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혼자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일까?' 하는. 어떤 설문 조사에 이 질문이 들어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난 이렇게 난데없는 질문을 떠올리기도 한다. 모르긴 몰라도 세대별로 거의 엇비슷하게 '바로 우리요!' 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최근 몇 년 사이,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모든 사람이 모두가 비슷하게 '힘들다, 못 살겠다' 하고 아우성치는 나라가 돼버렸지 않은가.
사실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일은 가장 힘든 일이다. 이제 다섯 살 된 필자의 둘째 아들 '똥준이'도 '힘들다'와 같은 삭막한(?) 말이 입에 붙은 지 오래다. 녀석은 배가 고파도 '힘들다', 만지지 말란 휴대전화를 만지고 싶을 때도 '힘들다' 하고 말한다. 이부자리를 깔았는데도 잠이 안 와서 뒹구는 녀석에게 '이제 자자' 하고 말해도 녀석은 '힘들어, 힘들어'를 연발한다.
이건 기본적으로 부모인 나와 내 아내의 책임이겠지만, 그래도 어째 좀 심하다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의 우리 둘째 녀석을 힘들게 하는 게 배고픔과 휴대전화와 수면 취하기만의 문제 때문이겠는가. 녀석은 맞벌이하는 우리 부부 아래서 제 누이와 함께 새벽밥 먹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야 하는 처지다. 각각 학교와 병원인, 우리 부부의 일터에는 (다른 대다수 직장도 마찬가지겠지만) 탁아 시설이 없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출근은 8시 이전까지 해야 한다. 그러니 녀석의 그 처지를 우리 부부의 그악스러운 욕심 탓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는 굳이 이렇게 스스로를 발명하면서, 이 나라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힘듦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실상 살아가는 일이 힘든 것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누가 뭐라 해도,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 것 같다.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교사인 나는 중고등학생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전망과 무관하게 현재를 좀먹듯이 살아간다. 그 이유는? 여러 내외적인 조건과 환경 탓에 자기 주도적인 사색과 성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비주체의 삶을 산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조건과 환경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그 많은 부분을 이 아이들의 '부모'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부모 또한 결코 쉬운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 실상 저자들은 나와 달리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픈 사람들'을 '대한민국 부모'로 규정한다. 이 책은, 그리고 이 책에 대한 서평인 이 글은, 바로 이들에 대한 애증의 보고서다.
'옜다 점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점수와 성적만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생각하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내보이는 태도를 냉소적으로 빗댄 말이다. 실제로 "너 몇 등까지 성적을 올리면 스마트폰 사 줄게' 하는 식으로 점수나 성적을 놓고 자식과 거래하는 부모들이 많다. 이때 아이들은 말한다. '옜다 점수! 이거 먹고 떨어져라.'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의 동기가 점수와 성적과 상급 학교 진학 문제 등에 국한할 때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일탈한다. 이때 무기력과 반항은 가장 전형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옛다 점수!'는 이것들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어느 날 갑자기 아이들이 부모 앞에서 표변할 때('난 공부에는 정말 관심이 없었어요' 하며 본래의 자기 모습을 보일 때) 그 부모들의 상실감이나 배신감(?)은 그 어디에도 견줄 데가 없을 정도로 클 것이기 때문이다.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 시대, 자식이 '보험' 구실을 하지 않으면?생각해 보라. 흔한 말로 멀쩡하게 '성적 잘 받아오던'(!) 아이가 더 이상 성적 쌓는 공부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고 빈둥대는 상황을 대한민국의 어떤 부모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겠는가. 그 부모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좌절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그렇게 좌절하면서도 상황의 본질과 핵심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정녕, 도대체, 대한민국 부모의 무엇이 문제인가?
교실에서, 또는 수업 시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많은 교사가 애먼 아이들을 미워하고 탓한다. 예전 아이들은 이러지 않았는데, 지금 아이들은 틀려먹었다고 '옛날 타령'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 모든 말들에 나는 침묵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애들 탓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이 사회의 탓은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러니 대체 무슨 낯으로 애들을 탓하겠는가.
대한민국 부모의 문제도 바로 이런 데 있지 않을까? 자식들에게 과거의 부모는 과연 천하에 둘도 없는 모범생들이다. 성실과 정직은 그들의 표본이다. 그들은 혜안과 사려 깊은 독심술로 자식의 마음을 훤히 꿰뚫는 예언가이기도 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이 엄마, 아빠는 모두 알고 있어.' 그러고선 말한다. '자, 진심을 말해 봐'라고. 이미 자식은 자신의 진심을 모두 말한 후임에도 말이다.
지금의 그들은 한 달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는다. 그들의 뜨거운 취미는 일일 드라마와 스포츠 중계 시청이다. '이 나라에선 돈이 최고야. 그러니 돈 잘 버는 직장 얻어야 해' 하며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자신들이 벌거벗은 욕망 덩어리임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모두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 거야'라며 사뭇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거라. 책 보거라' 하고 다그친다. 끈적이는 욕망이 그 말들의 밑바닥에 꿈틀거리는 걸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혹은 알고도 모른 체 하며 말한다. 지금의 그들은 뻔뻔스럽기 그지없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불안 사회에서, 자식들은 유일무이한 '보험' 같은 존재라는 해석이 있다. 일면 그럴 듯한 풀이다. 한 끼 먹을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부모들이 왜 그렇게 많은 아이를 낳는가? 그 많은 자식 중의 하나가 '대박'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로또 보험'과 같은 존재여서가 아니겠는가.
실상 중산층 부모는 자식이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들이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in 서울 대학'에 목을 매는 까닭이다. 저소득층 부모는 자식이 그들 자신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이 걱정이다. 그래서 교육에 다걸기(올인) 한다. 없는 살림에 아빠는 야간 대리 운전을 하고, 엄마는 노래방 도우미를 하면서 자식 사교육비를 버는 부모에 관한 뉴스가 심심찮게 사회면을 장식하기도 하는 나라가 이 나라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미래 보장 보험을 드는 마음으로 자식에게 '투자하는' 이런 행태는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자식이 '보험'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상 그런 분위기는 이미 여기저기서 폭넓게 감지되고 있지 않은가. 어려운 현실을 핑계로 부모의 '투자'는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부모를 위한) '혜택 보장'은커녕 '원금 회수'조차도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는 자식들을 과연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이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 시대에 말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이가 '애어른'을 들먹이면서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이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지금은 자식으로부터의 부모 독립 만세 운동을 펼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다. 자식들을 향한 대한민국 부모의 새로운 독립 선언이 절실한 시간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와 자식이 공멸하는 무서운 세상이 찾아온다.
덧붙이는 글 | 이승욱·신희경·김은산 지음, <대한민국 부모>, 문학동네, 2012, 값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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