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18대 대선의 후보 간 마지막 TV 토론회가 지난 16일로 끝났다. 단 3회의 TV 토론회는 유권자들이 후보들의 됨됨이와 정책을 따져 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때론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TV토론회를 많이 했던 지난 대선들과 비교해 보면 그 아쉬움은 배가된다.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가 특정후보의 양자토론 거부 때문에 이렇게 빼앗기고 보니, 새삼 어렵게 얻은 민주주의가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같은 경우에도 특히 후보들의 정책에 대해서 가장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단 3회의 TV 토론회였다. 언론을 통해 걸러진 내용이 아닌, 후보자가 직접 설명하는 정책과 비전이 그 후보를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공약에도 없는데 선행학습 금지법 제정? 이정희 후보가 사퇴해 박근혜-문재인 양자토론으로 진행된 3차 TV 토론을 보면서 나는 두 후보, 특히 박근혜 후보의 공약과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나를 경악시킨 것은 선행학습을 법으로 금지시키겠다는 박근혜의 공약이었다.
나는 문재인 후보의 질문에 박근혜 후보가 선행학습 금지법이 자신의 공약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저 사람 참 정치 편하게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행학습이 한국 공교육을 망친 주범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일 것이다.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어떤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과 단기적인 처방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일이다. 이때 유능한 정치인이라면 국민들의 자발성까지 하나의 제도와 시스템에 끌어들인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이유는 시스템으로 치환되지 않는 인간의 자율성을 통치의 중요한 요소로 포섭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선행학습 금지법은 하수 중의 하수가 선택하는 정책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학재단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는 박근혜 후보라면, 초중고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교육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학교와 학생과 학부모 등 각각의 교육주체들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지 그 근본적인 대책을 고민했을 법도 한데, 거기에 대한 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법으로 금지한다고 해서 선행학습이 전혀 없어질 리도 없으려니와, 원인이 아닌 결과에 대한 즉자적인 법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21세기적인 리더십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박근혜의 선행학습 금지법에서 유신의 잔향을 강하게 느꼈다. 이것은 말하자면 '박근혜의 긴급조치 1호'가 아닐까 싶다. (더 황당한 것은 민주통합당이 TV토론 직후 대변인 논평을 통해 발표한 내용이다. 박근혜 후보가 '선행학습 금지법'을 만들 것이라고 언급한 데 대해 "자신의 공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실제 새누리당은 '선행학습 유발 시험 금지'를 공약으로 내놓으면서 공교육정상화촉진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사실 더욱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토론회 초반부에 문재인이 저출산 고령화 문제와 관련해, 참여정부가 대통령 직속으로 저출산 고령사회 위원회를 꾸렸는데 이것을 MB 정부 치하에서 폐지하는 법안을 박근혜가 공동발의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박근혜는 "꼭 법이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꼭 법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선행학습 금지법은 왜 만든다고 했을까? 이것은 박근혜가 법과 제도를 자기 편한 대로 만들고 적용시키고 또 폐지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불리할 땐 법이 필요 없고, 아쉬울 땐 무슨 법이라도 만들겠다니, 이 얼마나 속편한 정치철학인가.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듯 유신의 퍼스트레이디로서 박근혜가 갖고 있는 특유의 특권의식이 그의 선거공약에 반영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과거에 대한 평가를 넘어 잘못된 과거의 반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데 설마 유신 같은 시절이 다시 오겠느냐, 설마 민주주의가 무너지겠느냐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나 지난 MB 정부 5년은 우리의 그런 상식을 참담하게 무너뜨렸다. 박근혜가 당선된다고 해서 설마 제2의 유신시대가 오지는 않겠지만, 한국형 네오파시즘이 도래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반값등록금과 전혀 다른 국가장학금
박근혜의 시대인식이 기본적으로 유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맞춤형 복지도 그 진정성과 전문성이 크게 의심스럽다. 이날 토론회에서 드러났듯이 박근혜의 반값등록금 공약의 핵심은 등록금을 낮추는 게 아니라 나라에서 장학금을 지급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박근혜 공약의 정확한 명칭은 '반값등록금'이 아니라 '국가장학금'이다,
언뜻 보기엔 반값등록금과 국가장학금이 비슷해 보이지만,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반값등록금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등록금 자체를 억제하겠다는 것인데 국가장학금은 등록금 자체의 인상을 막을 길이 없다. 예컨대 지금 한 학기에 500만원을 등록금으로 내는 학생들의 경우 반값등록금이 시행되면 한 학기 등록금은 계속해서 250만원으로 묶이게 된다. 반면 국가장학금을 시행하게 되면 지금 당장은 학생들이 250만원만 내도 되지만, 대학에서 등록금을 600만원으로 올려버리면 국가장학금으로 300만원을 지급받더라도 본인이 300만원을 부담해야 한다.
