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오 마사유키 감독이 1996년에 만든 영화 <쉘 위 댄스?>(Shall we dance?)에는 1990년대 당시 일본 중년 남성의 외로움과 공허함이 잘 드러난다.
주인공인 중년의 스기야마는 매일 전철로 직장과 가정을 오가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철 안에서 사교댄스 교습소 창가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 메이를 발견하고 사교댄스 교습소를 찾아가 그녀에게 춤을 배우게 된다. 스기야마는 사람들 몰래 춤을 배우면서 매일 반복되는 공허한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또 다른 인생을 맛보게 된다.
영화에서 스기야마는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공부와 취업, 연애와 결혼, 집 장만, 자녀 출산과 교육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뒤돌아보니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한 외로움과 공허함의 돌파구가 바로 춤이었다.
<쉘 위 댄스?>의 주인공 스기야마는 일본의 1차 베이비붐 세대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잘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7~1949년 사이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를 '단카이 세대(團塊の世代)'라고 부른다. 스기야마가 바로 그 단카이 세대다.
단카이 세대라는 말은 일본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낸 경제평론가 사카이야 다이치가 1976년에 펴낸 <단카이의 세대>라는 책 제목에서 유래했다. 단카이(團塊)는 '불쑥 튀어나온 덩어리'를 뜻한다.
단카이 세대는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난 세대이기 때문에 진학·취업·결혼·주택 마련·자녀 교육 문제 등에서 심각한 경쟁과 혼란을 겪는다. 학창 시절과 청년 시절에는 서구로부터 밀려드는 청바지·히피 문화·영화·음악·첨단 기술·코카콜라와 햄버거·경제적 풍요를 비롯해 격렬한 학생운동(전학공투회의)을 경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일본은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 단카이 세대의 풍부하고 질 높은 노동력과 일본인 특유의 성실함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패전에도 불구하고 전후 고도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단카이 세대는 토지사유제 사회에서 급격한 경제성장이 일으킨 거대한 부동산 거품 붕괴라는 쓰나미를 직접 몸으로 맞은 세대이기도 하다.
게다가 단카이 세대의 은퇴 러시가 시작될 즈음에는 현금 자산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이 보유한 부동산을 일시에 처분하면서 집값이 더 하락했고, 소비의 주축을 감당하던 이들이 은퇴하면서 소비 감소와 내수 위축, 투자 감소로 인한 불황도 야기됐다.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세대가 오히려 토지사유제와 결합된 경제성장의 부작용인 부동산 거품 붕괴의 유탄을 맞고, 결국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주범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이른바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다.
집값 하락에 따른 일본·한국의 보수화 '동조현상'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일본은 한때 미국 뉴욕의 마천루를 대거 사들이면서 전 세계 경제를 집어삼킬 것 같이 잘 나가다가 부동산 거품이 갑자기 붕괴되면서 소위 '잃어버린 10년'에 빠져 있다. 그 이후로 일본에서는 국민들이 점점 더 보수화되고 보수당의 장기 집권이 지속되고 있다. 이제 일본은 젊은이들이 꿈을 꿀 수도,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이 답답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지난 우리나라 대선을 앞두고 일본 후쿠오카를 며칠 동안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직접 가서 본 일본은 겉으로는 길거리에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사람들은 길을 물어보면 친절하고, 질서도 잘 지키고 안전해 보였지만, 일본인들은 마치 개미나 일벌처럼 모두들 주어진 자신의 삶만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토지사유제 위에서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다가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사회는 보수화되고 젊은이들은 꿈을 잃어버린 일본이 어쩌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우리나라의 5060세대는 일본의 단카이 세대와 거의 일치한다. 일본의 1차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출생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1차 베이비붐 세대인 5060세대도 한국 전쟁 이후에 출생한 세대다.
