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삼킨 보아뱀'누구나 이 구절을 듣는다면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를 떠올릴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린 시절 <어린왕자>를 읽고 그다지 재미있지도 않았으며, 저자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어떻게 모자 모양의 그림을 보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필자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어린 왕자의 가면> 저자 김상태는 책의 여는 글에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태클을 날린다.
그런데 이 모자 그림을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순수하지 못한 어른으로 낙인찍힌다. 그런데 확언하건데, 이 그림을 처음부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인식하는 어린아이는 세상에 한 명도 없다. 따라서 그 취지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주고 싶어도 어딘가 불편하다. 그럼에도 이것을 단지 동화적 상징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어린 왕자의 가면>은 저자 김상태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쓰여진 가면을 벗기고 그 맨 얼굴을 드러내는 일찍이 보지 못한 시도를 하고 있다. '뭐 동화의 설정이니 그럴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생각한다. 그 순수하디 순수한 어린 왕자에게 흠집을 내려 하는 시도에 조건반사적으로 반감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선은 차분하게 가면 속을 들여다보고 나서 판단하는 것도 늦지는 않으리라.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생텍쥐베리의 삶을 통해 <어린 왕자>에 담겨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부분이다. 생텍쥐페리는 1900년에 백작 신분인 귀족 아버지와 역시 귀족 가문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1904년에 아버지가 괴한의 습격으로 사망하는데 가장을 잃자 혼자서 생활을 꾸리기 힘들었던 생텍쥐페리의 어머니는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생트로페 근처에 있는 샤를 드 콩스콜롱브의 라몰성으로 이사를 갔다. 샤를 드 콩스콜롱브는 생텍쥐페리의 외할아버지다. 1907년에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만 이번에는 생텍쥐페리의 종조모인 트리코 백작부인의 성으로 이사를 간다. 열네 살 소년이 될 때까지 생텍쥐페리는 이렇듯 커다란 귀족의 성채에서 성장한다.
친지들의 보살핌 속에 자란 생텍쥐페리는 자유분방을 넘어 버릇없이 자랐다. 생텍쥐페리는 예수회 소속의 규율이 엄격한 학교에 입학했는데 제멋대로 자란 탓에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전학을 다니다 스위스 프리부르의 빌라 생 장에 등록한다. 이곳은 할증료를 내면 독방을 내주는 곳이었다. 생텍쥐페리는 이 사실을 알고 가난한 어머니를 졸라 끝내 독방을 썼다. 바로 이 방에서 그는 문학에 눈뜨게 된다. 혼자 독방에서 공상을 탐닉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독서 능력은 늘어갔지만, 더불어 고독과 더욱 친해진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군에 입대해서도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부대 근처에 방을 얻어달라고 요구했다. 물론 군 생활 중이니 밤에는 병영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자유시간만이라도 혼자 책을 읽고 공상에 빠질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며 어머니를 졸랐다. 수입이 변변치 못해 돈을 빌려 아들을 위해 헌신을 다했던 어머니의 과도한 애정이 결국 아들을 고독에 빠뜨린 것이다. 사실 가난한 어머니에게는 이 아파트의 임대료가 아주 버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술 더 떠 엄청난 돈을 요구한다. 당시 스트라스부르 비행장은 민간 항공사와 공용으로 사용했는데, 동부항공사라는 회사가 관광비행을 영업하고 있었다. 그는 이 회사에서 비행기 조종을 연습하고자 어머니에게 큰돈을 부탁했던 것이다. 생텍쥐페리에게 지극정성인 어머니도 처음엔 망설였지만, 결국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만다.
성을 떠나 세상으로 나왔지만 생텍쥐페리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상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 자신만의 고립된 독방이나 아파트와 그 바깥의 세상이다. 이것은 고립된 어린 왕자의 소혹성과 그 밖의 다른 이상한 소혹성 및 불모의 땅 지구 사이의 분열을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고립된 독방과 소혹성에서 생텍쥐페리와 어린 왕자는 늙지도 변하지도 않는 왕자다. 반대로 바깥세상인 다른 소혹성과 지구는 그들이 이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공간이다. 자신의 방과 소혹성에서 왕자인 생텍쥐페리는 바깥세상에서는 그저 왕자병 환자일 뿐이다.
생텍쥐페리는 자유주의와 인본주의, 그리고 좌익과 공산주의를 싫어했다고 알려져 있다. 저자 김상태는 그 이유를 생텍쥐페리의 귀족이라는 출신 성분, 그리고 그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외부세계는 왕자나 귀족과는 무관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 그의 성장과정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생텍쥐페리는 몰락한 귀족이라는 계급성에 충실한 사고방식과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텍쥐페리의 성장과정을 통해 어린 왕자의 행동패턴을 바라보면 기묘하고 신비로운 느낌의 가면은 벗겨지고 몰락 귀족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소혹성에서 꽃과 어린 왕자의 만남을 다룬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며 저자 김상태는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얘기한다.
'이렇게 말해보겠다. 아주 지랄을 치고 있다고.'그 무슨 은유 같은 고상한 생각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 그 장면을 읽어내면 정말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살롱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질펀한 연애행각과 밀고 당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린 왕자는 단지 꽃이 너무 예뻐서 반했고 꽃은 자기의 미모를 이용해 갖은 교태와 앙탈을 부리며 어린 왕자를 조종한다. 어린 왕자는 꽃의 그런 속셈을 알면서도 단지 예쁘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그야말로 살롱을 드나드는 몰락 귀족의 모습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어린 왕자 본문에도 나오지만 어린 왕자가 소혹성을 떠난 이유는 어이없게도 단지 꽃과 말썽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우와 어린 왕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 속에 나오는 그 유명한 '길들인다'라는 구절에서도 저자 김상태는 가면을 벗겨내고 본질로 파고든다. 어린 왕자는 수많은 소혹성을 평범한 꽃들은 놔두고 유독 특별한 하나의 꽃만을 정성으로 길들인다. 그 이유는 다음의 어린 왕자의 발언에서 나오듯이 너무나 단순하다. "당신은 정말 아름답군요." 사람들은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에서 길들인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사실 어린 왕자는 아무나 길들이는 것이 아니다. 길들여졌기 때문에 예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예쁘고 특별하기 때문에 어린 왕자가 길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왕자를 읽은 사람들은 왜 여우를 길들였냐고 물을 것이다. 저자 김상태는 아이의 눈으로 단순하게 텍스트 그대로 읽으면 답이 나온다고 말한다. 바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먼저 길들여 달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글과 문장, 그리고 책은 저자의 삶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 김상태는 생텍쥐페리의 삶을 통해 어린 왕자의 가면을 벗겨내고 그 안에서 몰락 귀족의 반동성, 그리고 배척과 추방, 더 나아가 제국주의의 흔적을 발견한다. 물론 이 서평만으로는 그런 해석이 과도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필자도 <어린 왕자의 가면> 초반부를 읽어나갈 때만해도 너무 과도한 해석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면 저자 김상태의 탁월한 글솜씨와 분석에 놀랄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대단한 글쟁이를 발견했다. 끝까지 읽으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것을 보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