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로 추위가 닥치면 전쟁이 발생하는 비율이 증가합니다."데이비드 장 홍콩대 교수의 주장이다. 그의 분석을 보면 추위가 심할수록 전쟁도 많이 발생했다고 한다. 추위가 식량생산의 감소로 이어지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국가들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다.
불름버그 통신은 2011년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휩쓴 재스민 혁명도 기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010년의 이상기상이 세계적인 식량감산을 가져왔고 가격폭등이 일어난 것이 주원인이라는 것이다.
재스민 혁명이 일어난 나라들은 80% 이상의 국민이 하루에 1~3달러로 연명한다. 식량가격이 폭등하다 보니 굶어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면 민중들은 빵을 위해 일어선다.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1830년 폭동이나 프랑스 대혁명도 다 빵 때문이었다. '민중들에게는 이데올로기보다 빵이 더 절실하다'는 혁명가들의 말을 국가를 이끄는 리더들이 꼭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다.
기원전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노예와 농민들이 로마에 대항해 일어났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노예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로마가 강력해지면서 많은 전쟁을 통해 엄청난 노예를 로마로 끌고 왔다. 노예들은 대농장에서 포도, 올리브, 곡물 생산을 위해 죽어라 일해야 했다. 더 많은 농업생산을 위해 노예들은 혹사되었다. 쇠사슬에 묶여 쉴 새 없이 고된 일을 해야 했다. 인간이 아닌 동물로 대접받는 비참한 처지였다.
기원전 70년대 추위와 가뭄이 닥쳐왔다. 대농장의 수확물들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농장주였던 귀족들은 수확물의 벌충을 위해 노예들이 먹을 양식까지 닥닥 긁었다. 노예들은 먹고 살 것이 없었다.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로마에 대적할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73년 70명의 검투사들이 자유를 위해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한다. 검투사들은 무기를 쓸 수 있는 뛰어난 전사였다. 그들은 로마에 맞서 싸우다가 죽기로 각오한다. 역사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라고 불리는 노예해방전쟁이 막을 올린 것이다.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인근의 농장이나 목장에서 일하던 노예와 농민들이 그들에게 몰려와 합류했다. 순식간에 노예반란군의 숫자가 7만 명에 이르렀다. 그들의 삶이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증거다.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에 새로운 노예 도시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노예 군을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노예들은 프랑스나 독일, 동유럽에서 붙잡혀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알프스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음해 봄 노예해방군은 아드리아 해를 따라 알프스로 향했다. 7만 명의 대병력이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면서 알프스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예년보다 혹심한 추위로 산 아래까지 빙하가 내려오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렸다. 시칠리아까지 가서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당시 지중해에는 해적들이 많았으므로 그들과 결탁한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예해방군이 이탈리아 반도 남부까지 도달했을 때 시칠리아에는 이미 로마 군이 상륙해 있었다. 그들을 배로 태워 고향으로 보내주기로 했던 해적들도 배반을 했다.
어쩔 수 없이 기원전 71년 초 가을 노예해방군은 아플리아 평원에서 로마군과 결전을 벌였다. 유격전에서는 승리했으나 전면전에서는 로마의 우세한 병력에 당할 수가 없었다. 전사자를 뺀 6,000명의 사로잡힌 노예들은 카푸아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에 줄지어 십자가에 매달렸다.
만일 이 당시 소빙하기로 알프스 산맥에 빙하가 많지 않았다면 노예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고 스파르타쿠스는 역사에 승리한 장군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빙하기의 저주가 역사 최초의 노예해방전쟁에서 스파르타쿠스를 패배한 장군으로 기록하게 만들었다. 날씨가 역사를 바꾼 재미있는(?) 전쟁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