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역에서 내려 면 소재지 장터를 지나 제법 너른 시내가 흐르는 다리를 건넜다.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몇 채의 집들이 아늑하게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얼마쯤 가니 길 왼편에 공사판 철제로 만든 듯한 '농부네 텃밭 도서관'이라고 적힌 푯말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다.
사실 이곳을 찾은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진상역을 취재하면서 인근에 갈 만한 곳이 없나 싶어 지도를 보던 중 '텃밭 도서관'이라는 이색 단어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도서관은 마을 안쪽에 있었다. 창고로 쓰는 건물에 선거 벽보와 함께 내걸려 있는 '오지게 사는 촌놈'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자 이곳이 텃밭 도서관임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농장 입구를 들어서니 왼편이 바로 도서관이다.
조심스럽게 출입문을 열자 양탄자가 깔린 길쭉한 서재가 나타났다. 양쪽 벽으로 길게 늘어선 서재에는 책들이 빼곡 꽂혀 있었고 앞과 옆으론 창이 나 있어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이미 신이 난 아이는 책 한 권을 뽑더니 탁자가 놓인 의자로 냉큼 가서 앉았다. 딱히 바쁜 일도 없고 해서 아내와 나도 책 한 권을 꺼냈다.
"천천히 보시고... 나중에 김장김치에 밥도 먹고 가요." 살며시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농장의 주인인 듯한 사내가 한마디 건네고 얼른 사라졌다. 사내는 잠시 후 다시 나타나더니 서재 옆문을 열쇠로 열었다.
"원래 이곳은 평소에 열어두는 곳이 아닌데 멀리서 왔으니 보여드리지요." 무슨 일인가 싶어 사내를 따라 문을 들어섰다. 놀랍게도 박물관 같은 전시공간이었다. 이것저것 추억의 생활도구들을 모았는데 한눈에 금세 친근감이 들었다. 오래된 풍금하며, 네 발 달린 여닫이 텔레비전하며, 녹슨 다리미, 교복 입을 때의 가방, 재봉틀, 똥장군, 지게, '공상'으로 불렀던 탈곡기 등 추억의 물건들을 죄다 이곳에 모아 놓았다. 이쯤 되니 이곳을 만든 장본인이 어떤 사람인가 사뭇 궁금해진다. 이곳의 주인인 사내는 서재환(57) 관장이다.
농부네 텃밭 도서관, 마음껏 뛰어놀다서 관장이 처음 도서관을 연 것은 3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마을에서 도서관으로 운영하다 10년 전쯤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지금의 전시공간까지 도서관으로 쓰였을 만큼 규모가 커서 보유하고 있던 책이 3만여 권에 달했는데 계속 줄어들었단다.
마을에서 운영할 때는 면소재지 학교 앞에 있기도 하고 도서관이 활성화되어 각종 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선 책 외에는 특별하게 문화놀이가 없으니 도서관이 각광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시골에서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던 경운기 가득 책을 싣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독서를 권장하기도 했다.
이곳의 주인장인 서 관장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문화를 강조했다.
"여기까지 와서 책만 보고 가면 그게 무슨 제대로 된 도서관 여행이겠소. 책이 있는 도서관이라고 해서 기차 타고 도시락 싸서 유치원에서 많이들 오는데 대개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책만 보게 하고 돌아가는 선생님들이 있어요. 요즘같이 정보와 책이 넘치는 시대에 이런 시골까지 와서 책만 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뛰어놀아야죠. 저기 배도 저어보고 마당에서 뛰어놀고 우물에도 가보고 풀도 만져보고 하면서 글을 써야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겠어요."꽁지를 단단히 묶은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올라간 그는 강단진 인상이었다. 체육복에 털신을 신은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띤 그의 얼굴엔 어떤 결기 혹은 다부짐이 엿보였다.
그의 말은 최초의 생태주의자, 환경론자로 불리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자연관과 너무나 흡사했다.
