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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곰세(고갯마루에 선 곰 세마리)는 청소년을 키우는 세 명의 엄마들입니다. 고갯마루에서 우리는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자리, 누군가에게 물 한모금 건네고 서로 길을 물어 보며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자리가 되고자 합니다. '고곰세의 좌충우돌 인터뷰'는 청소년을 키우면서 교육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심한 40대 엄마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학력에 상관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20대 청년과 대학, 꿈과 일에 대해서 나눈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기사 보강 : 25일 오후 6시 10분]

부산노리단 퍼포머 박태주
 부산노리단 퍼포머 박태주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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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노리단의 퍼포머 박태주(30),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이주민을 위한 NGO활동, 자기나라로 돌아간 친구를 만나기 위해 떠난 여행 그리고 돌아와 사회적기업인 생태주의 퍼포먼스 그룹 '노리단'에서 한 활동들. 그 몇 줄의 문장만으로도 거죽만 청춘이 아닌 속까지 청춘인 그만의 20대 이야기가 궁금해 2012년 6월 19일, 서울에서 부산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었다.

소박하지만 소신 있는 그와 인터뷰는 내 속에 숨어있던 편견 그리고 불안과 마주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지금도 그 시간은 아직 내안에서 완성되지 못한 진행형이지만 이 글에 담겨진 청년 박태주의 삶을 통해 나와 같은 누군가도 자기 속에 숨겨진 편견과 불안을 발견하고 당당하게 마주하길 바래본다.

그는 2008년 25살에 서울노리단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다. 뭔 뜻이 있어 시작한 것도, 공채를 보고 들어온 것도 아니다. 노리단을 안 건 친구 집에서 우연히 만난 김종휘 단장을 통해서였다. 노리단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은 받았지만 처음엔 이름도 이상해 3개월 동안 고사했다. 그러다 우연히 '일하며 논다 배운다'라는 노리단에 관한 책을 보고 확 끌려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 부산노리단 공연팀에 있고, 공연 관련 사업을 진행하거나 기획하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원래는 서울노리단에 있었는데 부산노리단의 더 많은 가능성을 보고 2012년 3월에 옮겼어요. 전 노리단이 창단된 후에 들어갔거든요. 근데 부산노리단은 창단하는 시점이라 제가 경험하지 못한 게 많았어요.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도 들고, 창업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도 배우고 느낄 수 있었어요."

인터뷰한다고 해서 아침부터 머리 깎고, 말고 나왔다며 쑥스러운 듯 크게 웃는 그를 본다. 매듭 발찌, 팔찌에 피어싱 그리고 머리도 염색해 홍대클럽에서 노래하는 인디밴드 같다. 옷, 가방, 신발 등 눈에 한번 들어오면 다 사고 싶어 저축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그의 소비성향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정관념이 깨져 웃음이 계속 나왔다.

패션과 헤어에 관한 일을 해도, 일인자는 아니어도 이인자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소비하길 좋아한다는 그가 재생, 재활용으로 사회를 디자인하는 노리단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걸 보면서 노리단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저도 공연을 하니까 외모에 신경써야 하는 연예인이에요.(다 같이 크게 웃고) 실제로 공연을 나가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요. 사람들 미소를 보면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면서 공연하는 거 자체가 즐거워져요.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요. 전 사람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아야 성장을 해요. 사람들이 주는 힘은 참 커요. 저에겐 그래요.

저도 사람한테 스트레스 받지요. 하지만 힘을 더 많이 받으니까, 스트레스는 금방 풀려요. 노리단이어서 가능한지도 모르죠.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곳은 별로 없을 거예요. 아부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자기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곳 말이죠. 그냥 다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고 이름이나 직급이 아니라 닉네임을 부르고 남녀노소 상관없이 말을 다 놔요. 그러니까 대표님한테도 쉽게 가서 의견을 말할 수 있죠. 처음엔 어색하지만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고 보다 솔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킬 건 지킵니다."

