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브론 가는 길
점심을 먹고 우리는 헤브론으로 소풍을 간다. 유대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아브라함의 영묘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30㎞ 떨어져 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산길이고 해발이 높아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예루살렘의 해발이 754m라면, 헤브론의 해발은 930m이다. 우선 버스가 구시가지 남쪽과 시온산을 지나 예루살렘을 벗어난다.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에 이르는 길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족장의 길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다윗 같은 유대인 조상들이 이 길을 자주 다녔기 때문이다. 헤브론으로 가까이 가면서 구릉에 계단식 밭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밭에 포도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헤브론이 이스라엘의 포도 주산지라고 한다.
그런데 북쪽 사면 밭에는 눈이 쌓여 있다. 드물긴 하지만 겨울에 예루살렘과 헤브론 같은 고지대에는 가끔 눈이 내린다고 한다. 일주일 전쯤 눈이 왔는데, 그게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헤브론의 겨울은 12월부터 3월까지로 평균 기온이 6~8℃ 정도다. 그렇지만 최저기온은 영하 6~8℃까지 내려간다. 그러므로 눈이 올 수 있는 조건은 된다. 우리가 찾아가는 아브라함 영묘는 헤브론시 외곽 무슬림과 유대인 경계지역에 있다.
헤브론은 원래 요르단의 통치를 받는 무슬림 도시였다. 그런데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 땅이 되었다. 그 후 시 외곽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건설되었고, 500가구 이상이 이곳에 살고 있다. 그로 인해 무슬림과 유대인의 갈등이 심해졌다. 헤브론 가는 길 중간 중간 검문이 심하고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이곳의 긴장은 베들레헴보다 훨씬 심하다.
헤브론 동쪽 막벨라 동굴 위에 세워진 아브라함의 영묘
아브라함(Abraham)의 영묘에 이르니 이스라엘 군인들이 또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우리처럼 경직되어 있지 않고 자유로운 편이지만, 군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영묘는 교회 같기도 하고 모스크 같기도 한 건물 안에 만들어져 있다. 건물 앞에는 유대인들이 건물을 향해 경배를 하거나 기도를 올린다. 이 건물에는 아브라함 부부의 영묘만 있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Isaac) 부부, 손자인 야곱(Jacob) 부부의 영묘도 있다.
우리는 이제 건물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 쪽으로 간다. 가면서 보니 작은 동굴도 보이고, 그 옆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이스라엘 방위군이 주둔한다'는 안내문도 보인다. 입구에서 여군이 우리를 향해 싱긋 웃어준다. 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먼저 아브라함의 영묘가 나타난다. 영묘라고 해서 우리의 무덤을 생각하면 안 된다. 실내 공간에 관을 안치한 형태다.
그런데 관을 감싸고 있는 천이 어쩜 저렇게 깨끗할까?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고 창살을 통해 관찰할 수 밖에 없다. 아브라함의 영묘를 지나 반대편으로 가면 그의 아내 사라의 영묘가 나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두 영묘 사이가 무슬림 지역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유대인 뿐 아니라 무슬림의 조상이어서 공유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영묘를 보고, 돌아서 사라의 영묘로 갈 수 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과 무슬림의 공동 조상이지만 배가 다르다. 유대인은 첫 부인 사라(Sarah)의 자손이고, 무슬림은 하가르(Hagar)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성경 창세기 16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집트인 몸종인 하가르와의 사이에서 이스마엘(Ismael)을 낳는다. 그리고 나서 아브라함이 백 살 되던 해 사라를 통해 이삭(Isaac)을 낳는다. 자식들이 자라자 아브라함은 하가르에게 양식과 물을 주며 길을 떠나게 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스마엘이 큰 민족을 이루도록 도와 줄 것을 약속한다. (창세기 21장)
이처럼 하느님은 창세기 12, 15,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3가지 커다란 약속을 한다. 첫째 그의 자손들이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이다. 둘째 지구상의 모든 민족은 그를 통해 축복을 받을 것이다. 셋째 그가 지금 방랑하는 땅을 언젠가 그의 후손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방랑하는 땅은 이집트 국경의 작은 하천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넓은 땅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자손들 이야기
사라는 127년을 살고 헤브론 땅에서 죽었다. 이에 아브라함은 헤브론 동쪽의 밭과 막벨라(Machpela) 동굴을 사서 그곳에 사라를 묻었다. 그때까지 맘레(Mamre)라 불리던 이곳이 아브라함 일가의 묘지가 된 것이다. 그 후 아브라함이 늙어 더 이상 힘이 없어졌고, 이삭의 나이가 마흔이 되었으나 아직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인을 메소포타미아로 보내 며느리감을 찾았고, 레베카(Rebekka)라는 여인을 데려와 이삭과 결혼시켰다.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동굴에 안장하였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이삭이 가장이 되었고, 하느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에서 계속 살았다. 그런데 레베카가 20년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삭은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야훼에게 빈다. 야훼가 그의 기도를 들어줘 레베카는 쌍둥이를 배게 된다. 그 쌍둥이 중 형이 에사우(Esau)고 동생이 야곱(Jakob)이다.
