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1년에 태어나 1481년에 타계한 정극인은 과거에도 급제했고, 정언·삼품교관 등 높은 벼슬도 지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이 정극인을 기억하는 것은 그를 정치가나 행정가로 여겨서가 아니다. 그가 매우 유명한 역사의 인물인 된 데에는 다른 까닭이 있다. 그가 역사에 '이름 석 자'를 뚜렷하게 남긴 것은 <상춘곡>을 지은 덕분이다.
'紅塵(홍진)에 뭇친분네 이내 生涯(생애) 엇더한고'로 시작되는 상춘곡은 줄곧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왔다. 물론 가사의 효시라는 문학사적 의의 덕분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 때문에 교과서에 수록된 것은 아니다. <상춘곡>은 그 스스로도 뛰어난 문학성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걸작이다.
게다가 <상춘곡>은 한글의 우수성을 증언하는 자료로 인정되기도 한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상춘곡만큼 뛰어난 창작품이 탄생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글이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는 데 뛰어난 문자라는 증거인 것이다.
최초의 가사 <상춘곡> 계승해 가사문학 발전시킨 송순1493년에 태어나 1583년에 죽은 송순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도 정극인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 역시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대사헌·우참찬 등에 이르렀다. 하지만 송순 역시 역사에 '이름 두 자'를 확실하게 새긴 것은 이런저런 벼슬을 역임해서가 아니라 <면앙정가>를 지은 덕분이다. 그는 <면앙정가>를 지음으로써 정극인의 문학세계를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아 국문학사에 유방백세의 명망을 얻었다.
송순은 가사만이 아니라 명작 시조도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시조는 사화에서 유래했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1498)와 갑자사화(1504),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에 이어 명종 때에도 사화가 일어났다. 1545년의 을사사화. 이때 척신 윤형원이 많은 선비들을 죽였다. 그 참상을 지켜보던 송순은 지식인으로서 크나큰 울분을 느껴 시조로 그 심정을 읊조렸다.
곳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허 마라바에 흩날리니 곳의 탓 아니로다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슴하리오산문으로 풀어서 읽으며 대략 '꽃이 떨어진다고 새들아, 슬퍼하지 마라. 바람이 불면 꽃은 떨어지는 법이다. 꽃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꽃을 시샘하여 휘젓고 사라지는 봄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냐. 바람이 불고, 봄이 사라지면 꽃은 지는 법이니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법칙 아니랴. 그 모든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리라' 정도의 뜻이다.
선비 살상하는 척신을 봄바람에 견줘 풍류흔히들 시조의 주제는 종장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시조의 주제는 꽃을 떨어뜨린 후 사라져가는 봄을 탓하지 말라는 것이 된다. 꽃과 새, 바람과 봄이 노래의 주요 제재이니 사람으로 환치한다면 아마도 이 노래는 '세월이 흐르면 사람이 늙고, 또 자연사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니 너무 애달파하지 말라' 정도의 뜻일 것이다.
하지만 선비들의 무참한 죽음을 본 뒤 노래한 시조를 단순 달관의 경지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이니, 이 노래야말로 주제가 종장 아닌 곳에 있는 작품의 예외가 아닐까. '권력 말기가 되면 애꿎은 선비들을 죽이는 것이 잘못된 정치의 본질이니 원망하면 무엇하랴?' 그렇게 헤아리면 노래는 달관은커녕 오히려 비인간적이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는 이 시조의 주제를 중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에 날려 꽃이 떨어지는 것은 꽃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선비들의 죽음은 그들이 반사회적 문제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무지하고 포악한 정권의 횡포 때문이다.
이런 해석은 송순의 문집 <면앙집>에 남아 있는 기록 덕분에 가능하다. 이 시조에 감동한 어떤 기생이 고위관료들이 있는 자리에서 '곳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허 마라'라고 노래했다. 진복창이 기생을 심문했다. '누군가를 비방하는 이 노래의 작자가 누구냐'라고. 기생은 처음 보는 손님에게서 들었을 뿐이라고 딱 잡아뗐다. 기록은 이 시조가 농도 짙은 사회시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이비를 비판한 <자상특사황국옥당화가>논어에 보면 공자가 '나는 자색을 싫어한다. 자색은 붉은색을 흐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제자에게 들려주는 답의 일부다.
