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 끌고 다닐 때보다 허가제인 지금이 좋지. 두 말 하면 잔소리야."
경기도 고양시 화정역 부근에서 국화빵을 파는 합법 노점상 이씨의 말이다. 고양시는 2008년 불법 노점상 근절 대책으로 생계형 노점을 합법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저소득층에 한해 허가지역 내에서 도로점용료를 내고 노점상을 운영할 수 있게 했다.
이 합법노점을 고양시에서는 '길벗가게'라 부른다. '길가에 있는 정겨운 벗'이라는 뜻으로 시민공모를 거쳐 결정됐다. 28일 오후 고양시 화정역과 마두역 부근 길벗가게를 찾았다.
"허가제로 바뀌고나서 조용하고 깨끗해졌다" 화정역 2번 출구로 나가자 떡볶이를 파는 길벗가게 2개소가 보였다. 2번 출구에서 나와 왼쪽으로 돌아 앞으로 걸으면 화정문화의 거리와 화정중앙공원이 나오는데, 공원이 끝나는 도로까지 길벗가게가 듬성듬성 13개 가량 있었다. 대개 역 출입구, 문화의 거리 입구, 중앙공원 입구 옆에 있다. 모두 상가와 떨어진 곳이다.
마두역 근처에도 길벗가게가 8개소 있었다. 떡볶이 가게(4곳), 야채 가게(2곳), 양말 가게(1곳), 등이었다. 이 길벗가게들도 역 출입구와 공원입구 옆에 있지만, 상가와의 거리는 화정역 부근보다 가까웠다. 그래도 비슷한 품목을 파는 상점과 마주보고 있는 가게는 없었다. 서울 노량진역 건너편 인도에 있는 컵밥 노점이 상가와 마주보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과는 다른 광경이다. 지난 23일 서울 동작구청은 컵밥 노점을 철거해 논란이 됐다.
길벗가게 주변은 매우 깨끗하다. 노점판매대도 포장마차와는 달랐다. 화정역, 마두역에 있는 길벗가게들은 모두 붙박이형 박스 노점판매대에서 장사를 한다. 신문을 팔거나 교통카드를 충전해주는 도로가판대와 비슷했다. 이 판매대 겉면에는 투명천막을 쳐 바람을 막았다. 천막 겉면에 해당 길벗가게가 파는 물건을 홍보하는 장식은 없었다. 노량진 컵밥 노점들이 제각기 다른 천막에, 색색깔의 홍보물을 비닐 밖에 붙여 경쟁하는 풍경과 달랐다.
화정역 부근에서 10여 년간 도로가판대를 운영해 온 안천호씨는 "노점상허가제로 바뀌고 나서 이 주변이 다 깨끗하고 조용해졌다"고 말했다. 안씨는 "예전에는 노점들끼리 자리싸움하느라 시끄럽고, 상가 상인들은 노점 때문에 장사 안 된다고 시끄럽고, 공무원들은 민원 많이 들어온다고 시끄럽고, 용역들은 노점 철거하느라 시끄러웠다"며 "지금은 싸우는 일이 없으니 시민들이 불편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고양시내 노점상들이 길벗가게로 재단장한 것은 2008년 9월. 고양시는 조례를 개정해 허가를 받고 도로사용료를 내면 노점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도로사용료는 매년 1제곱미터당 가게가 설치된 토지 가격의 0.025%가 부과된다. 일산동구청 도시미관과 김종호 주임은 "한 가게당 매년 적게는 25만원에서 많게는 48만원 가량 낸다"고 말했다.
이후 고양시는 노점을 운영할 시 지켜야할 사항들을 '고양시 노점판매대 운영규정'으로 마련했다. 노점판매대 디자인이나 판매 품목 제한, 상인 의무 등이 이 운영규정에 담겨있다. 노점판매대 겉면 천막에 홍보물이나 포스터를 붙이지 않는 것도 이 운영규정 때문이다.
고양시는 노점허가제를 시행하면서 노점허용구역에서만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허용구역은 화정역, 마두역 등 역세권 주변에 통행에 불편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정했다. 이후 각 구역에서 노점을 운영할 수 있는 '허가' 신청을 받았다.
상인 선정기준은 ▲2008년 전부터 고양시에서 노점을 운영했고 ▲고양시에 거주하며 ▲가족의 총재산이 1억 원 미만인 저소득층 가구로 제한했다. 저소득층의 자립방안으로 '생계형 노점'만 합법화하는 게 정책 목적이다.
