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난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가끔 술을 마시고, 시험기간이 되면 학교에서 밤을 샜다. 정치?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신문은 아예 보지 않거나 보더라도 스포츠면만 봤고, TV에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이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머리 아픈 이야기가 싫었다. 전공이 행정학이라 교수님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좀 주워듣는 정도가 전부였다.
룸메이트가 바뀌었다. 과 후배였던 룸메이트는 '평범한' 내가 보기엔 상당히 독특한 녀석이었다. 책장에는 장하준이나 유시민 같은 사람들의 책을 꽂아놓고, <자유론>이나 <국부론> 같은 책들을 탐독했다. 사회적 이슈로 온라인상에서 논쟁이 붙으면 분당 1000타 이상의 스피드로 자판을 두드렸다. 룸메이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정치 얘기하고 싶어도 주변에 할 사람이 없네요." 무식한 룸메이트였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이렇게 생각했다. '너 참 이상한 녀석이구나.'
그러던 어느 날, 룸메이트가 한 라디오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경박해 보이는 남자 넷이 모여 떠드는 방송이었다. 누가 얘기를 꺼내면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웃었다. 멘트의 반은 욕설이었고 표현은 저급했다. '이상한 녀석이 이상한 방송을 듣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희한한 방송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표현은 거칠지만 분위기는 따뜻했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것 같은데도 웃음이 있었다. 이건 뭔가 싶었다. 그 칙칙한 네 남자의 목소리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그들이 쓴 책도 샀다. <닥치고 정치>를 읽으며 깨달았다. 아, 정치란 달나라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우리 삶에 닿아 있는 것이었구나.
김어준의 '절친' 오세훈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인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이 채웠다. 여당의 얼굴이었던, 언제나 엘리트였던 나경원을 꺾었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이끄는 서울시장이라는 자리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컸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은 실정을 거듭했다.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총선을 맞았다.
하지만 졌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였다. 개표방송을 보며 취했다. 감옥에 간 정봉주를 대신해 출마한 김용민은 총선 패배의 원흉으로 낙인찍혔다.
실망이 커서였을까. 더이상 그들의 뒷담화가 재밌지 않았다. 정봉주가 <경향>을 통해 쓴소리를 했듯, 초심을 잃고 이상한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열심히 뛰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라는 허무감을 극복하기 힘들었다.
비록 예전의 열정은 잃었지만, 끈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생각날 때 한번씩 나꼼수를 들었다. 언론에서 전하지 않는, 하지만 알아야 하는 이야기들이 거기 있었다. 이 무렵부터 어렴풋했던 언론인의 꿈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주기자>를 통해 본 주진우의 삶은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총선은 완패했지만, 아직 대선이 남아 있었다. 김어준이 예언했듯 문재인이 떠올랐다. 친구를 잃고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예를 갖췄던 대인배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과오와 안철수 지지자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십알단이 터졌고, 국정원이 터졌고, 이정희의 사퇴로 이뤄진 양자토론에서 압승했다. 뚜렷한 상승세였다.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선을 맞았다. 투표율은 높았지만, 다시 한번 졌다. 보수와 진보의 총력전에서 패했다. 너무 슬프고 아쉽지만 민주당이든 야권 지지자들이든 할 만큼 했다. 48%라는 득표율에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많은 표를 받고도 졌다. 상대가 강했다. 대한민국 국민은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을 선택했다.
대선이 끝나고 검찰이 나꼼수에 대해 수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모두가 예상했던 수순이다. 그들이 보기에 나꼼수는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 하는 '방송 같지도 않은 방송'이었으리라. 그 같잖은 것이 자꾸 문제를 만드니 그동안 얼마나 골치가 아팠을까. 참았던 만큼 수사는 집요할 것이고, 지금까지도 충분히 힘들었던 네 남자는 앞으로 더 혹독한 시련을 견뎌야 할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나꼼수의 열성팬은 아니다. 듣지 않은 편도 엄청 많고, 공연 한 번 안 갔고, 정봉주에게 편지 한 통 안 보냈다. 그래도 항상 고마웠다. 무지한 내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줘서,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해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줘서, 그리고 쫄지 않도록 격려해줘서.
나꼼수 마지막회를 들으면서 그들도 울고 나도 울었다. 대선이 끝나고 나는 울었는데 그들도 울었을까.
정말 그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아마도 그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 이제 공권력의 거대한 칼날을 맨몸으로 받아내야 할 그들에게 내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약속하건대, 이 역사를 나는 똑똑히 기억할 것이다.
나꼼수 4인방, 부디 힘내시길. 땡큐!!!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에 쓴 글입니다. 블로그 주소는 http://blog.daum.net/ema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