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는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거의 일대일로 집결하여 대격돌을 벌이는, 유래 없는 건곤일척의 승부로 치닫고 있다. 이번 대선은 한국 보수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가 대선 후보로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한국의 보수 전반에 대한 유권자의 정치적인 평가가 내려진다는 점에서 역사의 한 분기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어느 대선인들 여야가 사활을 걸지 않았을까마는, 이번 대선에 걸린 '판돈의 무게'를 감안한다면 여와 야, 보수와 진보는 아마도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대선에 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판에 명국 없다'는 바둑 격언처럼, 이번 대선은 건곤일척의 승부에 비해 그 내용이 상당히 실망스럽다. 지난 정부 5년에 대한 평가가 철저하게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새로운 한국사회의 비전을 놓고 치열하게 맞서지도 못하고 있다. 유권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후보 선택의 기준, 혹은 왜 특정후보를 지지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와 동기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이슈도 쟁점도, 화제가 되는 공약도 없는,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선거가 지금 진행 중이다.
제대로 된 '박근혜 검증'은 없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이번 선거의 역사적인 의미를 규정하는 일차적인 원인이 박근혜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 유권자들에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는 1970년대 유신시절의 퍼스트레이디였고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정치인으로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기에 이 사실은 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박근혜의 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지금까지 두 차례 있었던 대선후보 TV토론에서였다. 1차 TV 토론회를 보고서야 박근혜가 '다카키 마사오'의 딸이었음을 알았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정치에 상당히 관심이 많은 나조차도 2차 TV 토론을 보고서야 박근혜가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박근혜를 한 번도 제대로 '검증'한 적이 없었다는 것 아닐까?
5년 전 한나라당의 대통령 경선 후보였고 그 뒤 계속해서 한나라당의 2인자로 살아 왔음에도, 그리고 지금은 새누리당의 대선후보로 나섰음에도 그 오랜 세월 동안 정작 제대로 된 '박근혜 검증'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모순적인 사실이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대선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을 때, 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은 한 목소리로 '고강도 검증'을 예고 했었다. 실제로 문재인과 안철수는 저축은행 청탁의혹이나 다운계약서 작성 등 털어서 먼지 나올 때까지 검증이 계속됐다.
만약 언론에서 미리 박근혜를 그렇게 고강도로 검증해 주었더라면 박근혜 후보가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투표일을 불과 열흘도 안 남겨 둔 시점에서야 알게 되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 입장에서도 미리 고강도 검증을 받았더라면 공중파 TV 토론에서 자신의 의료정책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의 언론이 박근혜를 그렇게까지 고강도로 검증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원래 그들의 편에서 그들과 함께 권력을 향유했던 신문사들과, MB 정부의 하수인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와 점령해 버린 공중파 방송사들이 '자기편 수장'을 몰아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눈에 보이는 언론사들뿐만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기득권층에 빌붙어 사욕을 탐하는 자들이 중요한 요소마다 자리 잡고 있다. 검찰과 국세청 같은 정부기관은 물론이고 가장 공명정대해야 할 법원에서도 여전히 편파적이고 권력지향적인 법조인이 요직을 꿰차고 있다. 이른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MB 정부 내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4대강이나 천안함 사건에 대해 혹세무민을 서슴지 않았다. 후보 간 TV 토론 뒤 종편방송에 모여 앉아 낯 뜨거운 박근혜 찬양에 나선 것도 이들 '전문가'들이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특히나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횡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총선 결과를 분석하면서 밝혔듯이,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 강력하게 작동한다. (
관련기사: 두개나 가진 박근혜, 이대로면 대선도 이긴다 ) 한마디로 말해, 보수는 열에 아홉을 잘못해도 눈감고 넘어가는 반면 진보는 열에 하나만 잘못해도 사단이 나는 불공정함이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열거하기도 힘든 '이중잣대' 이런 이중잣대는 선거가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더욱 기세를 올리고 있다. 박근혜의 국민대통합을 칭송하던 사람들이 문재인의 야권단일화나 거국내각은 야합이라고 비난한다. 노무현의 비서실장한테 책임을 묻겠다는 사람들이 유신의 퍼스트레이디한테는 아무런 말이 없다. 박근혜의 어설픈 과거반성은 거룩하게 받드는 사람들이 문재인의 참여정부 반성에는 그러면 왜 대선에 나왔냐고 트집을 잡는다. 정치적 반대자를 빨갱이로 몰았던 사람들이, 정권이 교체되면 이념논쟁만 일삼을 것이라고 비난한다.
