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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23일) 아침, 전화를 받았다. 그는 오전 11시에 군산 중동 당산제(堂山祭), 오후 2시부터 '정월 대보름 풍물 한마당'이 열리는데 취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것저것 정리할 게 많아 올해는 쉬기로 했는데, 귀가 솔깃했다. 흥겨운 풍물 가락 속에 반가운 사람도 만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당산제가 열리는 중동 경로당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행사가 끝나면 점심을 먹는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사흘 전부터 정성껏 장만한 음식을 맛있게 먹으려면 아침을 거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정월 대보름은 얻어서라도 밥을 아홉 번 먹는 날 아니던가. 해서 곧바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눈(雪)이 비로 바뀐다는 두 번째 절기 우수(雨水)가 지난 지 엿새가 되어서 그런지 겨우내 황량하게 느껴졌던 들녘은 생기가 돌았다. 날씨도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처럼 포근했다. 바람 한 점 없는 청잣빛 맑은 하늘이어서, 버스 유리창을 통과하는 햇볕이 더욱 따사하게 느껴졌다. 

당집을 몇 차례 옮겨가며 200여 년 내려온 중동 당산제

 성산 '고살메 농악단'이 풍물 한마당을 펼치고 있다.
성산 '고살메 농악단'이 풍물 한마당을 펼치고 있다. ⓒ 조종안

경포천 입구에서, 전화를 준 선배를 만나 경로당에 도착하니 공식행사에 앞서 성산 '고살메 농악단'의 신명 나는 풍물 한마당이 펼쳐지고 있었다. 풍물패는 첫째 마당 우질굿, 둘째 마당 오방진, 셋째 마당 굿거리장단 순으로 바꿔가며 흥을 돋우었다. 첫째 마당에서 둘째 마당으로 바뀌자 "얼씨구, 신나게 잘 헌다!"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날에서 보름까지 이어졌던 예전 풍물패는 집집을 다니며 잡귀를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기에 앞서 사람들에게 신명을 돋궈주고 새해 풍요와 희망을 안겨주는 마을 잔치로 시작했다. 또한, 풍물패가 보름 동안 돌면서 거둔 쌀과 돈은 동제나 당산제 등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 음식을 만들어 모두가 나눠 먹었다.

일인들의 전관 거류지, 일인들의 항구도시로 출발한 군산은 민족 고유의 토속신앙은 물론 세시풍속이 거의 사라진 도시가 돼버렸다. 더구나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정책으로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고, 해방 후 가난과 전쟁을 거치면서도 중동 당산제는 주민의 보호 속에 당집을 몇 차례 옮겨가며 200여 년을 계승해왔으니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민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소지를 올리는 모습.
어민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며 소지를 올리는 모습. ⓒ 조종안

군산문화원(원장 이복웅) 주최로 열린 중동 당산제는 개식사, 국민의례, 당제 유래보고, 인사말씀, 격려사 등 공식행사에 이어 문동신 군산시장을 비롯한 동네 주민이 차례로 나와 어민들의 무사태평과 만선을 기원하며 절을 하고 소지(燒紙)를 올렸다. 통통한 체격의 아주머니가 소지를 올릴 때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오르기도.

매년 섣달이면 길일을 잡고 정월에 '경쟁이'를 불러다가 독경(讀經)을 했던 어머니는 불붙은 소지가 방안 천정까지 올라가면 부자라도 된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월에 소지 종이가 잘 타오르면 그야말로 한해 '운수대통'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에는 절박한 심정에 입으로 후후 불어가며 소지를 올리는 사람도 많았다. 

행사장에서 만난 다른 선배들과 점심을 맛있게 먹고, 옛날식 다방으로 이동해서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배들과 담소를 하면서도 당산제나 대보름 풍물 한마당 참여는 전통문화 계승 발전 차원을 넘어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안부가 궁금했던 선배나 지인을 만나거나 소식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월 대보름은 민족의 밝음 사상을 반영한 명절

 참가자들이 달걀꾸러미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참가자들이 달걀꾸러미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있다. ⓒ 조종안

오후 2시쯤 2013년 한해 군산시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23회 계사년 정월 대보름 풍물 한마당이 열리는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장은 토산품 판매장과 전 부치기, 귀밝이술 먹기, 부럼 깨기, 윷놀이, 달걀꾸러미 만들기, 방패연 만들기, 떡메치기, 먹을거리 등의 부스가 설치되어 있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찰밥과 막걸리로 대보름의 참 맛을 즐기는 선배들
찰밥과 막걸리로 대보름의 참 맛을 즐기는 선배들 ⓒ 조종안

어른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부스는 귀밝이술 마시기와 구수한 찰밥이 나오는 먹을거리 코너. 오랜만에 만난 선배들도 개운한 된장국과 홍어회, 돼지고기 수육, 각종 나물이 차려진 먹을거리 부스 테이블을 중심으로 모여 막걸릿잔을 권커니잣거니 권하며 정월 대보름의 참맛을 즐겼다.

