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올해는 백남준이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첫 전시를 열고, 비디오아트를 탄생시킨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백남준을 이야기 할 때'라는 타이틀로 1년간 그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 기자 말
백남준이 30살 때 "황색재앙은 바로 나다"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는 서구의 한복판에서 세계예술계를 통째로 쓸어버리겠다는 그의 포부와 자신감을 드러낸 말이다. 한국인으로서 백남준만큼 자신의 긍지와 자부심을 보여준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백남준은 천재적 예술가이면서 심오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푸코'도 자신을 고래에 비유하며 누구에게도 간섭받거나 조정 당하지 않는 '사유의 잠수자'라고 했지만, 백남준은 바다표면의 잔물고기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심해의 철학자다.
가장 깊은 곳을 내려가는 존재이기에 그는 가장 멀리 볼 수 있었다. TV는 '멀리 본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철학을 예술화했다. 비디오아트는 그래서 놀라운 발상이다. 유튜브, 인터넷, 스마트폰, SNS 심지어 노래방까지 그의 아이디어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비디오아트 탄생 50주년을 맞아 이런 예술세계를 펼치는 데 열정을 바쳐온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을 지난 2일 광주에서 만났다. 그는 2015년 개관예정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콘텐츠 구성과 운영에 대한 총괄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를 종일 쫓아다니며 백남준에 대해서 물었다.
- 백남준 선생과 이영철 관장이 좀 닮아 보이는데요?"아 글쎄요. 박수 무당과 대샤먼의 차이겠지요. 백 선생께서 예술이 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라고 했는데, 전 공감해요. 목적론적인 '무엇으로부터 자유'보다 '자유를 위한 자유'가 더 좋거든요. 전 생각만 도발적인데 백 선생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시차가 없이 특히 예술에서는 완전한 도발 그 자체이지요.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으로 3년간 일하면서 온통 그의 세계에 빠졌어요. 지금도 언제 어디서나 그분에 대해 생각하며 일합니다. 제가 발견한 건 아주 넓고 깊은 그분의 사유와 예술 속에 일정한 코드가 있다는 거예요. 차츰 이야기하죠."
- 백남준은 직접 뵌 적이 있는지 그의 이름은 언제 알게 되었나요?"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 학부에서 사회학을 하고 대학원에서 미학을 했지만, 대학 1학년 때부터 미술에 관심 많아, 당시 북아현동에 공간을 마련해 '무제'라는 미술 비전공자 친구들과 동호인 서클을 만들었어요. 그 무렵 처음 백남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는 비평가의 말에 그게 예술이 되나 싶었어요.
70년대 <독서생활>이라는 월간지가 있었는데 그 기사에서 백남준이 TV에 얼굴 내밀고 있는 흑백사진의 이미지가 낯설었어요. TV로 하는 예술, 그건 조상이 없는 예술이잖아요. 당시엔 '앨런 카프로우'같은 해프닝아트와 '개념, 논리, 현상'을 파악하는 '개념미술'이 확산될 때 백남준의 예술적 사유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했어요."
- 미국의 저명 미술사가 중 백남준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면서요?"몇 년 전 출간된 <20세기 현대미술>(로잘린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 책을 보면 다른 현대작가에 비해 민망할 정도로 백남준을 축소 왜곡하고 있어요. 백남준을 '플럭서스'(전위예술단체)의 한 멤버로만 봐요. 백남준의 해프닝아트 파트너인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을 성적으로 대상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죠.
'케이지', '보이스', '라우센버그', '재스퍼 존스' 등과 비교하면 백남준을 말이 안 될 정도로 다뤄지고 있어요. 시각 예술의 문맥에서만 보자면 백남준이 안 보이는 거죠. 음악계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고요. 제가 보기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예술의 대부분이 일찍이 그가 예견했고 실험했던 예술의 범위 안에 있어요."
-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이 난해한 이유는 뭔가요?"백남준 사상이 동서양을 통틀어 독보적이잖아요. 그의 사유방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인류학적 관점입니다. 백남준의 앞면은 테크놀로지지만, 뒷면은 식민지 시대의 인류학이 아닌 새로운 인류학인 거죠. 신화와 역사를 하나로 보는 그의 관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그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국내에서 백남준 연구가 계속 맴돌고 오랜 세월 학문의 안테나에 안 잡힌 이유입니다.
신화적 상상력 없이 미래를 볼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맞아요. 과거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미래는 기술과학으로, 현재는 정치적 판단으로 세상을 그려나간다고 봐요. 서양인이 주도한 지난 200년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았기에 새 그림을 그린 거죠. 백남준은 20대에 그걸 알았고,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했고 혼자 나간 겁니다."
