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부하에 죽임을 당하고, 측근끼리의 권력다툼으로 최고 권력이 몰락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역사는 수없는 가르침을 반복하건만, 권력은 그 가르침엔 눈 감은 듯, 안중에도 없는 것만 같다. 왕권이 무너지고 권력이 무너지는 데는, 외세의 침략보다는 내부의 적, 그것도 측근에 의해 망한다는 사실이다.
얼었던 대동강물도 풀린다는 우수를 하루 앞둔 17일. 입춘이 지나 봄기운이 돌 것 같건만, 차가운 기운은 성 안에 꽉 차 있음을 느낀다. 고려 18대 왕 의종이 폐위되고 유폐됐던 폐왕성. 지금은 '거제둔덕기성'이라 이름 고쳐 부르는 이 성은, 고려시대 무신정변으로 축출된 의종이 3년간 초라한 삶을 유지했던 산성이다.
의종은 1146년 인종이 죽자 즉위하고,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전횡과 반란, 묘청의 난 등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며, 왕권을 강화시켜 나간다. 이를 위해 무신들을 총애하고 친위군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즉위 초와는 달리, 말년에는 문신, 환관들과 어울려 유흥과 오락에 깊이 빠져들며,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무신들을 소외시켜 천대받게 만들면서 무신정변의 계기를 낳았고, 결국 왕권은 몰락하게 된다. 1170년 일어났던 일로,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돼 이 성에 유폐되고 만다. 이후 1173년 김보당 등 의종 복위 세력에 의해 경주로 모셔져 웅거하였으나, 의종이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의종은 등뼈가 꺾여지고 시체는 그대로 연못에 수장당하는 비참한 모습이었다. 왕의 나이 47세 때다.
비스듬한 언덕길을 잠시 오르자 성곽이 나타난다. 새로 쌓은 돌담은 성벽의 모습을 갖추었건만, 무너져 내린 채 쌓인 돌무덤은, 이곳이 성벽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성벽에 서서 내려다보는 둔덕골 풍경이 평화롭다. 멀리 거제도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거제 최고봉인 가라산과 노자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성벽 안쪽에는 물을 가두었던 집수지가 복원돼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07년 8월, 이곳 집수지를 발굴·복원하면서, 1천년 세월이 훨씬 넘었음에도, 거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돼 있었던 것. 바닥과 석축의 단면은 평평하고 매끄러운 돌로 쌓았고, 사이사이에는 황갈색 점토를 채워 물 빠짐 현상을 막았다.
물이 들어오는 곳과 빠져 나가는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 빗물을 저장하여 성내 용수를 공급하는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집수지는 성을 정비하면서 '연지'라고 부르는데, 북쪽으로는 4단, 동·서·남쪽으로는 3단으로 축조돼 있다. 연지의 지름은 4단이 12.8m(높이 0.8m), 3단이 9.9m(높이 1.0m), 2단이 8.3m, 1단이 6.6m로 규모다. 총 깊이는 약 3.5m.
집수지 안에서는 토기, 청자접시, 기와, 명문이 새겨진 청동그릇 파편, 화살촉, 구유, 멍에, 괭이, 목제망치 그리고 소뼈 등 수백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들은 7~15세기까지 사용됐던 것으로, 집수지의 사용과 폐기시기를 파악하는 동시, 당시 이곳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잘 닦여진 성곽 너머로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작은 섬과 섬 사이로는 통영 앞바다와 견내량으로 연결되는 긴 수로가 이어져 있다.
1592년(선조 25) 4월, 왜군은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전쟁 초기, 옥포·당포·당항포·율포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자, 왜군 장수 와키사카는 정예병력 등, 전선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한다. 장수 구키도 전선 42척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같은 해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한다.
이어 7일에는,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에게 왜선 70여척이 견내량에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 전법으로 왜선을 격멸한다. 진주성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로 부르는 한산도대첩의 기록이다.
아마도, 성웅 이순신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게다. 나아가 한산도대첩에 대해 모르는 이도 별로 없을 듯하다. 고려 의종이 폐위돼 생을 유지했던 성곽에서 보는, 조선의 땅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치열했던 한산도대첩의 바다. 성벽에 서서 축 늘어진 소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견내량. 시간은 초월했지만, 공간은 같음에 남다른 감회로 다가옴은 물론이니라. 견내량은 거제와 통영을 잇는 거제대교 아래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을 말한다. 길이는 약 3km, 폭은 180~400m 정도로 한산도대첩의 주요 배경이다.
성곽 북쪽 정상에 서니 올망졸망한 섬들이 눈앞으로 다가 서 있다. 바다는 멀리 고성 땅까지 이어진다. 성곽 길을 따라 한 시간여 편안한 걸음을 마쳤다. 성은 거제의 산과 통영의 섬과 고성의 바다를 품고 있다. 무너져 내려 제멋대로 포개진 돌은 숨겨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만 있다.
거제둔덕기성은 고려 의종이 폐위돼 유배했던 곳이라 폐왕성으로 불렀다. 사람들은 이 성을 의종이 폐위 당시 축조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지만, 7세기 신라시대 축조 수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문식 구조인 동문지와 삼국시대에 처음 쌓고, 고려시대에 보수된 성벽으로 축성법의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526m, 높이 4.8m로 성 안에는 여러 곳에 건물터와 연못 터가 남아 있다. 북쪽에는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냈던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의종이 배를 타고 건넜던 견내량 수로 변에는 아직도 '전하도목(殿下渡目)'이라는 불리는 지명이 있으며, '고려골'이라는 부르는 곳에는 고려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왕을 받들어 왔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지금도 둔덕면에 살고 있다.
신라시대 축조된 거제둔덕기성(사적 제509호, 2010년 8월 24일 지정)은 일부구간을 보수하였으며, 현재도 계속 복원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거제 둔덕면 청마기념관 입구 사거리에서 산성 쪽으로 차를 몰고 임도를 따라, 3.6km에 이르면 성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허물어진 성벽을 따라 걸으며 고려 의종의 역사를 더듬고, 동쪽 통영 앞바다를 보며 이순신의 영혼을 느끼는 역사기행. 어린아이와 함께 손잡고 성벽을 걸으며, 의종과 이순신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거제 둔덕면 청마기념관 입구 사거리(0.0km) ~ 거제둔덕기성 주차장(3.6km) ~ 거제시 사등면 거제대교입구 거제관광안내소(9.2km)
. 거제둔덕기성이 있는 우두봉에 가려면, 청마기념관 입구와 거제대교입구 거제관광안내소 어느 방향에서도 임도를 따라 승용차로 갈 수 있음.
. 인근 여행지 : 들머리인 거제 둔덕면 청마기념관 입구 사거리에서 450m 지점에 청마기념관과 청마생가가 있으며, 인근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식물원 ‘비원’이 있음. 거제관광안내소 바로 옆에는 오량성이 있음.
. 이 기사는 경남 거제지역 신문인 <거제타임즈>와 블로그 <경남이야기>, <안개 속에 산은 있었네>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