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늦게나마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먼 길 마다않고 포항 호미곶을 향했다. 올해 고3 수험생이 되는 아이들과 인솔교사 등을 포함해 모두 서른 명이 함께 했다. 이름 하여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대한민국의 청춘들을 품다!'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떠난 답사여행 프로젝트다.
수평선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장엄한 일출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 공부에 지친 아이들에게 그 무엇보다 큰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라 믿었다. 기실 교육이란 아이들에게 방대한 지식을 효율적으로 주입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배움이 곧 삶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도록 자극하는 일련의 소통 행위다.
거칠게 말해서, 동트는 새벽 함께 어깨 겯고 맞이하는 장엄한 동해 일출의 감동 한 번이 수십 수백 시간의 교실 수업보다 더 큰 교육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믿음.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미래세대 아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도 어쩌면 언제 어디서든 검색할 수 있는 그 내용보다 그것이 넌지시 던져주는 메시지와 교훈일 터다.
호미곶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가는 도중 휴게소 삼아 경주에 있는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의 유적엘 들렀다. 그는 '동방5현(東邦五賢)'의 한 사람이자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확립한 영남 유학의 종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수험용' 지식을 알려주고자 함이 아니라, 학문과 수양을 위해 그가 보인 학자적 면모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 찾아간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행적을 빌어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걸 슬쩍 보여주려는 심산이었다고나 할까. 더욱이 그가 태어난 양동마을도 자동차로 불과 10여 분 거리일 뿐인데다, 나머지 유적들의 경우에는 한 마을 내에 밀집돼 있어서 시간에 쫓기는 답사여행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과거 그가 걸었을 길을 따라 마실 다니듯 돌아다니며 아이들과 두런두런 얘길 나눴다.
그와의 만남은 사후 그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마을 초입 옥산서원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보존된 유서 깊은 곳이다. 그를 흠모한 후학들이 남긴 신도비와 현판, 수많은 고문서 등을 접하면서, 아이들은 그의 높은 덕과 학문의 깊이를 깨닫고 회재 이언적이라는 낯선 이름과 친숙해진다.
정문 옆으로 난 외나무다리를 건너 자옥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을 따라 걸어 오르면 그가 7년간 기거한 독락당에 닿는다. 옥산서원이 사후의 역사적 평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곳은 그의 생전 삶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정쟁에 휘말려 관직을 박탈당한 후 낙향해 직접 짓고 살던 집이기 때문이다.
대개 역사는 그가 남긴 저술과 유품 등으로 인물 됨됨이를 평가한다. 하물며 그가 직접 설계한 고택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요즘 말로 하면, 그가 사는 곳이 그가 어떤 성품의 사람인가를 말해준다고나 할까. 건물의 배치와 사용한 부재, 현판 글씨, 주변 경관과의 조화 등을 찬찬히 뜯어보노라면, 그의 학문은 물론 마음속까지도 훔쳐보듯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솟을대문을 지나 옷깃을 여미며 들어간 마당에서 처음 우리 일행을 반기는 건, 귀한 손님을 맞아 절하듯 납작 엎드린 '경청재'다. 현재 회재 선생의 후손이 살고 있는 안채로 연결되는 건물이다. 그 끝엔 출입금지 안내 팻말이 세워져 있다. 사적 공간인 살림집이니만큼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은 대사성과 대사헌, 판서에다 종1품 좌찬성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두루 거친 고관대작의 집답지 않게 의외로 소박하다며 놀라워한다. 이 집의 사랑채인 독락당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 거라며 회재 선생의 성품을 닮은 건물이라고 잔뜩 기대를 부풀려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느 사대부가의 권위적인 사랑채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른 까닭이다.
사랑채라면 높고 화려하게 꾸며 바깥주인의 위엄을 과시하는 게 보통인데, 독락당은 마치 대청마루와 땅이 맞닿은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대학 시절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난 답사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아예 땅을 향해 낮게 엎드렸다. 관직에서 쫓겨난 이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고집스럽고, 명문 사대부가 지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주눅이 든 모양새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독락당 마당에 들어서려는 순간 사달이 났다. 후손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갈 수 없다며 길을 막아섰다. 관람하려면 방문 전에 문화재청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일행들과 지금껏 서너 차례 이곳을 찾았지만, 단 한 번도 제지를 당한 적은 없었다. 그때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문화재청에 관람 허가 신청을 했다는 걸까.
