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4일 오후 5시 20분]삼한사온을 잊어버린 겨울 한파 속에 잠시나마 포근한 날씨를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대문 앞에서 이제나 저제나 주인과 함께 달리기를 기다렸던 애마 자전거를 타고 지난 주말 (2월 2일) 파주에 있는 공릉천을 향해 달려갔다. 공릉천은 경의선 전철을 타고 금릉역에 내리면 가깝다. 금릉역에서 공릉천, 얼마 후 만나는 파주 삼릉까지 동네에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가 묻혀있다는 능(陵)이 많은가 보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명당 동네이라는 게 미루어 짐작이 간다.
공릉천가에는 주민들만 아는 봉일천 오일장이라는 작은 장터도 있다. 이 장터를 알게 된 건 정영신 작가의 사진집 <한국의 장터>를 읽고서인데, 경기도 파주에 여러 오일장이 서고 있는 사진들을 보고 놀라웠다. 이미 전국의 소읍까지 들어선 대형 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들 세상에서 이런 오일장터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게 고맙고 대견하기까지 했다.
자전거도로보다 좋은 공릉천 둑방길
차가운 겨울 풍경은 공릉천도 마찬가지, 주말이지만 공릉천변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는 사람이 없어 한적하기만 했다. 다른 계절엔 북적였을 사람들 대신 겨울 철새 까만 오리들이 목청도 좋게 '꽥꽥' 거리며 공릉천의 주인 행세를 한다. 천변엔 이 추위에도 용케 남아있는 갈대와 억새들이 손 흔들며 반겨주어 덜 쓸쓸하게 공릉천을 달려갔다.
공릉천이 다른 하천들보다 풋풋하고 정답게 느껴진 건 둑방길이 남아 있어서였다. 천변에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잘 나 있지만, 둑방길은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왼쪽의 동네 풍경과 오른쪽의 공릉천을 조망하며 달리는 즐거움을 선사해 주니 자전거 여행이 더욱 즐겁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크고 하얀 볏단들이 바둑알처럼 놓여있어 재미있고, 주변엔 새로 생긴 아파트와 연립주택같은 옛 주택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정감 있게 펼쳐진다. 산책하는 몇 몇 동네 주민들도 둑방길을 걷는데 아마 요즘 만나기 힘든 흙길이어서 그런 것 같다. 푹신푹신한 흙길은 애마 자전거의 바퀴를 뭉근히 붙잡고서 빨리 가서 뭐하냐고 경치구경하며 천천히 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소박하고 애틋한 봉일천 오일장
매달 2일, 7일 날 공릉천을 달린다면 조리읍 봉일천리를 들러야 한다. 봉일천 시장 주변 골목에서 오일장이 열리기 때문. 조리읍에 들어서자마자 E마트의 기업형 슈퍼마켓이 나타났다. 작은 동네지만 오일장이 열릴 정도로 주민들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동네에 아파트들이 많이 생겨서인지 기업형 슈퍼마켓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봉일천 시장과 오일장의 존재가 걱정될 정도다.
장터라는 공간이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그 지역의 생활문화와 공동체를 꽃피우는 무대요, 사랑방임을 생각해볼 때 대형 마트의 탐욕은 지역사회와 경제를 서서히 파괴하는 범죄임에 다름없다. 전국에 흩어진 이런 장터들은 우리가 소중하게 지키고 보존해야할 생활문화 박물관임을 정부당국과 기업의 수장들이 이젠 깨달을 때도 됐는데….
오일장터의 분위기와 닮은 정겨운 '자매신발' 가게와 삼색등이 회전하는 '마을 이발관'을 지나면 아담한 봉일천 시장이 자전거 여행자를 반긴다. 걱정대로 시장의 크기는 줄고 줄어들어 작기만 하고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을 오일장터는 대로변에서는 보이지 않는 골목안쪽에서 숨어 있는 듯이 열리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된 가래떡 구이의 구수한 연기와 냄새가 여행자를 골목 시장통으로 이끈다.
소박하지만 애틋한 마음이 드는 봉일천 오일장. 예전엔 이 자리가 소를 사고파는 우시장이 열렸던 자리라고 곶감을 파는 어느 상인분이 알려주셨다. 시장 주변의 봉일천 초교, 봉일천 중고등학교, 봉일천 우체국, 봉일천 성당 등을 보니 동네 이름인 파주시 조리읍 보다는 봉일천리가 더 많이 쓰이고 원래의 동네 이름 같다.