농경을 기본으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는 정월 대보름은 우리 민족의 밝음 사상을 반영한 명절로 달의 생성과 소멸 주기에 따라 긴장과 이완, 어둠과 밝음, 나에서 우리로 교체·확장되는 우리 민족의 세계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개인적이고 피붙이를 중시한 설날을 보완할 수 있는 집단적이고 개방적이며 공동체를 중시했던 명절로 알려진다.    

네댓 살 꼬마가 '온고지신' 몸으로 체험하는 것처럼 보여

 극단 <둥당애> 김광용 단장의 태평소 연주에 맞춰 달집을 도는 풍물패
극단 <둥당애> 김광용 단장의 태평소 연주에 맞춰 달집을 도는 풍물패 ⓒ 조종안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편을 갈라 널뛰기를 하고 있다.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편을 갈라 널뛰기를 하고 있다. ⓒ 조종안

군산문화원이 주최하고, 진포문화예술원이 주관한 정월 대보름 풍물 한마당은 식전 행사로 앉은반 설장구와 신적 공연이 펼쳐졌고, 제1부 개막식에 이어 제2부는 길놀이, 민속놀이, 국악한마당, 주민노래자랑, 민속놀이 경연, 정월 대보름 풍물 판굿 공연, 달집태우기 등 다양하게 진행됐다.

광장에는 30~40대 부모를 따라온 어린이가 많았고, 외국인도 자주 보였다. 부모와 자녀가 풍성한 민속놀이를 즐기면서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더불어 그들은 새끼를 꼬고, 달걀꾸러미를 만들고, 연을 만들어 하늘에 띄우고, 전 부치기, 고구마 구워먹기, 부럼 깨먹기 등 각종 먹을거리를 통해 공동체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떡메치기 체험을 즐기는 아빠와 딸
떡메치기 체험을 즐기는 아빠와 딸 ⓒ 조종안

전통 민속놀이와 문화를 배우려고 기다리는 남녀 중고생들이 대견하게 보였다. 귀여운 여아가 우람한 체격의 아빠와 함께 떡메를 치느라 낑낑대는 모습 앞에서는 미소가 지어지며 발을 멈추었다. 네댓 살밖에 안 된 꼬마가 '옛것을 배우고, 깨달아 새것을 알게 된다'는 뜻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  

미국인 미첼씨, "원더풀 코리아~ 정월대보름 원더풀!"

정월 대보름 행사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2013 계사년 소원 적기와 부정과 사악을 모두 살라버린다는 달집태우기. 참석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 해 소원을 자그만 한지에 정성껏 적어 달집에 매달았다. 그중 소원 쪽지가 살랑살랑 나부끼는 달집을 카메라에 담는 흑인과 소원을 적는 늙수그레한 외국인이 눈길을 끌었다.

 소원이 적힌 한지를 달집에 매다는 미첼씨
소원이 적힌 한지를 달집에 매다는 미첼씨 ⓒ 조종안

한동안 미국에 거주했던 선배의 도움으로 군산 미 공군비행장에 문관으로 근무한다는 미첼(52, Michael Buethe)씨에게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쪽지에 무슨 소원을 적었느냐는 질문에 미첼씨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 "원더풀 코리아~ 정월대보름 원더풀!"을 연발했다. 

미국 '텍사스 주'가 고향으로 여자 친구가 구경하러 가자고 해서 왔다는 미첼씨의 새해 희망은 아들 가족, 동생 가족, 여자 친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까지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달라는 뜻으로 "올 해피 뉴 이어(All happy new year)"라고.

죽성동에서 합기도 체육관을 운영한다는 장민성(36)씨는 오래전부터 류머티스성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아내가 하루빨리 쾌유하게 해달라고 적었다고 했다. 급우들과 함께 왔다는 군산여상 2학년 정진솔(18) 학생은 한 해 소원 적기, 달집태우기 등이 모두 처음이라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한 해 소원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의 건강.

엄마와 함께 왔다는 아리울 초등학교 3학년 표민주(10) 학생은 "쪽지 하나에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네 분이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적고, 다른 쪽지에는 엄마 아빠를 비롯한 네 식구의 꿈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적었다"며 수줍게 웃었다.

 한 해의 소원을 담은 불꽃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한 해의 소원을 담은 불꽃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다. ⓒ 조종안

2013 계사년 '정월 대보름 풍물 한마당'은 흰 끈을 나란히 잡은 참가자들이 흥겨운 풍물 가락에 맞춰 달집 주위를 도는 강강술래에 이어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6시 20분 달집에 불을 점화,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며 희망찬 출발을 다짐하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막을 내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중동 당산제#정월대보름#달집태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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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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