관람 규정이 바뀌었나 싶어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바깥에서 나름 열심히 안내해주었지만 건물 안에서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느낌과 담벼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그것이 같을 수 없기에 애써 느낌을 설명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독락당보다 사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었다.
회재 선생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인근 정혜사에서 주석하던 스님과 교유했던 자취를 보여주고 싶었다. 바로 독락당의 별당으로서 계곡에 매달리듯 세워진 계정이 그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신분을 뛰어넘어 당시 가장 천한 계급에 속했던 승려와 허물없이 만나 학문과 사상을 논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계정이 '양진암'이라는 불교식 이름을 함께 갖게 된 이유다.
계정은 비록 보물 제413호 독락당에 가린 조연이지만, 그의 학자로서의 됨됨이와 사상의 폭을 능히 짐작하게 해주며 교육적 견지에서 후세에 큰 울림을 주는 장소다. 남도의 강진 땅으로 유배 온 다산과 이웃한 백련사의 혜장선사의 교유가 그랬던 것처럼, 학문의 일가를 이룬 대학자들치고 사상과 이념, 종교의 벽을 뛰어넘지 않은 이는 드물다는 걸 계정의 존재를 통해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거다.
내 기억이 맞다면, 독락당 너머 계정을 지나 옆으로 난 길 끝에 정혜사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과거 회재 선생과 정혜사 스님이 서로 학문과 사상을 논하기 위해 수없이 오갔을 길이다. 아이들과 산책하듯 과거의 회재가 되어 그 길을 따라 정혜사로 걸어오를 참이었는데 무척 아쉬웠다. 그런데, 그때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한가롭게 독락당 내부를 둘러보는 일행과 마주쳤다.
인근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교수님과 함께 왔다면서 허가 없이는 못 들어오는 곳으로 알고 있다며 짐짓 으스댔다. 문화재청에 어떻게 신청했는지 물었더니, 그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곧장 문화재청 고객지원센터 홈페이지에 접근했지만, 대체 어디에 어떤 절차로 허가를 받아야 하는 건지 당최 알기 어려웠다.
정중히 부탁도 해보고 아이들과 함께 천릿길을 어렵사리 왔다며 통사정도 해보았지만, 끝내 들어가질 못한 채 독락당과 계정의 담벼락 주변만 맴돌다 나왔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데다 현재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안채에서 비켜나 있으니 관람객을 위해 개방할 법도 하건만, 문화재 보호를 위한 것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선조들의 유산인 문화재를 후세가 직접 찾아가 향유할 수 없다면, 문화재 보호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직계 후손 외에 아무도 찾지 않는 문화재라면, 그게 문화재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면 회재 선생의 삶과 학문이 오롯이 스며있는 독락당과 계정은 마치 박제된 동물처럼 생명력 잃은 채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제대로 된 후손이라면 되레 우리처럼 멀리서 회재 선생에 대해 배우겠다고 찾아온 학생들에게 퇴짜를 놓기는커녕 초청장을 보내서라도 오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명색이 독락당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데, 푸른 눈의 이방인들 한 무리가 와서 구경하겠다는데도 과연 문 앞에서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오라며 돌려보낼까요?"연신 아쉬움을 토로하던 한 아이가 인솔자인 내게 한 말이지만, 이 질문을 그 후손에게 던진다면 그는 과연 뭐라고 답할까. 대대손손 터를 지키며 살아온 후손들이 관람객들의 소란 등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겪는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지만, 명문대가의 후손으로서 '접빈객(接賓客)'의 아량을 베풀어 회재 선생을 자유롭게 알현하도록 배려해줄 수는 없는 걸까.
회재 선생이 '혼자 좋자'고 당호를 '독락(獨樂)'이라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를 흠모하던 후학들이 옥산서원을 세우면서 그 정문 이름을 '역락(亦樂)문'으로 한 건, 이른바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두 번째 구절을 유난히 좋아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반영한 것 아니었을까.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멀리서 벗들이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