이 대목은 문학적 비유이지만 공자는 같은 내용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기도 한다. '나는 향원(대략 '유지'의 뜻)을 싫어한다. 모든 이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자는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들에게서는 착하다는 평판을 듣고, 나쁜 자들로부터는 좋지 않다고 비난받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좋은 사람이다.'
송순의 시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다. 공자의 '사이비' 비판을 연상시키는 이 노래는 명종이 궁궐 정원에 피어있는 가을 국화의 아름다움에 취해 황국화 한 송이를 꺾어 옥당관(玉堂官)에게 주며 노래를 지으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옥당관이 쩔쩔매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마침 숙직 당번으로 근무하고 사람이 송순이었다.
황국화를 바라보는 송순의 뇌리에는 '가을바람 불고 희끗희끗 서리가 내리는 날에 갓 피어난 황국화를 임금께서 은반에 담아 선비들이 공부하는 옥당으로 보내셨네. 어째서 임금께서는 황국화를 다른 곳 아닌 옥당으로 보내셨을꼬. 도리 같은 사이비들아, 꽃인 양 나서지 말라. 국화 같은 지조의 선비를 찾는 임금의 뜻을 모르겠느냐'라는 생각이 흘렀다. 그 생각을 그는 3장 6구 12음보로 표현했다.
풍상(風霜)이 섯거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黃菊花)를은반(銀盤)에 것거 다마 옥당(玉堂)으로 보내실샤도리(桃李)야 곳인 양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옥당관은 송순의 노래를 명종께 바쳤다. 명종이 보니 너무나 뛰어난 노래였다. 그래서 누가 지었느냐고 물었다. 옥당관은 송순이 지었다고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자신의 심정을 정확히 꿰뚫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수사가 절묘한 시조를 순식간에 창작한 송순에게 큰 상을 내렸다. 많은 선비와 관료들이 그를 부러워했음이야 말할 것도 없다.
비판적 지식인으로 살아야 후학의 존경 받는다송순은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77세까지 벼슬을 했다. 타계한 때는 향년 91세였다. 고령에는 고향 담양에 자신의 아호가 되는 면앙정(俛仰亭)이라는 정자를 짓고서 거기서 살았다. 면앙정에는 언제나 벗들과 후학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겼다.
면앙정에서는 송순의 과거 급제 60주년을 기리는 회방연(回榜宴)이 열리기도 했다. 그러므로 회방연이 열렸을 때 그의 나이는 81세였다. 왕도 이 소식을 듣고는 꽃과 술을 보내주면서 처음 과거에 급제한 것과 동일하게 행사를 열라고 지시했다. 이 잔치에 정철 등 당대의 전국 명사들이 모였다. 현지의 관찰사 등이 대거 참석한 것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밤이 깊어 모두들 술에 만취했고, 이윽고 송순이 침소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이때 정철이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우리가 가마를 메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그래서 정철 등 내로라하는 나라 안 고관대작·풍류가객들이 가마꾼이 됐다. 이 일화는 송순이 선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거유(巨儒)였음을 말해주는 증언으로 읽힌다.
입신양명 원하는 이들, 평상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헌법재판관을 지낸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와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전후해 호된 국민적 질타를 받았다. 한 사람은 청문회 이후 두문불출하며 사태의 흐름을 관망하고 있다는 풍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억울하다'는 요지의 발언 후 후보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두 후보자는 송순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급제하고 높은 벼슬을 역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후학들은 그 두 사람을 위해 송순처럼 회방연을 열어 축하하고 스스로 가마를 메는 일을 자임하지 않았을까.
일부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김용준씨에 이어 국무총리직에 적합하다고 거론되는 이들 중 상당수가 거론 자체를 사양하고 있단다. 사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스스로를 '황국' 아닌 '도리'로 판단해 사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평범한 국민을 덜 실망시키는 '차악'이라 할 것이다.
앞으로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도 이어질 것이다. 또, 새로운 국무총리 후보자와 (어떤 경로로든 이동흡씨가 후보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경우)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도 열릴 것이다. 이동흡·김용준씨의 사례에서 확인되듯 후보자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자상특사황국옥당가>의 참뜻을 깊이 생각해봐야 마땅하다. 스스로 따져봐서 '도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지면 제안이 들어와도 사양해야 옳다는 말이다. 송순이 이미 500년도 더 이전에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도리야, 꽃인 양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