이불을 덮은 사각 우리 안에서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안쓰럽고 귀여운 강아지들, '셈베이'라 불리는 옛 과자, 손님의 주문을 받고 열심히 생선의 포를 떠는 상인들, 어릴 적 참 많이 먹었던 튀각 가게…. 작디작은 오일장에 있을 건 다 있다. 추운 겨울날이지만 다행히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어 오일장이 훨씬 활기 있어 보였다. 직접 기르고 수확한 채소들을 작은 그릇들에 담아 파는 아주머니는 이래 뵈도 파주의 여러 장터에서 수십 년간 장사를 해 아들, 딸 다 키웠다고 자부심이 담긴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파주에서 열리는 오일장은 다섯 군데나 있다. 매 1일, 6일에 열리는 경의선 금촌역 앞 금촌장을 시작으로 문산역 앞 문산장(매 4일/9일), 공릉천을 따라 난 봉일천장(매 2일/7일), 법원읍 법원장(매 3일/8일), 임진강에서 가까운 적성면 적성장(매 5일/10일)이 열린다. 소읍과 장터를 좋아하는 여행자에겐 보물 같은 파주의 장날이겠다.
산책하기 좋은 녹색지대 파주 삼릉
공릉천 부근 지도를 보면 조리읍 봉일천리에 웬 녹색지대가 크게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파주 삼릉이다. 주말이지만 추운 겨울날이라 그런지 찾아오는 손님이 없다더니 정말 이 큰 녹색지대를 오롯이 혼자서 거닐게 되었다. 공릉, 순릉, 영릉이 있는 파주 삼릉은 세 분의 왕후와 영조의 맏아들로 겨우 10세에 세상을 뜬 진종이 묻혀있다. 공릉과 순릉에 묻힌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도 17세,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조선 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재로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어있다고 한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시대에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한 덕이다.
삼릉에 들어서면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살았다는 한옥 집 '재실'이 맞이한다. 아담한 마당을 마주하고 있는 작은 툇마루에 쉬어갈겸 앉으니 햇살이 얼굴을 어찌나 따사롭게 비추는지 하마터면 단잠에 빠질 뻔했다. 왕릉이라 양지바른 명당자리인 게 맞긴 맞나보다.
왕릉 앞에 서면 작은 정자각, 비각, 수라간 등의 처마 위에 작은 동물 같은 것들이 눈에 띈다. 알고보니 서유기의 주인공들이란다. 모양으로 보아 맨 앞은 삼장법사, 그 뒤는 손오공이다. 한껏 엄숙하고 경건하기만한 왕릉 분위기가 이 처마 위 익살스러운 잡상들로 인해 한결 부드러워졌다.
겨울날에도 독야청청한 소나무들도 좋고 왕릉사이 작은 개천가에 졸졸 흐르는 청명한 물소리를 따라 걷는 기분이 참 좋다. 왕릉마다 입구에 높이 서있는 붉은 홍살문을 시작으로 돌(박석)이 깔린 길이 제단과 무덤을 향해 길게 나있다. 왕릉에 올 적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이 돌길은 하나의 길 같지만 조상이 오가는 신도(神道)와 자손(임금)이 오가는 어도(御道)로 나뉘어 있다. 중국에는 여기에 황제가 오가는 황도(皇道)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삼릉의 제단길엔 신도와 어도의 구분이 잘 안되어 있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그래도 명색이 왕릉인데 이렇게 허술하게 길이 나있을까? 공릉을 나오다 왕릉을 깨끗하게 정비하는 일을 하시는 초로의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제단길이 생각나 혹시나 하고 여쭤보았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6.25 한국전쟁 때 사람들이 인근 장곡리에 피난을 많이 왔었는데 전쟁이 오래가면서 집을 짓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온돌방에 들어가는 구들장을 만들고자 삼릉에 있는 제단길의 돌들을 가져갔다는 거다. 박석으로 만든 평평한 돌들이 온돌의 구들장용으로 딱 맞았던 것. 후손들의 비극과 추위를 삼릉의 조상들도 이해하실 게다. 다음 주엔 이곳 삼릉 외에도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 제 16대 임금 인조가 묻혀있다는 파주 장릉에 가봐야겠다.
덧붙이는 글 | ㅇ 주요 자전거 여행 코스 ; 경의선 금릉역-공릉천-조리읍 봉일천 오일장-공릉천-파주삼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