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의 퇴행
셋째의 출산이 임박하자 네 식구 중 그 행동거지가 가장 크게 변한 인물은 다름 아닌 둘째였다. 녀석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몇 달 전 이미 끊었던 행위들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꼭 엄마 젖을 먹어야겠다고 떼를 쓰고, 잘 자다가도 갑자기 일어나 엄마가 옆에 없으면 울어 젖히는 등, 한 마디로 퇴행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은 복잡다단했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만큼 신경이 날카로운 아내는(그리고 그 아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나는), 둘째가 울어 젖히고 땡깡을 부리면 우선 큰소리부터 치고 봤는데, 막상 둘째가 서럽게 세상 떠나가도록 울면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 이 녀석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할 것 같으니 불안하고 두려워서 이러는 것일 텐데.
돌이켜 보건대 둘째 산들이는 첫째 까꿍이에 비해 우리의 관심을 덜 받은 것이 분명했다. 첫째 때는 그 모든 것이 신기해서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의 대상이 되었지만, 둘째 때는 이미 육아의 모든 과정을 겪었던 바, 더 이상 이야기 거리가 안 되었다. 녀석들을 대상으로 찍은 사진만 보더라도 산들이의 사진은 까꿍이 사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런 녀석에게 첫째 누나보다 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누나 이후 단 하나의 아들로서 아빠의 '아덜'이 자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였는데, 이제는 '아덜'이 아닌 한낱 '둘째'가 되어버렸다. 위로는 누나에게 치이고 아래에서는 막내가 치고 들어와 자기 살길은 알아서 개척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첫째와 막내 프리미엄과 경쟁해야 하는 둘째의 숙명을 안게 된 산들이.
그러나 그렇다고 둘째의 땡깡을 마냥 다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막내가 태어나도 둘째가 막무가내로 엄마 젖을 먹게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는 아내의 출산 전 녀석의 행동거지를 바로잡을 생각에 좀 더 엄하게 대했고, 그 맥락에서 난 녀석의 허벅지가 시퍼렇게 피멍 들 정도로 때리기까지 했다. 둘째가 아무 이유 없이 누나를 때린 것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가슴이 쓰렸다. 어쨌든 말도 채 하지 못하는, 아직 모든 의사 표현을 "응, 응"으로 하는 자기 자식을 때리는데 어느 부모가 괜찮겠는가.
아가 어디 있어요?
이윽고 막내 복댕이 나오는 날. 첫째와 둘째는 예상 외로 눈앞의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듯 했다. 첫째 까꿍이는 숨넘어갈 듯 울어댔던 둘째 출산 때와 달리 막내 동생의 탄생 과정을 유심히 살폈는데, 아빠가 가끔 자신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리던 말을 이제는 확실히 이해한 듯 아가가 엄마 다리 사이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했고, 둘째는 그런 누나를 따라 신기한 듯 엄마와 새롭게 태어난 동생을 마냥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형과 누나에게 안긴 복댕이. 비록 나중에는 얼마나 힘들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삼남매가 그렇게 엉켜있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부모로서 왠지 모를 뿌듯함과 흐뭇함이 밀려왔다. 세상에 우리가 없더라도 너희끼리 의지하면서 잘 살기를.
첫째 까꿍이의 막내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건성으로 바라봤던 둘째 때와 달리 녀석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가를 찾았으며, 틈만 나면 아기가 귀엽다며 엄마에게 자신도 아기를 안아보겠다며 졸랐다. 물론 무겁다며 곧 내려놓았지만 어쨌든 이런 과정을 통해 맏딸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첫째가 셋째를 마냥 반긴 것만은 아니었다. 녀석은 셋째 출생 전 아내에게 자신의 잠자리와 관련된 질문을 계속했는데, 내용인즉 엄마 옆에 둘째와 셋째가 누우면 자신은 어디에서 자냐는 것이었다. 아, 이 짠함이란. 첫째는 이내 곧 엄마 머리 위에서 자면 되겠다고 스스로 답하며 현실에 순응했지만, 그런 녀석을 바라보자니 마음이 아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둘째, 셋째까지 낳다 보니 첫째가 어린이 같아 보이지만 어쨌든 이 녀석도 만 3세의 아기 아니던가.