'라코타 족 인디언들에게는 모든 생명체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오직 모습만 우리와 다를 뿐이었다. 모든 존재들 속에 지혜가 전수되어 왔다.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었으며, 그 속의 책들이란 돌과 나뭇잎, 실개천, 새와 짐승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지의 성난 바람과 부드러운 축복을 나눠 가졌다. 자연의 학생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배웠으며,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었다.'서 관장에게 있어 도서관이란 이미 자연 그 자체였다. 자연이라는 도서관 안의 '돌과 나뭇잎, 실개천, 새와 짐승들'이 그에게는 책이었다. 그의 도서관에는 원두막과 식물원·연못·텃밭 등이 있어 아이들이 오면 언제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늘은 카페 회원들이 모여 김장을 담그는 날. 서울, 목포, 진도, 마산, 진주 등 전국에서 회원들이 모였단다. 몇 포기를 담그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이 제각기다. 어떤 이는 200포기, 어떤 이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500포기라 했고, 또 다른 이는 뻥 치지 말라며 300포기가 맞다고 했다. 어느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어 멍 때리고 있었더니 모두 한바탕 유쾌하게 웃어 젖혔다.
"저 경운기 서울 갔다 온 경운깁니다."연못가의 경운기를 신기해하자 농장의 젊은 분이 말했다. 서울까지 가는데 1주일이 결렸단다.
"그때가 2007년이었지요. 소나무도 베어내고… 마을 산에 공장이 들어선다고 했는데 정체를 알 수 없었지, 우리는 알고 있었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 일로 서 관장은 서울에 갔었다, 억울한 심정을 알리기 위해 경운기 가득 책을 싣고 1주일 꼬박 걸려 서울에 갔었다. 4~5년 싸워서 막아냈지만 그때의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다. 서 관장은 끝내 그때의 싸움을 말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여행자도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오지게 사는 촌놈, 경운기 몰고 서울 가다1987년부터 경운기 짐칸에 책꽂이를 얹어 만든 '경운기 도서관'을 끌고 그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았다. 그의 경운기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를 듣고 집에서, 마을에서, 학교에서 사람들은 책을 빌리곤 했다.
그러던 그가 2007년 11월에는 광양을 출발하여 순천, 임실, 전주, 대전, 청주, 천안, 오산, 수원, 안산을 거쳐 서울 홍익대까지 경운기를 몰고 갔다. 가는 길에 도착하는 곳마다 '경운기 도서관'을 열고 책 교환행사를 가졌다. 그런 후 대구와 부산을 거쳐 다시 광양으로 돌아왔단다.
그가 이렇게 500km가 넘는 서울까지 경운기를 끌고 간 이유는 마을에 폐타이어 소각로 제조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아이들의 쉼터가 망가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볼 수만은 없어서였다. 공장이 들어서는 걸 막기 위해 문화행사도 하고 천막농성도 하고 행정기관에 수없이 항의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누군가 크게 다치지 않기를 바랐던 그는 결국 결심했다. 이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공장대체부지 기금 마련을 위해 천리 길 서울까지 경운기를 몰고 가기로.
난로 뚜껑이 열리자 잠시 어색했던 침묵이 깨졌다. 서 관장이 군고구마를 내어왔다. 작업장 안 난로에 넣어 두었던 군고구마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고구마 껍질을 벗겨내는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소매를 걷어 김장김치 하나 뚝 떼어서 돌돌 말아먹으니 그만이다. 이 모양을 보고 강아지도 꼬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뛰어든다.
농장에는 우물이 있다. 수도만 틀면 물이 나오는 걸 보며 자란 아이들에게 물을 얻는데도 두레박으로 약간의 수고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그 물맛이 더욱 달다는 것을 깨우치는 듯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웃집 처마에는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미련한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갑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세상을 일구어나가는 당신을 우리는 뒷골목 선지식이라고 부릅니다.' 도서관 한 구석 서 관장에게 주어진 감사패에 적힌 문구가 선연하게 들어온다. 이곳… 적어도 여행자에겐 그랬다. 비록 거창하고 세련되지는 않은, 소박하고 투박한 텃밭 공간이지만 세상 어디보다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작지만 큰 공간 '농부네 텃밭 도서관'은 진상역에서 1km 떨어진 시골마을에 있다.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청도마을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코레일과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