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도 매섭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냥 철수하면 안 되나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지난 24일 오후, 가두모금 행사에 나선 학생회 아이들이 추위에 손발을 동동 구르며 애원하듯 말했다. 약속한 대로 오후 5시까지는 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다독였지만, 아닌 게 아니라 시커먼 아스팔트 바닥을 퉁기며 불어오는 칼바람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기타는커녕 마이크조차 움켜쥘 수 없을 정도였다.

가두모금은 우리 학교 학생회의 오랜 전통이다. 해마다 2학기 기말시험이 끝나고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이맘때 조그만 거리 공연을 준비한다. 지역 주민들에게 불우한 이웃들을 살피고 기부에 동참하라는 메시지를 건네려는 취지다. '사랑의 열매'가 언론과 인터넷을, 구세군이 도시의 번화가를 '공략'한다면, 우리는 학교를 둘러싼 지역사회에 조그만 밀알이 돼보자는 뜻으로 시작됐다.

대개 오후 2시경에 시작해서 서너 시간 동안 모금을 하는데, 추위에 떨며 율동하고 노래하는 아이들의 기특하고도 안쓰러운 모습에 무뚝뚝한 표정의 행인들조차 지갑을 열어 성의를 표시하곤 한다. 고사리손의 어린 아이들부터 시장바구니를 들고 종종걸음을 치는 아주머니와 심지어 잠시 정차해 자동차 창문을 내리고 선뜻 지폐를 건네는 사람들까지, 해마다 훈훈한 장면이 연출된다.

올해는 학교와 이웃한 대학가에서 모금 행사를 치르기로 했다. 어느 도시의 대학 주변이 안 그럴까마는, 사시사철 젊음이 넘치는 곳이 바로 대학가다. 비록 겨울방학 중이긴 해도 유동인구가 여전히 도시의 다른 어느 곳에 견줘 많은 곳이라는 생각에서다. 더욱이 젊은이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껏 들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대학 측에 공문을 보내 협조를 구했다. 발전기가 준비되지 않는 이상, 악기와 마이크를 사용하려면 무엇보다 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 않았다. 소음으로 인해 연구 중인 교수들과 주변 상가로부터 민원이 제기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선뜻 허락해주지 않았다. 시끄럽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겠다며 거듭 약속한 후에야 간신히 승낙을 얻어냈다.

평소엔 '불야성'이었는데... 을씨년스러운 대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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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무렵, 앰프 등 장비를 싣고 공연 장소에 도착했다. 대학가는 크리스마스 전날인데도 황량하리 만큼 썰렁했다. 예년 같으면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놓고 연신 캐럴을 틀어놓았을 법도 한데, 트리는커녕 변변한 조명 불빛 하나 보이지 않고 들리는 거라고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뿐이었다.

산타 모자를 쓰고 루돌프 복장을 챙겨 입으면서 일사불란하게 공연을 준비했다. 준비해 간 발열 팩도 무용지물일 정도로 추웠지만 아이들 모두 하나같이 열심이었다. 우선 경쾌한 캐럴을 틀고, 가두모금 행사의 취지를 안내하는 것을 시작으로 길거리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햇볕이 가장 따스하다는 오후 2시였다.

열심히 율동을 했고, 웬만한 가수 뺨치는 실력을 뽐내며 노래를 불렀지만 주위의 시선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모금함에 다가와 돈을 넣는 사람은 고사하고 도로 건너편에서 공연을 쳐다보는 사람들조차 많지 않았다. 썰렁한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 아이는 이렇게 푸념했다.

"행인들보다 오가는 자동차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로변에 늘어선 가게의 간판마다 하나둘 불이 켜졌지만, 드나드는 손님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저 혹한에다 심각한 경기 불황 탓이려니 싶었지만, 젊음의 활력을 잃은 대학가의 분위기는 사뭇 낯설었다.

한 달 전쯤 이곳에서 지인을 만났을 때만 해도 평일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카페에 자리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자정을 넘긴 늦은 밤 시간에도 택시를 잡기 위해 줄을 늘어서야 했을 정도로 불야성이었던 곳이다. 그랬던 곳이 그 흔한 캐럴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을씨년스러운 곳이 돼버렸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전야에.