형 에사우는 사냥을 좋아해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았고, 동생 야곱은 집안일을 좋아해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동생 야곱은 형 에사우로부터 장자상속권을 샀다. 야곱은 어머니의 권유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 외사촌인 레아(Lea)와 라헬(Rahel)을 만나게 된다. 레아는 큰 딸이고, 라헬은 작은 딸이다.
"레아는 부드러운 눈매를 하고 있었지만, 라헬은 몸매도 아름답고 용모도 예뻐서 야곱은 라헬을 더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는 7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해드릴 터이니 작은 딸 라헬을 달라고 청했다." (창세기 29장 17-18절)외삼촌의 계교로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게 되었고, 14년 동안 외삼촌과 함께 살았다. 그 사이 야곱은 레아와 라헬, 그들의 몸종을 통해 수많은 자식을 낳았다. 레아는 6남 1녀를 낳고, 라헬은 요셉이라는 단 하나의 아들을 낳았다. 야곱은 두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외삼촌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에서 형 에사우를 만난 야곱은 가나안 땅 베델에 자리 잡았다. 이곳은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가 묻힌 곳이다. 여기서 야곱은 하느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는다.
"너는 많이 낳아 번성하거라. 너에게서 한 민족이 아니 여러 민족이 모인 집단이 나리다. 네 후손 가운데서 왕들이 태어나리라.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었던 이 땅을 내가 너에게 준다. 또한 너의 뒤를 이을 후손에게 준다." (창세기 35장 11~12절)
그들이 베델을 떠나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 라헬이 아들을 낳고 숨을 거두었다.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벤야민이라 짓고, 라헬을 에브랏으로 가는 길가에 묻고 비석을 세웠다. 에브랏이 지금의 베들레헴이다. 야곱은 마침내 아버지 이삭을 찾아 맘레로 간다. 맘레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살던 헤브론 땅이다. 이삭은 180세에 죽었고, 아버지 아브라함 곁에 안장되었다. 야곱에게는 모두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룬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이집트 땅 고센(Goschen) 지방에서 살았다. 야곱은 147년을 살았다. 그는 아들 요셉을 불러 자신이 죽거든 이집트 땅에 묻지 말고, 조상과 함께 잠들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죽을 날이 다가오자 열두 아들에게 축복과 유언을 내리고 숨을 거둔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나를 선조들 곁에 묻어 다오. 그 굴은 가나안 땅 맘레 앞 막벨라 밭에 있다. 그 동굴에는 아브라함 사라 두 분이 묻혀 있고, 이삭과 레베카 두 분도 묻혀 있다. 나도 레아를 거기에다 묻었다."(창세기 49장 29~31절) 야곱의 장례는 요셉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요셉은 이집트 식으로 40일 동안 아버지의 시신을 썩지 않게 만들고, 다른 아들과 함께 아버지의 시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동굴에 안장하였다, 그렇게 해서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레베카, 야곱과 레아의 무덤이 있게 된 것이다.
이삭과 레베카의 영묘는 무슬림 지역에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영묘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 비교적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에 야곱과 레아의 영묘가 있다. 이곳을 찾은 유대인들은 무덤 앞에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 책이 가득한 공간에서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공간에서는 선생과 학생들이 이곳을 찾아 체험학습을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표정에는 엄숙함 보다는 장난기가 서려 있다.
우리는 이삭과 레베카의 영묘로 가기 위해 건물을 나온다. 아브라함의 영묘와 야곱의 영묘는 한 건물의 이쪽과 저쪽에 있는데, 그 사이에 장벽이 쳐 있는 것이다. 이삭과 레베카의 영묘는 무슬림 구역에 있다. 건물을 나온 다음 무슬림 거주 지역을 지나 다시 건물의 다른 쪽 무슬림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유대인 구역과 무슬림 구역의 경계에는 이스라엘군이 지키고 있다. 그들 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들의 검문을 통과하고 무슬림 지역을 지나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이슬람 모스크가 있다. 무슬림 신자들이 미흐랍을 향해 엎드려 기도하는 게 보인다. 아 그런데 이곳에서는 신발을 벗게 하고, 여자들에게는 몸을 가리는 회색빛 긴 옷을 입힌다. 간이식 차도르라고 할까? 우리는 이삭과 레베카의 무덤을 향해 걸어간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아브라함과 사라의 묘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무슬림들의 조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삭과 레베카의 무덤은 무슬림 구역의 동쪽 벽에 양쪽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들의 무덤에 가려면 반드시 무슬림 구역을 지나가야 한다. 이삭과 레베카는 무슬림 구역에 포위된 양상이다. 이들 두 영묘는 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사각으로 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모습이다. 이곳을 찾는 유대인들은 보이질 않는다. 우리는 영묘를 살펴보고 또 무슬림 모스크의 내부도 살펴본다.
이곳에도 미흐랍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이맘의 설교대인 민바르도 보이고, 돔형 구조물도 보인다. 곳곳에 아랍어 문구가 보이는데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유감이다. 우리는 작은 돈을 기부하고 밖으로 나온다. 전반적으로 유대인 지역에 비해 좀 더 가난해 보이기 때문이다. 건물을 나오니 무슬림 아이들이 지도와 기념품을 팔려고 달려든다. 역시 이곳에서도 무슬림은 이류 시민이다. 나는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워 건물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건물 한쪽으로 장갑차가 보인다. 이곳은 아직도 긴장감이 도는 분쟁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