에 있어서는 막고굴과 같이 실크로드상의 석굴과는 비교될 수 없지만 그 예술적 가치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훨씬 능가한다. 석굴암의 예술성을 놓고 불교예술의 정점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단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석굴암을 그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토함산은 사암이 아닌 토산이다. 이런 곳에 어떻게 석굴을 만들 수 있었을까. 신라인들은 토함산 한 면에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공석실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돌과 흙을 쌓아 올려 마치 토산에 석굴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 공력은 돈황 막고굴에서 만나는 어떤 석굴과도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실크로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압도적인 조각 작품을 넣었다. 본존불을 보라! 그 뒤의 십일면관음상을 보라! 이것이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이 말은 그냥 립서비스가 아니다. 이 말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실크로드를 꼭 여행하시라. 그리고 곧바로 석굴암으로 직행하시라. 그러면 내가 왜 이리도 감격스럽게 석굴암을 극찬하는지 단번에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