대학을 버리고 시작한 NGO 활동

NGO 활동의 시작은 참 단순했다. 2002년 고3 때, 그는 TV에서 이주민들을 찾아가는 <아시아 아시아>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곳이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이주민 지원단체 '아시아의 친구들'이다. 사실 처음엔 수능을 앞두고 해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보통 고3이면 대학을 가기 위해 하던 봉사활동도 접고 안 하던 공부도 할 때인데, 갑자기 그의 학교생활이 궁금해졌다.

"그냥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학교생활은 잘 하지만 성적은 좀 안 좋은 아이였어요. 별 꿈도 없었고, 생각도 없이 그냥 학교 다녔어요. 3학년 때도 친구들하고 PC방에 가서 게임도 많이 했고. PC방 가려고 조퇴도 했어요. 선생님은 내가 수능을 잘 봐서 공부 열심히 한 줄 알아요. 대학은 합격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대학을 가서 무엇을 하며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고 맘먹고 대학 입학을 안 했어요. 그리고 바로 NGO 활동을 했죠.

'아시아의 친구들' 대표님께서 바람을 넣긴 했는데, 나도 하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아버지 반대가 심했지만 어머니는 이해를 해주는 편이라 다행이었어요. 내가 어렸을 때 어떤 스님이 나를 보고 '저 아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라' 했나 봐요. 어머니는 그 말을 굳게 믿고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스님이 고맙죠. NGO 활동 내내 아버지는 다른 거 할 생각 없느냐 그러고,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그러지 말라고 말리셨어요."

아무리 좋아하던 일도 처음엔 누구나 힘든데. 그도 일 시작하고 5~6개월 정도 됐을 때, 더 이상 일 못하겠다고 도망을 한 번 쳤다고 한다.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사람들이 계속 밀어붙이기만 하니 너무 힘들어서 말이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하루 만에 생각을 접고 다시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그만두고 다시 새롭게 시작해도 되는 나이인데, 포기가 안 되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주민 친구들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내가 흔히 말하는 '루저' 같았어요. 한편으론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에 빠지기도 했고. 그리고 보편적으로 말하는 그런 진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별로하지 않는 일을 택했기 때문에 살아남아야겠다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밖에는 없었어요."

이주민과 함께한 이야기를 들으며 사실 속으로 많이 놀랐다. 교통사고를 크게 당한 어린 방글라데시 친구와 쉼터에서 3개월 동안 같이 지내면서 재활을 도와준 적이 있다는 이야기부터 학교 친구들보다는 이주민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편하고 좋았다는 이야기 등, "이 일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이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어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주민 친구들과 함께하는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전생의 연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서로 너무 낯선 사람들이다. 스스로 부딪치고 견디는 갈등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경찰이었고, 보수신문을 보는 가정 속에서 살았으니, 이 일은 나의 편견을 깨는 일이었어요. 충격도 많이 받았고. 하지만 편견을 깨는 과정이 나는 너무 좋았어요. 스스로 고민도 많이 했어요. 제일 큰 갈등은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행동한 것이 거부감과 거리감만 두게 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자연스럽게 풀렸어요. 이 친구들이 어느 순간 함께 하는 대상이 된 거죠."

대학도 가지 않고 20살에 NGO 활동을 시작했는데, 스스로 밥벌이는 했을까. 하지만 부모에게 손 내밀면서 일한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나 같으면 안쓰러워 용돈이라도 몰래 더 쥐여줬을 것 같은데 말이다. 20살 이후엔 부모님께 손 내밀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의 말에 월급은 받았냐고 물어보았다. 처음 20~30만 원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60만 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교통비 하기도 빠듯한 금액으로 용케도 살아냈구나 싶었다. 어느 날은 차비가 없어 어머니한테 만 원을 빌리면서 야단맞기도 했지만 말이다.

