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바람이 거세면 내일 산행은 어렵지 않을까?""정말 그렇구먼, 팔영산 여덟 봉우리는 모두 깎아지른 바위절벽이라는데"지난 11월 26일 방장산 등산을 마치고 고흥으로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일행들이 다음날 산행에 대해 지레 걱정이다. 방장산은 바위봉우리가 거의 없는 육산이어서 거센 바람에도 별로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11월 27일 오를 팔영산은 험한 바위봉우리들로 이뤄져 있다는 정보를 갖고 왔기 때문이다.
고흥으로 가는 길, 보성읍 시장에 잠깐 들러 찌갯거리를 조금 샀다. 애주가인 일행 두 사람은 소주 몇 병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나라 본토의 최남단 지역인 고흥반도의 끝자락에 있는 팔영산 휴양림 생활관에 도착했을 때는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우와! 이 정도면 이거, 황제밥상 아닌가?"푸짐한 밥상에 마주 앉은 일행들이 탄성을 지른다.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고,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간 밑반찬과 곁들인 저녁상이 정말 진수성찬이었다. 남자들만의 저녁과 아침, 두 끼 식사를 염려한 아내들의 곰살궂은 정성이 깃들어 있는 밥상이었다.
남자 넷이 차린 황제밥상 그리고 남도의 밤소주 몇 잔씩을 함께 기울이며 밥상머리 방담이 무르익었다. 낮에 오른 방장산 산행이야기와 시답잖은 세상살이 이야기, 그리고 다가오는 대선과 대선후보들을 안주삼아 떠들썩하게 이야기꽃을 피운 저녁식사는 모두를 만족한 포만감에 빠져들게 했다.
방장산 산행과 장거리 운전, 그리고 저녁식사 반주로 마신 소주 몇 잔씩에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일행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곯아떨어진 일행들의 숨소리가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창문을 뒤흔드는 거센 바람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자극한다. 휴양림으로 올 때 산자락을 돌며 승용차 안에서 바라본 바위봉우리들의 위용, 내일 바위산 여덟 봉우리를 우리 일행들 네 명이 모두 무사히 오를 수 있을까.
"어이! 빨리들 일어나, 아침이야 아침!"밤늦게까지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바람소리가 잠잠해진 후에야 깜박 잠이 들었는데, 큰 소리로 깨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역시 초저녁잠이 많아 맨 먼저 잠에 곯아 떨어졌던 일행이 가장 먼저 일어나, 새벽잠 꿈속을 헤매고 있는 우리들의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서둘러 아침을 챙겨먹고 산행 준비에 나섰다. 다행히 밤사이 거센 바람은 잠잠해져 있었다. 산행은 제1봉부터 여덟 개 바위봉우리와 정상인 깃대봉을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잡았다. 바깥으로 나서자 바람결이 싸늘하다. 우리나라 본토의 최남단에 해당하는 지역이지만 동장군의 차가운 입김은 피할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제1봉인 유영봉으로 오르는 길가에 작고 새하얀 꽃한송이가 외롭게 피어나, 낙엽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왠지 처연해 보인다,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 능선에 오르자 제1봉인 유영봉이 저만큼에서 우리들에게 손짓한다. 역사 깊은 고찰 능가사를 그냥 지나치는 것이 많이 아쉬웠지만 두 눈 딱 감고 일단 유영봉에 올랐다.
남도 풍광에 취하고 위협적인 산세에 놀라고"우와~ 저 바다 좀 봐? 저 수많은 섬들, 전망이 쥑인다 쥑여!"바위봉우리에서 둘러보는 전망을 어떻게 글이나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면서도 감동이 없고, 감탄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모두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할 줄 아는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바위봉우리들은 미리 예상했던 것처럼 오르내리기가 만만치 않았다. 제1봉에서 내려와 제2봉인 성주봉 급경사 철제 사다리를 오른 일행 두 사람이 엉거주춤 망설이는 표정이다. 올라갈 봉우리 위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일행 두 사람은 도저히 오를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 같았다. 바위봉우리를 오르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바위 절벽에 설치해놓은 철제 구조물과 쇠줄을 붙잡고 오를 수는 있었지만, 아차 현기증이라도 일으킨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피할 수 없는 형세였다.
"그래, 그만 내려가, 위험하지 않은 구간으로 돌아서 정상인 깃대봉에서 만나자"일행 두 사람을 그렇게 내려 보내고 다른 일행과 함께 봉우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만만치 않은 봉우리였다. 오르다가 손이나 발놀림에서 작은 실수만 해도 큰일을 당할 수 있는 정말 아슬아슬한 바위 절벽을 어렵사리 오르니 고흥군에서 세운 '성주봉'이라 쓴 표지석 하나가 달랑 서 있다.
깎아지른 절벽 앞에서 놀라 뒤돌아선 일행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대나무통 모양이라는 제3봉인 생황봉, 백수의 왕 사자의 포효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제4봉인 사자봉, 늙은 신선 다섯 명이 노닐었다는 제5봉인 오로봉 등 바위봉우리들의 난이도는 점점 더 높아지고 우리들을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제6봉인 두류봉 앞에 서니 안내문이 우리를 더욱 주눅 들게 한다.
