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 보안사에 의해 압수된 '진실'아는 사람은 아는,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그러나 안다고 하는 사람도 잘 모르는 그리고 모른다고 하는 사람도 사실 다 알고 있는 그런 일이 있다. '고문' 문제다.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발생한 고문 문제에 관한 매우 의미 있는 도서가 재출판되었다. 재일동포 김병진씨가 최근 다시 펴낸 <보안사>(2013. 이매진)라는 책이다.
<보안사>는 저자가 1984년부터 1986년 사이 약 2년 동안 보안사에서 근무하면서 경험한 고문의 실상을 충격적으로 증언한 기록물이다. 저자 김병진씨는 1986년 보안사 근무를 마치자마자 탈출하듯 일본으로 돌아가 원고를 썼다고 한다. 그 원고는 1987년 일본 아사히 신문 논픽션부문 공모작에 당선되어 일본어로 출판되기도 했다.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내에서 출판(소나무 출판사)되었을 때는 당국에 의해 대부분 압수되었고, 곧 절판되어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이 책에 나온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의 진실이 하나둘씩 사실로 밝혀져 피해자들이 수십 년 만에 무죄판결을 연이어 받으면서 이 책의 내용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재일동포 3세인 저자는 1980년 일본에서 대학을 중퇴한 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유학을 왔다. 1983년경 같은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삼성연수원 일본어 강사로 일하던 중,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에 불법 연행되어 구금된 후 고문을 당하고 '공소 보류' 처분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제20조)과 '공소보류자 관찰규칙'에 의하면 '공소 보류' 처분은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에 대해 2년 동안 협조를 요구하고 보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보류자가 수사기관의 지시·요구에 불응할 경우에는 언제든지 보류 처분 취소와 재구속하여 불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처분에 따라 김병진씨는 그후 2년 동안 보안사에서 재일동포 간첩사건 수사의 통역과 번역 업무를 강제로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자가 보안사에서 근무한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보안사에서 일본 관련 간첩사건을 여러 차례 발표한 시기이다. 당시 보안사는 매년 80~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연행해 조사했다고 한다. 근년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재일동포 이종수, 허철중, 윤정헌, 조일지 씨 등이 모두 이즈음에 보안사에서 수사한 사람들이다.
이 책은 같은 시기 보안사에서 일어났던 재일동포 간첩조작의 전말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1984년 로마 교황 방한을 앞두고 보안사에서 가톨릭 사제를 대상으로 진행한 '평화공작', 기독교계를 대상으로 한 '거미줄 공작' 등 일반인이 보기에 국가기관이 자행했으리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자세히 드러나 있다.
국내 유일한 고문 관련 내부자 고발서지금까지 고문 문제에 대한 저술은 피해자의 피해 증언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워낙 고문이 지하 밀실에서 목격자 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입을 다무는 한 피해증언만 있고 통상 목격 진술이나 가해 진술은 없게 마련이다. 이 책의 저자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보안사 수사관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직접 목격한 당시 고문 장면을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보안사>는 국내 고문 관련 문헌자료 가운데 유일한 내부자 고발서이며, 과거 독재정권하에서 발생한 고문 폭력에 관한 사실 여부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증거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아가 이 책은 고문 폭력의 메커니즘과 가해자와 피해자의 심리상태 등을 이해할 수 있는 흔치 않은 1차 자료로서의 의미도 크다. 예를 들어 이 책에는 승진과 (수사)공작금 수령을 위해 혈안이 된 수사관들의 무차별적인 고문조작의 행태와 함께 이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으로 몰래 눈물을 흘리는 가해자의 모습도 나타나 있다.
초판본과 다른 점으로 2013년 재출판된 이 책에는 저자와 당시 보안사 수사관 추재엽(양천구청장)씨와의 질긴 악연이 일지 형식으로 추가되어 있다. 저자는 추재엽씨의 당시 고문가담 사실 여부를 두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
1988년 초판에서 "보안사를 조국의 땅에서 매장해버리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민족의 미래는 없다"고 했던 저자는 2013년 개정판 서문에서 "가해의 진실까지 밝히지 않으면 진정한 과거사 청산이 아니다"라며 "천인공노할 짓을 서슴지 않던 자가 훈장을 받고, 포상금을 나누고,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진급하고, 지금은 정년퇴직해 나라에서 주는 연금으로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데, 피해자와 그 가족은 인생이 파괴되고, 고문후유증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주위의 눈총까지 받으며 살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결코 과거사 청산을 말할 수 없다"고 한다.
1월 뇌출혈로 쓰러진 저자
지난 1월 9일 저자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 책의 복간을 불과 1주일 남겨둔, 추재엽씨와의 소송에서 이긴 바로 그날이었다.
1일 저자의 부인과 전화 통화한 내용에 따르면(현재 저자는 뇌출혈로 심각한 언어 후유장애를 겪고 있다), 1986년 일본에 돌아간 후 김병진씨의 가족은 보안사의 추적을 받으면서 한동안 어린 자식을 데리고 이리저리 숨어다녔고, 같은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들로부터도 '보안사 수사관'으로 고문조작에 참여했다는 비난과 협박을 받아왔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서 내쳐진 상황에서 심리적 충격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당시 다수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고문조작 사실을 밝히고 무죄판결을 받는 데 대해 저자는 이 책에서 "고마운 소식은 내가 책을 통해 밝히려 한 간첩조작 피해자 대부분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피해자들이 법원에 내 책을 증거물로 제출한 사실이었다, 물론 시간이 너무 늦었지만 그나마 내 고발이 나름대로 제 몫을 해내서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25년 만에 재출판된 이 책은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에게 묻고 있다. 우선, 고문을 통해 간첩을 조작해낸 일은 '애국'으로 포장될 수 없다. 공무원으로서 국가공권력을 남용하여 사욕을 추구함으로써 정당한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조장하고 혈세로 조성된 국가자원을 낭비했으며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준 행위를 '애국'이라 말한다면 가해자들은 국가를 두 번 배신하는 것이 된다. 가해자들에게 허용된 진정한 애국의 길은 다시는 고문조작이 없는 세상을 위해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다.
이 책은 동시대의 피해자들에게도 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 국가권력의 압도적 힘에 지배당해 온 피해자들에게는 자신과 주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심리적 상황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고 주체적인 삶을 구축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있다. 피해자 범주에 머물고 있는 의식과 행동을 극복하고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대자적 태도도 필요하다. 때로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방향을 잃어 사랑하는 가족 혹은 같은 피해자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아픔을 주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현재 저자 김병진씨는 다행히 큰 고비를 넘기고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일본 땅에서 외롭게 싸우며 어려운 치료과정을 앞두고 있는 이 가족분들에게 한국의 독자여러분들의 도움과 격려 말씀이 큰 힘이 된다. 아울러 일본 현지에 있는 가까운 피해자들의 격려도 구한다. 일본에 있는 김병진씨의 인터넷 메일 주소는
kilsori@gmail.com 이다.
* 김병진 선생의 쾌유와 건승을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 <보안사 - 어느 조작 간첩의 보안사 근무기> | 김병진 (지은이) | 이매진 | 2013년 1월
- 임채도 기자는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에서 고문피해자지원치유사업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