"꼭 필요한 용돈은 줬는데 나머지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했어요. 청소를 한다든가, 그런 식으로. 그것도 안 되면 알바도 했어요. 부모님이 카페를 하셨는데, 방학 때 알바해서 돈을 받기도 했고, 사실 '삥땅'도 했죠. 학원 등록한다고 하고 그 돈을 썼어요. 두 달 하다가 찔려서 못했지만."

이주민 친구를 찾아 무작정 떠난 인도 여행

"친구들이 강제추방을 많이 당했어요. 그렇게 추방을 당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선 어떻게 살고 있을까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여행을 시작했죠. '아시아의 친구들'에서 3년 3개월 정도 활동을 하고 무작정 떠났어요."

인도 뭄바이, 그가 머리털 나고 처음 나가본 외국이었다. 새벽인데도 공항에 걸인들이 손 벌리고 있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고 한다. 호텔도 칸막이만 쳐져 있다 보니 별 소리가 다 들리고 무서워서 잠도 안 자고 바로 기차 타고 캘커타로 떠났다. 그의 여행은 이렇게 궁금증과 두려움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박봉인 그의 월급으로 여행경비는 어떻게 마련했을까.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두 탕 세 탕 하면서 몇 개월 동안 모아서 떠났어요. 200만 원 조금 안되게 모아 비행기 표 끊고 떠나서 처음엔 5~6개월 정도 있다가 중간에 돈이 떨어져서 부모님께 돈 부쳐달라고 전화도 했지만, 일단은 돌아와서 또 돈 벌어서 다시 나가 10개월 정도 있었어요."

그는 네팔, 인도, 방글라데시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주변을 여행하면서 좋은 인연도 많이 만들었다. 인도에 '다람살라'라고,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곳에 한국식당이 있는데, 그곳에서 밥 먹다가 티베트 어린이를 위한 탁아소에서 2007년 자원 활동도 했다. 그때 그를 따르던 1살짜리 아기 이름이 '따시'다. 12시에 밥 먹으라고 다른 사람이 부르면 오지 않다가 그가 "따시 맘마"라고 부르면 혼자 보행기를 타고 막 달려왔단다. 정도 많이 들어서, 아이 이름을 따 그의 예명도 '따시'라고 정했다.

하지만 여행이 항상 좋은 일만 있었을까. 궁금하다고 시작한 여행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도 후회스러운 일도 곤란한 일도 용기가 필요한 순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뭐 하는 것에는 겁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닌지. 뭐든 해볼까 하는 마음이 쉽게 먹어졌어요. 남들이 겁이 없다, 편견이 없다, 그러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런 거 같아요. 거리낌 없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뭐든 했어요. 두렵고 곤란한 일도 마찬가지예요."

지금도, 앞으로도 '가볍지만 무거운' 삶을

부산노리단 작업 공간에서. 재활용 재생 악기와 공연에 대해 들었다.
 부산노리단 작업 공간에서. 재활용 재생 악기와 공연에 대해 들었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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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헤어졌지만 2년 넘게 사귄 여자 친구도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이 일정한 일이 아니다보니 그런 문제들이 쌓여 헤어졌다고 한다.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은 '일은 좋은데, 막상 결혼하려고 하니까 걸리는 것이 많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기존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들과 다른 생활패턴을 만들어가며 사는 사람들이다 보니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부모인 기성세대와 부딪쳐야 하는 결혼에 대해선 더욱 그렇지 않을까.

"부모님하고 결혼 이야긴 하지 않아요. 결혼도 그렇고, 관계 안에서 그들의 기대에 나를 맞추느냐,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느냐 선택을 해야 한다면 결론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나한테 좋아요. 가족도 마찬가지예요. 가족보다는 개인으로 먼저 다가와요. 어머니도 엄마로서도 좋지만 개인 한 사람으로서 더 좋고요, 아버지는 아버지로서는 좋아하지만 한 사람으로는 지금까진 좀 힘들어요."

돈도 마찬가지다. 경제력은 사실 결혼이나 사람의 능력을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런 평가나 기준에 맞추며 살지 않겠다고 해도 적은 월급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소비에 익숙한 사회에 살면서는 더욱 힘들지 않을까.