흥청거리던 대학가가 썰렁해진 까닭... '대선 후유증'

5시가 다 될 무렵, 우리가 공연하던 곳 바로 옆에서 어묵과 붕어빵을 팔던 조그만 노점의 아주머니도 주섬주섬 짐을 꾸렸다. 따뜻한 국물이 있고 모락모락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노점은 이때부터가 바야흐로 대목일 텐데 장사를 끝내려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과 댕그렁 소리 나는 동전 통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근래 대학생들 주머니 사정이 변변치 않아서인지 고작 500원 짜리 어묵 하나 팔기도 쉽지 않아요. 그런데, 요 며칠 전부터는 아예 장사가 안 돼요. 팔려고 내놓은 걸 제가 끼니로 삼을 지경이에요. 믿기지 않겠지만 오늘 세 시간 동안 번 게 이만큼이네요.

추운데 더 있어봐야 장사가 될 것 같지도 않고, 교회는 안 다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라니까 집에 들어가 가족과 저녁식사라도 함께 먹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철수하려고요. 한숨만 나오려던 차에, 그래도 옆에서 자식 같은 아이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니 즐겁긴 하네요."

대학가를 찾은 만큼 대학생들의 관심과 십시일반 기부를 기대했지만, 젊은이들이라곤 후배들 고생한다는 소식에 애써 찾아온 졸업생들이 거의 전부였다.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모금함에 넣으면서, 밤낮으로 흥청거렸던 대학가의 분위기가 느닷없이 썰렁해진 이유를 그들은 하나같이 여기에서 찾았다. 바로 대선의 후유증이라는 거다.

"이번 대선은 20대 초반인 제 또래들에게는 그 의미가 남달랐어요. 사실상 처음이었던 데다가 두 후보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렸던 터라 똘똘 뭉치기 쉬웠고, 그다지 어렵지 않게 우리의 바람대로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했던 거죠. 주위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SNS로 만난 대구나 안동 사는 친구들조차 공감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제 또래들의 의기투합이 어린애들의 치기로 판명된 겁니다. 한마디로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했던 거죠. 예전 같으면 대선 결과에 대한 뒷담화를 술안주 삼아 매일이다시피 만났을 테지만, 황망함과 무력감에 술자리는커녕 친구들의 단순한 만남조차 꺼리고 있는 것 같아요. 당장 저부터, 예전과는 다르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투표장에 달려갔지만, 선거가 끝난 지금 대선 결과에 대한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아요. 해봐야 괴로우니까요."

듣고 보니 지나다니는 대학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의기소침해 있었고, 그들이 분신처럼 손에 지니고 다니는 스마트폰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크리스마스 캐럴이 귀에 쉬이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산타와 루돌프 복장이 얼마나 남우세스럽게 느껴졌을까. 어둠이 깔렸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 전야 대학가는 적막할 정도로 차분했다.

세 시간 반 동안 63만1000원... 그래도 표정은 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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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를 갓 넘겨 공연을 마쳤다. 함께한 학생회 아이들 모두가 머리를 조아리며 행인들을 향해 성원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지만,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모금함은 방금 철수한 어묵 노점상의 돈 통처럼 텅 비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금 액수에 급급해하지 말고 나눔을 실천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자고 다짐했지만, 아이들의 사기는 호응하는 행인들의 숫자와 모금 액수에 정비례하는 법이다.

챙겨간 장비와 가벼운 모금함을 거둬 학교로 돌아왔다. 모금함을 열어 세어보니 63만1000원. 30여 명의 아이들이 세 시간 반 남짓 추운 날씨에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뛰고 외친 결과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액수였지만, 아이들은 어른스럽게 자신들이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몸소 실천한 사람들이라며 웃어 보였다.

비록 예년처럼 많은 성금을 모으진 못했지만, 노점상 아주머니처럼 경기 불황에 시달리는 서민들에게 잠시나마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리고 대선 후유증에 시달리며 의기소침해 있는 대학생 선배들 앞에서 외려 보란 듯 활기찬 모습으로 위로를 건넸으니, 올 크리스마스만큼은 그들이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그런 까닭인지 공연을 마치며 찍은 단체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