'건곤이 맞닿은 곳, 하늘문이 열렸으니 하늘 길 어드메뇨, 통천문이 여기로다. 두류봉 오르면 천국으로 통하노라.'천국으로 통하는 문이라니,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오금이 저린다. 두류봉은 밑에서 꼭대기까지 거의 직각에 가까운 급경사 바위절벽이었다.
앞장서 걷던 일행이 절벽 밑에서 조금 망설이는 표정이다. 아무래도 조금 겁이 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그동안 매주 한 번씩 산행을 했지만 어느덧 70세가 가까워진 나이다. 기력도 패기도 어디 예전만 하겠는가. 그런데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을 마주했으니. 그러나 잠시 망설인 일행이 다시 앞장서 오르기 시작했다.
일행의 뒤를 따라 두류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바위 절벽은 가파르고 위험해 보였지만 적당한 위치에 붙잡고 오를 수 있는 철제 구조물과 쇠줄이 설치돼 있어서 오르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사가 너무 심해 내딛는 발바닥이 왠지 자꾸만 근질근질 불안하다. 적당한 위치에서 사진이라도 한 컷 찍고 싶었지만 한손을 놓을 수도 없고, 아래쪽을 향해 뒤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후유! 이 봉우리 정말 대단하구먼, 현기증이라도 날까봐 무척 걱정했네.""오늘은 바람이 잔잔해서 정말 다행이구먼... 어제처럼 바람이 거셌더라면 정말 위험했을텐데."두류봉 꼭대기에 오른 일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이다. 일행의 사진을 찍어주고 둘러보는 전망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지다. 꼭대기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두류봉' 표지석과 함께 '두류봉에서 바라본 다도해 전경'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제7봉인 칠성봉을 향해 내려가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았다. 더구나 아래 쪽에는 철제로 만든 층계까지 놓여 있었다. 층계 중간 참 햇볕이 따스한 곳에 앉아 과일과 간식을 먹고 있을 때 제2봉인 성주봉 앞에서 포기하고 내려갔던 일행 두 사람이 나타났다. 코스가 어렵지 않은 제7봉부터 다시 오르려고 하는 것이다.
황금빛 바다와 아름다운 다도해 풍경
일행들과 함께 인천에서 왔다는 다섯 명의 등산객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우리들과 반대방향으로 코스를 잡은 사람들이었다. 지나온 봉우리들에 비해 칠성봉을 오르기는 매우 쉬운 편이었다. 별로 위험한 곳도 없었다. 커다란 바위문을 통과해 선뜻 꼭대기에 올랐다.
제8봉인 적취봉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적취봉에 오르니 그리 멀지 않은 서쪽 방향으로 요즘 자꾸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우주선 나로3호 우주센터가 있는 섬 나로도로 가는 다리가 좁은 해협에 걸려 있다. 그리고 남쪽 저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는 놀랍게도 찬란한 황금빛이다. 노을풍경이 아니었다. 아직은 태양이 중천에 떠있는 한낮인데, 어찌 바다가 저런 황금빛으로 곱게 물들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황홀한 풍경이었다.
제8봉에서 내려와 정상인 깃대봉으로 가는 길은 완만하고 평탄한 능선길이었다. 그런데 능선길에 들어서니 갑자기 세찬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바닷가에 홀로 덩그렇게 우뚝 솟아 있는 산이어서 그런지 바람소리도 더 요란하고 위협적이었다.
"허어. 우리가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고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저 봉우리들 올라가보지 못하고 돌아갈 뻔 했네 그려..."함께 여덟 봉우리를 올랐던 일행이 뒤돌아보며 감개무량한 듯하는 말이다. 정말 그랬다. 이렇게 바람이 거셌다면 그 가파른 바위절벽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등산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해도 거센 바람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능선길을 잠깐 걸어 깃대봉에 당도했다. 봉우리 바로 옆에는 통신 시설로 보이는 시설이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고, 정상에는 '깃대봉 609미터'라 쓴 표지석이 서 있었다. 정상에서 뒤돌아본 팔영산 8봉이 아기자기하면서도 장엄하다. 거센 바람소리 때문이었을까. 조금 전 우리들이 저 봉우리들을 넘어왔다는 것이 스스로 믿기지 않고 먼 옛날의 추억처럼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휴양림으로 내려가기 위해 돌아서 오는 길에서 인천에서 왔다는 다른 등산객들을 만났다. 그들은 제6봉인 두류봉에 올랐다가 급경사 내리막 절벽길에 놀라고, 거센 바람소리에 놀라 그냥 뒤돌아섰다고 한다. 휴양림 생활관 마당에 세워놓았던 승용차를 몰고 나오는 입구에는 아직도 고운 빛을 잃지 않은 단풍나무 몇 그루가 우리 일행들을 전송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