첫째의 이와 같은 걱정은 셋째 출산 후에도 계속되었다. 녀석은 틈만 나면 아내와 내게 "나는 세상에서 엄마와 아빠가 제일 좋아. 엄마는(아빠는)?"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것은 결국 복댕이의 등장과 함께 가질 수밖에 없는 불안감의 표현이었다. 그래도 좀 컸다고 막내가 엄마를 독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와 같은 현실을 100% 인정하기 어려운 첫째 까꿍이.
반면 셋째의 대한 둘째의 반응은 좀 더 본능적이었다. 녀석은 출산 전에도 그랬지만 유독 엄마 품에 집착했다. 막내가 엄마 젖을 빨고 있으면 다가가 엄마 가슴을 찌르며 울면서 뭐라고 응응거렸다. 내 자리인데 왜 이 녀석이 차지하고 있냐는 뜻이겠지. 아내는 둘째가 말은 못해도 말귀는 알아듣는 터라 몇 번이고 타이르고 설명했지만 녀석의 땡깡에 결국에는 막내 수유가 끝난 뒤 둘째에게도 가슴을 내어주어야 했다.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발을 까닥대며 맛있게 엄마 젖을 빠는 둘째. 이 고집불통 같으니.
하지만 이런 둘째도 현실은 현실로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셋째 출산 전에는 아가 어디 있냐는 질문에 '아가' 하면서 자신을 가리키던 녀석이 막내 동생 등장 이후에는 같은 질문에 잠깐 머뭇거린 뒤 '아가' 하면서 셋째를 가리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직 두 돌도 안 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 스스로를 아기라 칭하지 못한 상황. 역시나 가슴이 아렸다. 둘째 본인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얼마나 힘들꼬.
엄마가 못 보던 동생을 안고 등장하면 그 스트레스가 남편이 10명의 첩을 한꺼번에 들이는 것과 같다던데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둘째는 동생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 다만 과한 애정표현이 문제였는데, 힘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까닭에 둘째가 동생이 귀엽다며 머리를 박거나 쓰다듬으면 셋째가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였다. 그러면 당장 들려오는 부모의 잔소리와 그에 서럽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둘째. 이는 셋째를 난 이후 집안에서 매일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아이들의 성격 형성과 부모의 역할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아들러 등은 출생순위가 개인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주는 하나의 요소라고 주장했다. 가족은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환경인데 그 안에서의 출생순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거의 최초의 사회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자식들의 경향은 다음과 같다.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만큼 의무감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보수적인 첫째와, 막내로서 마냥 어리광을 피우는 셋째와, 그 사이에서 부모의 인정을 받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 둘째.
물론 심리학자들이 규정한 첫째, 둘째, 셋째의 성격이 모두 옳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경험 상 출생순위가 아이들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결국 성격은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개인이 처해있는 환경과 대인관계 속에서 형성되기 마련인데, 각각의 출생순위는 그 대인관계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만 보더라도 까꿍이는 동생에게 더 양보하는 편이며, 산들이는 엄마, 아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 세게 땡깡을 부리지 않는가.
따라서 부모로서 가장 고민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이들의 성격 형성에 있어서 출생순위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점이었다. 물론 아예 상관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영향을 최소화하여 아이들의 본 기질을 살려주고 싶었다. 첫째라서 책임감을 더 강하게 가지거나, 둘째라서 눈치를 더 본다거나, 셋째라서 막무가내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구조적 조건에 의해서 아이의 성격이 벌써 규정된다면 그것만큼 비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아가 발달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아이를 본연의 모습으로 키우고 싶은 것이 장남 컴플렉스로 꽤 많은 고민을 했던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이었다.
아이의 성격이 부모의 욕심처럼 형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아이들의 머리가 굵어질수록 부모와의 다툼은 더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고, 그만큼 부모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한 가지 견지하고 싶은 것은 녀석들이 밝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빠도 노력할테니 너희들도 밝고 긍정적으로 자라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