2009년까지 3차에 걸쳐 운영자를 뽑아 노점 총 208개소가 허가를 받았다. 이 중 61개소가 개인사유나 규정 위반을 이유로 허가가 취소돼 현재는 147개소가 운영 중이다. 28일 <오마이뉴스>는 서울시 종로구의 '노점상 특화거리'인 다문화 거리에 조성 당시 노점이 155개였지만, 현재 54개만 남아있다고 보도했다. (관련 기사 -
"무슨 놈의 특화거리? 우린 굶어죽게 생겼어">
고양시의 노점허가제가 서울시 종로구의 노점특화사업보다 실효성이 있는 셈이다. 실제로 기자가 28일 오후 3시 이후 화정역, 마두역 부근 길벗가게를 찾았을 때, 각 길벗가게 상인을 인터뷰하는 10분간 적으면 2명 많으면 6명의 손님이 각 노점을 다녀갔다.
고양시는 종로구와 달리 허가받은 노점들이 기존에 장사하던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 노점허용구역을 지정했다. 이 구역은 화정역, 마두역, 일산 라페스타 등 고양시내에서도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다. 이 과정에서 상가와의 마찰을 풀기 위해 난립해 있던 노점상 수를 제한하고, 상가와 마주보고 있지 않도록 배치에도 신경을 썼다.
고양시 일산동구 길벗가게 봉사모임 '길벗봉사회' 정준봉 회장은 "노점은 사람 발길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며 "한 곳에 몰아넣으면 다같이 고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마두역 근처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A씨는 "도로이용료 몇 푼 내는 사람들이 건물세 내는 나보다 장사가 더 잘 되어 보이면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며 "그래도 구청 관리 아래 허가받고 점검도 받으면서 장사하는 것이고, 정책을 마련할 때 사회적 합의가 된 것이니 함께 살아야 하지 않나"라 말했다.
고양시에 노점허가제가 도입되고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노점상인들이다. 정준봉 길벗봉사회 회장은 "허가를 받고, 도로점용료를 내고 장사하니 시민들에게 떳떳하다"고 말했다. 길벗가게 상인들은 2010년부터 각 구별로 복지관과 연계해 비정기적 봉사활동을 한다. 2012년에는 고양 꽃박람회 안내도우미 봉사와 관광홍보도우미 봉사를 하기도 했다.
다른 지자체에서 관심 보이는 '길벗가게' 고양시의 노점허가제는 다른 지자체의 불법노점 단속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노점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노점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양시청 건설과 정영안 팀장은 "정책이 시행된 이후 수원시, 인천시, 광명시, 부천시 등 지자체에서 방문하거나 문의해 온적이 많다"며 "노점상 대책은 무조건 몰아내기만 하면 안된다. 살길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고양시 정책에도 한계는 있다. 노점상허가제 자체가 저소득층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상인이 직접 정해진 규격으로 노점판매대를 제작·설치해야 한다. 이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적게는 350만 원에서 500만 원까지 든다. 스낵류 판매를 위한 조리기구 설치비용은 별도다. 노점 수가 정해져 있으니 노점을 하다 못하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재 길벗가게 상인들에게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노점허용 기간이다. 고양시는 정책 시행 당시 도로 위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하는 '도로점용허가'를 1년 기한으로 최장 5년까지만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008년 허가를 받은 상인들은 올해 허가 기한이 만료되면 연장이 불가능하다.
이와 관련해 정영안 팀장은 "올해 8월에 처음 기한이 만료되는 상인들이 있다"며 "시청 차원에서 노점허가제를 어떻게 운영할지 내부방침을 세우는 중"이라 밝혔다. 정 팀장은 "기존 상인들의 연장운영이나 신규 상인 진입 등 노점허가제 전반에 대한 계획은 올해 상반기 중 정해질 것"이라 덧붙였다.
최근 서울 노원구청에서 '생계형 노점'을 보장하는 운영규정을 마련한 가운데, 노량진 컵밥 노점 철거 재집행 여부에 눈길이 쏠린다. 도로법 38조 1항에 따라 허가를 받지 않고 시설물을 설치하거나 변경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이다. 때문에 노점허가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지역의 노점상은 모두 불법이다.
노량진 컵밥 노점도 동작구에 관련규정이 없기에 불법노점이다. 때문에 동작구청은 노량진 컵밥 노점 관련 민원이 증가하자 23일 단속과 철거에 나섰다. 동작구청은 24일 노량진 컵밥 노점상들에게 31일까지 자진철거를 요청한 상태다.
<관련기사 :
상가 vs 노점 '컵밥전쟁'... '노량진 명물'의 운명은? >
정준봉 회장은 "노량진 노점 철거 이후 사진을 보니 노점상들이 다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더라"며 "노점상들은 구청에서 대형화분 등을 설치하면 장사를 아예 못하니까 몸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5년 전엔 비슷한 처지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생계형 노점상은 대부분 찬바람 맞으며 하루 14시간씩 서서 일한다. 몸이 성한데가 없지만 장사를 해야 먹고 산다"며 "노량진도 무조건적인 철거가 아니라 노점상인과 시민, 상가상인이 함께 살 수 있는 대책을 마련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박선희 기자는 <오마이뉴스> 17기 인턴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