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천 따라 걷기 3구간인 옛 남광주역 터에서 푸른길 공원으로 접어들면 곧바로 남광교를 만난다. 폐선이 된 철로를 품은 이 다리를 지나면 한 음악가의 거리전시관이 눈에 들어온다.
동판으로 만든 거리전시관 방명록엔 유독 한자로 이름을 쓴 이들이 많다. 중국인들이다. 사실 광주는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관광지는 아니다. 그런데도 해마다 많은 중국인들이 일부러 광주를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거리전시관의 정식 명칭은 '정율성 거리전시관'. 새주소로 등록된 거리 이름도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다. 전시관 초입엔 한 젊은 음악가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가 바로 정율성이다.
정율성(鄭律成 1914~1976)은 한국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한 음악가다. 중국사회과학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중국 인구 가운데 3억명 이상이 그에 대해 알고 있으며, 10억명 이상이 그가 작곡한 노래를 최소 한 곡 이상 알고 있다고 한다.
평생 360곡을 작곡한 그의 대표작으로는 <팔로군 행진곡> <옌안송 延安頌> <연수요 延水謠> 등이 있다. 그가 1939년 작곡한 <팔로군가>는 중국 정부에 의해 <중국인민해방군가>로 공식지정되어 1992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식곡으로 연주되었다. <옌안송>은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며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 중 하나다. <연수요>는 중국의 전통 민가의 원형을 이끌어내 전투적 서정성을 겸비한 곡이라며 극찬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율성은 행진곡과 송가, 민가 분야에서 등 중국 현대음악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중국인이 뽑은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3대 현대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 추앙하고 있다.
이렇듯 중국에서 뜨거운 추앙을 받는 정율성을 기리는 거리전시관이 광주에 있는 까닭은 그가 광주 태생이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정율성로 16-7이 그의 생가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낡고 오래된 그의 생가를 방문하려고 해마다 많은 수의 중국인이 일부러 광주를 찾고 있는 것이다.
광주광역시는 2005년부터 해마다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개최해 동아시아 음악사에 남긴 그의 족적을 기리고 있다. 또 생가 주변 거리에 길이 233미터의 길거리 전시관을 만들어 그의 이력과 악보 동판, 그의 대표곡을 들을 수 있는 영상물을 준비해놓고 있다.
하지만 그를 기리는 일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KBS 스페셜은 한중수교 2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 '천재음악가'로 칭송받는 정율성을 주제로 한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방영 역시 숱한 논란 끝에 가까스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런데 방송통신심의위 여당추천 위원들은 "정율성은 6·25에 참전한 공산주의자로 KBS가 정율성 다큐멘터리를 3차례 내보낸 것은 부적절하다"며 제재 필요성을 주장했다. 정율성이 "국익을 해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방송통신심의위는 이 다큐멘터리가 공정성을 위반했는지 방송관련 학회에 의견을 물은 뒤 제재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중국에선 영웅으로 추앙받는 음악가가 한국에선 "국익을 해치는 빨갱이"로 이지메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정율성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리고 항일운동가였다. 1933년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니던 정율성은 독립운동을 하던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해 5월 8일 난징(南京)에 있던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했던 그를 동지들은 주말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때 상하이에서 정율성에게 음악을 가르친 이가 러시아 출신의 크릴로바 교수. 정율성의 천재성을 알아본 크릴로바 교수는 그에게 이탈리아 유학을 권유한다. 정율성은 거부했다. 이유는 한 가지, 항일 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크릴로바 교수는 젊은 조선인 항일운동가가 한 달 생활비와 맞먹는 수업료를 걱정하자 수업료 대신 수업 때마다 생화를 사오도록 했다. 매주 생화 한 송이로 수업료를 대신하는 각별한 배려를 베푼 것이다.
해방이 되자 정율성은 고향이 있는 남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당시 한반도 이남이 미 군정 치하에 있어 위험하다며 그를 평양으로 보냈다. 그는 북한에 머물며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하는 등 음악활동을 했다. 그리고 저우언라이 (周恩來) 총리가 부르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1966년까지 중국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중앙악단 등에서 활동했다.
그의 중국에서의 활동이력이 1966년에서 멈춘 것은 문화대혁명기에 그가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다. 정율성은 이때 "이것이 무슨 문화 대혁명이냐, 이것은 문화 대학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의 표현대로 '문화 대학대'였던 문화대혁명이 1976년 종결됐다. 그는 바로 명예회복을 이뤘으나 고혈압으로 숨지고 만다.
정율성 거리전시관은 233m. 그 짧은 전시관이 길이보다 심한 역사의 질곡이 여전히 한 천재음악가의 자유를 옥죄고 있다. 처음 정율성 다큐멘터리를 제작·방영한다고 했을 때 KBS 사측이 이를 반대하자 KBS 스페셜 PD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세력의 80%이상이 사회주의 계열이었음은 이미 공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사회주의 전력을 문제 삼아 독립운동가들을 다룰 수 없다면 우리는 실존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80%를 역사 속에서 지워야 한다. 이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덧붙이는 글 | 광주천 따라 걷기 3-2 코스는 '남광교-정율성 거리전시관-정율성 생가-양림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