지난 대선이 끝나고 5060세대가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를 던진 이유에 대해 이정희 후보에 대한 반감을 비롯해 경제·안보 불안 등 여러 진단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집값 하락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가장 컸다는 진단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5060세대는 일본의 단카이 세대처럼 가장 왕성한 경제활동과 소비를 했던 사람들이고 부동산 자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세대기도하다. 5060세대가 집값하락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
일본에서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고 난 이후 사회가 점점 더 보수화되면서 보수당이 장기집권하게 된 것도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 거의 일치한다. 우리나라의 5060세대는 부모 봉양과 자식 뒷바라지, 자신의 노후를 동시에 책임져야하는 딜레마에 처해있다.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은 아직 부실한 데다가, 과거에는 노후를 책임지던 자식이 이제는 살인적인 사교육비와 대학등록금, 감당 불가능한 신혼집값, 맞벌이 자녀의 손주 양육 등을 대신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짐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5060세대가 확실한 노후 대비 수단으로 유일하게 믿고 있던 집값마저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5060세대 하우스푸어가 불안과 두려움에 떨다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는 것이 지난 대선에서 벌어진 슬픈 이야기다.
우리나라 5060세대는 일본의 단카이 세대처럼 박정희 시절에는 치열한 학생운동을 겪었고, 전두환·노태우 시절 민주화 항쟁에서는 직장인 넥타이 부대로 나섰으며, 김영삼 시절에는 IMF를 겪었고, 40~50대에도 김대중과 노무현을 많이 찍었던 사람들이다. 그런 5060세대가 지난 10년 사이에 집값에 포로가 되어 어느덧 '생활보수'가 되어버린 것이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슬픈 현실이다.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될 것인가우리나라는 부동산 거품이 붕괴된 일본처럼 앞으로도 사람들이 계속 보수화되면서 보수당이 장기 집권하게 될까? 일본은 우리나라의 미래일까? 5060세대 하우스푸어는 자신들의 집값을 계속 떠받치기 위해 앞으로도 보수당을 열심히 지지하는 게 자신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일까?
5060세대 중에서도 부동산과 다른 자산을 많이 보유한 소수는 그나마 낫겠지만, 하우스푸어나 부동산과 다른 자산이 없는 5060은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이들은 IMF 때는 조기 은퇴, 지금은 정년퇴직에 등 떠밀려 퇴직금과 집을 담보로 자영업 전선에 뛰어들지만 프랜차이즈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4명 중에 3명은 원금도 못 건지고 망한다.
통계청과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09년 기준 50-54세 남성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62.3명으로 20년 전의 15.6명보다 4배가 늘었다고 한다. 자살에 대한 충동 여부 및 이유를 묻는 201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이들 남성의 44.9%가 경제적 어려움을 꼽았다고 한다. 그만큼 5060세대는 부동산 자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정에 대한 이중삼중의 책임과 경제적 어려움을 감당하고 있는 세대이기도하다.
이들 5060세대가 앞으로도 계속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달랑 한 채 가지고 있는 집값을 계속 떠받치기 위해 부동산 거품을 지속시켜줄 것만 같은 보수당을 계속 지지해야 할까?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 한 채로 자신들의 노후와 부모 봉양, 자녀의 사교육비, 대학등록금, 신혼 집값, 손주 용돈을 모두 감당할 수 있을까?
5060세대는 경제가 어려워서 자기 자녀들의 대부분이 변변한 곳에 취업도 못하는 데도 살인적인 사교육비와 대학등록금만 허리가 휘어지게 대고 있다. 게다가 자신들의 집값은 계속 유지시키면서 정작 자기 자녀들이 결혼할 때는 살인적인 집값을 마련해야하는 '자기 발등 찍기' 같은 자학을 계속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5060세대는 영원히 무거운 돌을 굴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Sisyphos)인가?
또한 복지국가는 지속적인 경제 발전과 성장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지금처럼 부동산 거품을 계속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과 성장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지금 5060세대는 자신들의 집값을 유지시키는 대가로 정작 자신들의 자녀를 희생시키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피땀 흘려 일구어온 경제 발전을 무너뜨리고 있다.
부동산 문제 해결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저주받은 시시포스 신화인가? 5060세대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어떻게 '힐링(치유)'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우리사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소통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치유하면서 그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절대 일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미래가 아니다.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5060세대. 그들의 다른 이름은 우리의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형·누나·오빠·언니·남동생·여동생·아들·딸이기도 하다. 그들은 바로 우리의 가족이다. 또한 집이 없어서 지금도 계속 고통 받고 있는 젊은이들. 그들은 바로 5060세대 당신들의 아들·딸·손자·손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우리는 모두 한 가족(國家)이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자. 우리는 절대 일본처럼 되지 말자.
덧붙이는 글 | 고영근 기자는 희년함께(www.landliberty.org)에서 사무처장으로 일하고 있고,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운영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