문재인의 NLL 사수 의지가 의심스럽다는 사람들이, 박정희가 휴전선 지키던 포병부대 빼돌려서 육군본부를 장악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보편적 복지로 부자들에게까지 혜택을 줄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한사코 부자증세는 반대한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복지예산은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투표시간 연장에 필요한 100억 원은 융통하지 못한다. 그렇게 철저하게 후보검증을 하자던 사람들이 지난 13일에는 방송사의 양자 TV 토론을 끝내 거부했다.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아서 모두 여기에 옮겨 적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지경이다. 과연 이것이 정상적인, 공정하고 공평무사한 대통령 선거인가? 왜 아무도 이런 거짓과 기만과 위선을 고발하지 않는 것인가?
한국 사회의 이 어이없는 모순은 지난 4일 1차 TV토론이 끝난 뒤 '다카키 마사오'가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올랐던 일화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나는 그 현상을 보면서 문득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악의 화신 '볼드모트'가 떠올랐다. '볼드모트'는 모든 마법사들이 두려워해서 그 이름조자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항상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사람(He who must not be named)'으로 불렸다.
'다카키 마사오'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사람'이었다. 박정희의 공과 과를 함께 평가하자는 사람들도 혈서를 쓰면서까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온 다카키 마사오를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가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에게 대한민국 훈장을 수여할만큼 서로가 각별한 사이였다는 사실도 평가되지 않았다. (
관련기사: 일본 극우파와 박근혜가 나란히? 그것만은.... ) 한일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온 국민이 응원하는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다카키 마사오'가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모순
더욱 기가 막힌 상황은, 이 모든 일들이 아직 당선도 되지 않은 박근혜 '후보'를 향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모르긴 몰라도 '당선자 박근혜'를 향한 기득권의 용비어천가가 이보다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자 주변에는 항상 거기에 빌붙어 기생하는 간신배가 득시글거리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박근혜가 이런 상황을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데 있다. 그것은 박근혜가 갖고 있는 지독한 특권의식 때문이다.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는 박근혜는 스스로를 국가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신은 헌법을 초월한 위치에 있다는 착각을 종종 하는 것 같다. 스스로가 특별한 지위에 있다고 여기면 주위에서 그런 대접을 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불행히도 박근혜의 인생이 꼭 그러했다. 전여옥 전 의원이 인터뷰를 통해 밝힌 햄버거 가게 일화(어머니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는데 박 위원장이 햄버거를 먹지 않고 있기에 '왜 먹지 않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가, 보좌관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오니 그제야 먹었다는 것)도 그러려니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박근혜의 천문학적인 호텔사용 경비도 그 특권의식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근혜 입장에서는 주위 사람들이 '알아서 모시는 것'에 대단히 익숙할뿐더러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박근혜가 자신이나 혹은 부친의 행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는데, 그까짓 6억 원이나 성북동 집이나 정수장학회가 대수이겠는가. 지난 총선 때 이른바 '카퍼레이드'로 선거법을 조금 위반한 것이 뭐 그리 큰 문제가 된단 말인가.
당권을 잡은 뒤 이미 '여의도 대통령'으로 불렸던 박근혜가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것은 누군가 지적했듯이 '유신공주의 여왕님 즉위'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더욱 새삼스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