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턴 결혼기념일 너희들이 챙겨라.""결혼한 당사자들이 챙겨야지, 그걸 왜 우리가 챙겨."아내가 아이들에게 호기롭게 내맡긴 결혼기념일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연초에 내팽개친 결혼기념일을 누군가는 다시 챙겨야 했습니다. 어제는 15년차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그제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당신 뭐 받고 싶은 거 없어?""선물 같은 거 결단코 하지 마요."진정 썰렁했던 아내의 반응에 할 말 없었습니다. 그동안 결혼기념일이면 아내의 직장으로 꽃다발을 배달시켰는데, 이제는 그러지 말라는 선전포고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린 꽃을 버려야 하기보다는 실속을 챙기자는 의미였습니다. 아내가 제안했습니다.
"당신 받고 싶은 거 있어?""응 있어. 카메라 받고 싶은데. 사진이 잘 찍히지 않아.""그렇잖아도 카메라 알아봤는데 결혼기념일 기념으로 선물할게요."헛물만 켠 걸까? 무척 아쉬웠습니다기분 째지더군요. 그동안 결혼기념일이면 남자랍시고 남편 혼자 무엇인가를 선물하려고 고민했는데, 이제는 아내도 챙기는 모습이 기분 좋았습니다. 이런 기념일은 꼭 남자들만 챙겨야 하는 부당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부부가 함께 챙기는 날이 된 것입니다.
퇴근 후 외식을 제안했습니다. 방학을 맞아 집에 죽치고 있던 아이들이 후다닥 챙겼습니다. 어디 가자하면 꽁무니 빼기에 바빴던 아이들이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아마도 연초에 엄마가 맡겼던 결혼기념일에 대한 아이들의 배려였나 봅니다. 가족이 간 곳은 레스토랑이었습니다.
아내의 선물꾸러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물하겠다고 공언(?)했던 카메라는 물 건너 간 걸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선물이 꼭 올 거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아내도 지인이 선물한 카메라가 이젠 쓸모없는 지경임을 아니까.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과 차이가 나는 것을 아니까.
갈비살 스테이크, 안심 스테이크, 깐배로, 왕새우 치즈 안심스테이크에 와인까지 주문했습니다. 요리 시키며 든 생각입니다. 기념일에는 왜 레스토랑만 찾는지 알 수 없습니다. 뚝배기 집도 좋을 거 같은데…. 여하튼 요리가 나왔습니다. 와인으로 건배를 제안하고, 짧은 건배사를 건넸습니다.
"여보, 나랑 살아줘 고맙네.""쿨한 우리 아들, 엄마가 너 키우는 맛에 산다!"
닭살 멘트에 아내는 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오싹했습니다. 아내에게 더 잘해야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중년 남자의 동물적 직감으로, 그 웃음 속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내 대신 딸이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아빠, 그걸 알면 됐어."헉. 뼈 있는 말이었습니다. 딸의 눈에도 철부지 남편으로 보였던 걸까? 보는 눈은 역시 무서웠습니다. 어른들의 반면교사라는 아이들에게 비친 아빠 모습은 살갑지 못했나 봅니다. 어찌됐건 반성은 제 몫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아내에게 속죄와 감사를 표해야 했습니다.
"당신, 진짜 뭐 받고 싶은 거 없어? 말해 보게."재촉에, 아내는 "없다"면서도 뜸을 들였습니다. 아무래도 걸치기 싫어하는, 보석이 농담으로 나올 것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지없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하나 박힌 팔찌 받고 싶어요. 농담이야."아내도 여자였습니다. 아내가 바라는 팔찌는 평생 해줄 수 없습니다. 아내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굳이 꺼낸 이유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열심히 살자는 주문이었습니다. 해주고 싶어도 해주지 못하는 아빠의 미안함을 눈치 챘는지, 아들이 끼어들었습니다.
"엄마, 그거 제가 크면 해줄게요.""쿨한 우리 아들, 엄마가 너 키우는 맛에 산다."결혼기념일은 당사자들 몫이라던 아이들이 은연중 엄마 아빠를 챙겼습니다. 가족이 주는 행복이란 이런 거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