게다가 국가장학금제도는 천문학적인 이월적립금으로 문제가 되는 일부 상위권 사립대학들의 행태를 개선할 여지가 없다. 대학 입장에서야 정부가 절반의 등록금을 대신 내 주는 셈이니까 대학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그것을 지금처럼 다른 쪽으로 전용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정부에서 반값등록금을 제도화하면 대학이 방만한 재정운영을 하기 어렵다. 사학재단과 깊은 관련이 있는 박근혜로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기형적인 국가장학금을 선호하는지도 모르겠다.
의료분야 토론에서 드러났듯이, 박근혜는 복지정책에 대한 전문성도 의심스럽다. 나는 2차, 3차 토론회를 보고서도 박근혜의 정책이 간병비를 건강보험에 포함시키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문재인이 암 진료비만 1조5천억 원이라는 건강보험공단 자료를 인용하며, 어떻게 1조5천억 원으로 4대 중증질환을 치료하겠다는 것이냐고 묻자 박근혜는 그 수치가 잘못되었다고만 할 뿐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 과연 자신의 의료정책을 깊이 있게 검토를 했는지 의심스럽다.
구체적인 정책적 전문성도 문제이지만, 박근혜의 복지공약은 그 근본철학부터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박근혜의 복지공약은 이른바 '맞춤형 복지'이다. 못 사는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소득에 따른 차등정책을 펴겠다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를 시행할 경우 엄청난 재정을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 주된 이유인 듯하다. 하지만 부자증세를 반대해 온 박근혜의 전력을 생각하면 재정확보의 수단이 아니라 의지가 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와 문재인이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박근혜는 공평하게 걷어서 차등적으로 쓰자는 것이고, 문재인은 차등적으로 걷어서 공평하게 쓰자는 것이다. 언뜻 보기엔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의 방식이 누구에게 이득인지를 따져보면 그 차이점을 금방 알 수 있다.
국가가 세금으로 복지정책을 펴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살 수 없는 국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모든 국민들이 적정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면 굳이 나라에서 따로 복지정책을 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저소득층에 대한 최상의 복지정책은 '덜 걷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세금을 보편적으로 덜 걷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국가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할 수 없다. 보편적 세금을 고집하게 되면 공공요금 같은 준조세나 간접세의 비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결국 저소득층의 삶에 치명적이다.
반면에 보편적으로 '덜 걷는' 정책은 부자들에게 원천적으로 엄청난 복지의 혜택을 주는 것과도 같다. 맞춤형 복지가 부자들보다 서민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허구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복지정책은 돈의 쓰임새만 따로 놓고 판단하면 잘못된 결론에 이르기 쉽다. 재정을 어떻게 확보해서 그 돈으로 어떻게 쓸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그 후보의 철학과 가치지향점이 보인다.
찬성하지 않았는데 공동발의한 법안은 뭔가?
현직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의 과학기술정책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다. 지면관계상 짧게 한 마디만 말하자면, 수장이 부총리였던 과기부를 갑자기 없앤 데 대한 현장의 불만과 참담한 심정은 지난 5년 내내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MB를 적극 지지했던 사람들조차 이 문제만큼은 잘못된 결정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할 정도였다. 박근혜는 이날 토론회에서 과기부 폐지에 대해 "저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1월21일자로 발의되고 그해 2월22일 통과된 정부조직법 전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78087)
관련 국회자료를 살펴보면 박근혜는 이 법안의 공동발의자로 들어가 있고 또 본회의에서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찬성하지 않는 정책의 법안을 왜 공동발의까지 하고 또 찬성표를 던졌을까?
항간에는 박근혜가 다른 건 몰라도 약속은 꼭 지키는 후보라는 말이 있다. 약속의 기본은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박근혜가 "그 때 잘못된 결정을 했습니다"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기를 바랐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지도자는 더 큰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
유독 박근혜는 자신을 반성하는 데에 인색했다. 5.16 쿠데타도 유신체제에 대해서도, 피해자들을 위로는 했지만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반성하지는 않았다. 명백한 사실관계조차 부정하며 이런 식으로 자신의 무오류성을 강변하는 모습은 지독한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토론을 보는 내내 유신의 망령이 떠올랐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정권교체를 넘어 시대를 교체하겠다는 박근혜, 어쩌면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과거를 교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