"처음 노리단에 왔을 때는 최저임금 70~75만 원이었고 지금은 150만 원이예요. 소비라는 게 얼마를 벌든 그것에 맞추어 소비하는 것 같아요. 내가 카드를 처음 만들었을 때 막 쓰고는 그 뒤엔 감당이 안 되서 고생한 적이 있지만 오래 가진 않았어요. 더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저축이 안 될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크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본주의에서 소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 체제 안에서 부족함, 불편함을 즐기며 살기 위해선 혼자선 너무 힘들다. 이럴 때 함께 나누고 지켜나갈 수 있는 연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노리단의 박태주씨처럼 말이다.

NGO 활동을 할 때 공부가 하고 싶어 방통대 일본어학과를 한 학기 다닌 적이 있다. 하지만 삶에서 배우는 공부가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학벌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은 언제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학력차별이나 갈등보다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20살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런 활동을 하는 게 약간 이슈가 되어 인터뷰도 많이 했다.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행을 가기 위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학력차별을 의식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환경이 열등감보다는 본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만들어준 건 아닐까 싶다.

"고3 때, 그때 겁을 많이 먹었어요. 만약 내가 대학에 붙지 않으면 어떻게 취직을 하고 살아갈까. 그때 고민을 많이 했지, 막상 사회에 나오니까, 문제되지 않았어요. 물론 내가 학력과 무관한 일을 하긴 하지만 생각과 다를게 별로 없어요. 부산노리단을 하면서 더 확고하게 든 생각이 있는데, 어디 정해진 곳에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만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벌면서 내가 원하는 또 다른 걸 할 수 있는 게 더 좋다는 거예요. 공연 말고 다른 걸 하고 싶다 그러면 실제로 제가 원하는 다른 일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그의 포인트는 오늘 그리고 사람

그는 앞으로도 노리단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익숙해지면 스스로 자신이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에 편해지거나 익숙해지는 걸 경계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고 한다. 그때그때 오늘을 잘 살았으면 내일도 하고 싶은 거고, 오늘이 안 좋으면 내일은 재미있게 살아보려 노력할 것이고. 그는 힘들 뿐이지 불행하다는 생각은 안 한다. 지금도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다 해보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사람이죠, 인적재산! 나는 어디를 가든 친구가 있고, 잘 공간이 있어요. 전 그런 게 너무 좋아요. 내가 필요하면 도움도 받을 수 있고, 내가 노리단에 들어 온 것도 우연히 친구 집에서 단장님을 만났기 때문이잖아요. 사람의 힘은 무시할 수 없어요."

그는 질문을 하면 "그죠", "그러게요" 하고 장단을 맞추며 신나게 이야기를 한다. 새로운 건 뭐든 기대가 되고 재미있다며, 익숙해지는 게 가장 재미없는 일이라고 유쾌하게 말하는 모습에 나 또한 "그죠", "그러게요" 하며 장단을 맞춰주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단 대학은 나오고 저러면 좋겠다'로 바뀌는 내 마음의 양면성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20살부터 부모한테 손 한 번 내밀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뜻을 관철하며 살아온 그다. 나이 먹은 것이 뭐 대단한 자랑이라고 그런 그에게 이야기 중간중간 나이 들면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고 말하는 나를 떠올려본다. 사실 혼자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당당하게 꾸린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자신이 특별히 잘나서라기보다는 주위에서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아주면 그것이 굉장한 시너지가 된다는 걸 그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나이를 들먹거리며 잠깐이라도 초를 치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은 게 현실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만큼은 어느 누가 딴죽을 걸겠는가. 하여튼 정해진 삶이 아닌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박태주씨 같은 사람을 볼 때, 걱정과 의심의 시선이 아니라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으로 넘쳐나길 열렬히 기대해본다.


태그:#고곰세, #부산노리단, #박태주,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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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그 생각을 실천하고 싶어 신청했습니다. 관심분야: 교육,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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