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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는 '스승'이 있나요? 저는 이렇게 대답해 왔습니다. '스승'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 대답에 대한 설명을 좀 해야겠군요.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제게 어떤 '스승'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스승'처럼 여긴 그 분이 어느 순간에 달라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분이 달라졌다고 제가 생각하는 것이죠!(이 문장이 중요합니다. 뒤에 가시면 알게 됩니다.)

안타깝지만 그 분은 이전에 제가 그리고 기대한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사뭇 심각한 고민 끝에 그 분을 제 '스승' 명단에서 빼버립니다. 곧이어 저에게는 실망이나 좌절감 비슷한 것이 찾아옵니다. '아, 나는 정말 선생 운도 없어!'라면서 말이죠.

'스승'이란 존재는 참 묘합니다. 그저 평상시에는 '뭐 언젠가 있었겠지. 없기야 했겠어.' 하며 미심쩍지만 있었던 것처럼 믿으려다가도,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하지요.

실상 우리가 어디 참다운 '스승'을 만나보기라도 했나요?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스승' 상을 갖고 있는 분을 만나기는 참 어렵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얘기란 게 온통 성적과 상급 학교 진학에 관한 이야기밖에 더 있습니까? 오늘날 학교의 '스승'은, 시험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거나 좋은 일자리를 알선(?)해 줘서 생업에 도움을 주는, 좋게 말해 컨설턴트, 삐딱하게 말해 브로커 구실만 잘 하면 되는 게 아닐런지요.

또 이 나라 대한민국은 도저(到底)한 네트워크 사회 아닙니까. 이 촘촘한 그물망 사회에서는 '스승'마저도 그 알량한 학연(학연)을 위한 코딱지만큼의 실마리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특별한 스승'(?)-그가 여러분에게 어떤 이유로 '특별'해졌으며, 그 결과 그가 어떤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러분 나름대로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을 매개로 해서 이어지는 동문 모임을,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학교라는 공간을 매개로 만난  '스승'은 끝없는 내 욕망을 채워주는 속물 교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합니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의 스승'이 있습니다. 다른 이가 '뭐 그따위가….'라고 우리의 '스승'에 대해서 혹평할지라도 말이죠. 이 때의 '스승'은 다른 이의 그런 시선과는 전혀 무관한 지점에 존재합니다. 그 '스승'은 우리의 마음 속에, 여러분의 눈 속에서만 살아갑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스승은 있다>는 정확하게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합니다.

우치다 선생이 말하는 '스승'은 한 마디로 '수수께끼 선생님'입니다. 그 제자가 결코 전모를 알 수 없는 선생님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우치다 선생은 이를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무지(無知)의 선생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제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곧 나의 지가 미치지 못하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는 선생님이라는 의미에서 말이죠.

이런 의미에서 '스승'은 학식이 뛰어난 분이 아닙니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재미있게 해주는 이도 아닙니다. 학생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 주고, 나름의 뚜렷한 교육적 소신이나 철학을 갖고 교육 활동에 임하는 분은 더더욱 아닙니다. 민주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가 스승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스승'은 한 마디로 '제 눈에 안경'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도 나름대로 '스승' 몇 분을 떠올려 봤습니다. '제 눈에 안경' 같은 분을 말이죠. 맨 먼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떠오르더군요. 글자를 왼손으로 쓴다고(저는 몇 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일을 왼손으로 하는 왼손잡이입니다) 긴 자로 손등을 때리기도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묘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의 칭찬은 제게 온통 세상을 얻은 것 같은 환희를 느끼도록 말들었죠. 그 이후에 그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저에게, 우치다 선생이 말한 의미에서 '수수께끼 선생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싶은 분으로서 말이죠.

제 머릿속에 강렬하게 살아있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옛 승주(오늘날 순천시에 편입된 군입니다)의 시커먼 시골 학교를 다녔습니다. 1970년대 말이었는데도 한 학년에 두 학급 정도밖에 없는 조그만 학교였죠. 그때 제게 도회지(순천시)에서 열리는 백일장 대회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글쓰기에 노둔한 제가 그때 왜 뽑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회가 있는 날, 공교롭게도 아버지께서는 밭일을 하러 가자시며 학교를 못 가게 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그 당시 시골에서는 흔했습니다. 저는 하릴없이 동네 뒷골 대추나무 밭으로 가서 일을 했지요. 콩을 파종하던 초여름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학교에서 동네까지는 그 거리가 오 리(2km) 남짓이나 되었습니다. 그 길을, '초딩' 1학년짜리 백일장 대회에 참가시키겠다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날 저는 선생님과 함께 대회에 참가했고, 어떤 상을 탔습니다. 그리고 그 '스승'님을 본받아야겠다며 글쓰기와 공부에 매진했죠. 선생님이 되기로 작정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1, 2학년 때의 국어 선생님도 떠오르는군요. 미혼의 젊은 여선생님이셨던 그 분 또한 제게는 '수수께끼 선생님'이었습니다. 향긋한 등꽃이 만발한 교정 벤치에서 시를 읽어 주시던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그때 저만의 생각이겠지만!) 살짝 웃음을 띤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그 시선을 바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때 제 배움의 이유는 우치다 선생이 말한 그대로, 그 선생님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앎에 대한 열정은 모조리 그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물음에 정확하게 답해야 한다고 여겼고,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무궁한 내면에 감탄해야 한다고 기꺼이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알아가려 할수록 선생님은 더욱 제가 모를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정확하게 말하건대, 그 선생님은 제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알고 싶은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따져놓고 보니, 그동안 저에게는 '스승'이 정말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나이 마흔이 넘은 지금도 저에게는 '스승'이 한둘이 아닙니다. '스승'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다른 이'도' 좋은 선생님은 '스승'이 아닙니다. 아니, 그런 선생님은 '스승'이 되기 힘듭니다. 오직 나에게'만' 좋은 선생님이 '스승'입니다. 우치다 선생 말마따나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이 책 <스승은 있다>를 권합니다.

글 첫머리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여러분에게는 '스승'이 있나요? 저는 이제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스승'은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라고.

* 바로 앞 문단에서 여기까지 서술한 내용이 이 책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학생에 따라서는 '폭력 교사'나, 그밖의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선생 같지 않은 선생'도 '스승'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는 우치다 선생이 그런 이들까지 그가 말하는 '스승'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제 눈에 안경'인 '스승'이라고 해서 내가 좋아하고 알고 싶어하는 모든 이를 '스승'의 반열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이 점에 특히 유의하면서 책을 보아야 합니다.

우치다 타츠루 씀, 박동섭 옮김(2012), 스승은 있다 -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민들레.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489571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있다 - 좋은 선생도 없고 선생 운도 없는 당신에게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민들레(2012)


#우치다 타츠루#스승은 있다#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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