-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백남준이 큰 역할이 했다고요?"백남준이 제1회 '광주비엔날레'를 태동시키는 데 기여가 컸어요. 이에 앞서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건립도 95%가 그의 공로입니다. 그해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전을 열었고요. 그리고 광주비엔날레에서 미디어아트란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 '인포아트'라는 제목으로 백남준의 제자나 외국 동료작가를 데려와 선보였어요. 백남준은 이미 오래전에 세계 최초로 미디어아트 정교수가 되었고, 미국 내 미술대학에 미디어아트학과나 그 관련스튜디오가 생길 때마다 자문역을 도맡아 해왔었죠."
- 당시 진보미술계는 백남준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하던데요?"백남준에 대해 진보 쪽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기술의 발전이 예술의 발전에 결정적이라는 '기술결정론'은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 타자, 소수자문제에는 별반 관심이 없고 세상의 어둔 면을 개선하려는 면이 없다고 봤어요. 그래서 진보 쪽에서는 백남준을 '맥루한'(미디어학자)주의자 본 거죠.
당시 유럽에선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적 사고가 지식계의 축을 뒤흔들었고 '노버트 위너(N. Wiener)'의 사이버네틱스이론 등이 한참 영향을 미칠 때죠. 또한 서구문명의 몰락에 절규하며 새 문화를 그리려 한 잔혹극의 창시자 '앙토냉 아르토(A. Artaud)'도 있었고요. 백남준은 이렇듯 당대 가장 선진적 관점에 관심이 많았어요."
- 백남준 연구가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고, 백남준아트센터도 국립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백남준은 초국적인 장기프로젝트입니다.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생겨 그 위원장 등을 만찬에 초대해 이런 프로젝트가 필요하고도 설득했지만 힘이 없더라고요. 경기도 차원에서 지원하는 '백남준아트센터'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국가예산이 들어가는 국립미술관 수준의 강력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올해가 백남준의 비디오아트가 탄생된 지 50주년인데도 정부는 몰라요.
국내외에 그에 대한 연구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의 이름을 이용한 사람들은 많아도 그를 정작 이해하려고 덤벼드는 사람은 너무 드문 것 같아요. 지구촌의 많은 젊은이들도 그에게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 백남준을 '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라는데 정부가 어떻게 활용해야죠?"'천년 써먹을 세계적 문화브랜드' 그건 구호일 뿐입니다. '뒤샹'도 20세기 현대미술의 창시자가 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어요. 난 한국사회의 지성사에 예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한국미술계에 묻고 싶어요. 예술이 문화의 꽃이라는 걸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때 우리가 선진국이 되는 거죠.
지금은 모든 국민이 첨단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1인 기업시대, 1인 미디어방송시대, 그래서 모든 국민이 '지식근로자'잖아요. 이럴 때 정부가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고 백남준의 가치도 전국적으로 개화시키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김구가 원했고 백남준이 실현하려 했던 두뇌강국, 문화강국이 되는 거죠."
- 백남준아트센터 관장하실 때 편저로 <백남준의 귀환>을 내셨는데 왜 저서로 만들지를 않았는지요?"양심상 그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요. 백남준이 그렇게 중요한 글을 많이 남겼는데, 그걸 모은 책이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저서를 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안내서라도 급한 것은 이해하지만 어설픈 저서는 정말 곤란하다가 봐요.
백남준은 미국에서 40년 살았는데 그 나라에선 백남준에 대한 단일 연구 서적이 단 한 권도 없어요. <피드백>이라는 중요한 책이 있지만, 백남준에 관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나마 가장 앞서 간 연구서입니다. 그 외엔 없어요.
뉴욕 구겐하임에서 백남준 회고전을 기획한 '존 핸아르트' 큐레이터가 다른 연구자들 글을 모아 전시하도록을 자신의 책처럼 출간했는데, 솔직히 내용이 엉망이에요. 그리고 프랑스에도 없고요. 독일에선 백남준 주제로 박사논문을 출간한 저서가 한 권 나왔지만, 그 이후 저자가 상당히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연구서는 없고 세계 곳곳에서 전시한 도록만 더러 있어요.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한국에선 잘 모르면서 그에 대한 저서는 여러 권 나와 있어요. 백남준 자신이 남긴 중요한 글, 인터뷰가 많은데 제가 이 책을 내기 전까지는 그분 자신에 관한 책은 한 권도 나온 게 없었어요.
백남준을 가장 존경하는 독일에선 백남준의 글 모음집은 몇 권 나와 있습니다. 비엔나현대미술관에서 63년 첫 개인전을 리바이벌하며 만든 훌륭한 도록이 있고요. '미디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뒤샹'보다 어렵지요. 그러므로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백남준 서적은 위험천만합니다.
정말 이제 한국이 21세기를 생각한다면 백남준 연구를 위한 국제적인 학술협회 같은 펠로우십 제도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마지막에 그걸 하려고 노력하다가 중도하차했죠. 백남준의 첫 전시를 분석하는 책을 저서로 낼 예정입니다. 일본어와 영어로 낼 겁니다"
- 백남준을 '샤먼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왜 그에게 '굿'이 중요한가요?"죽은 자와 산 자가 소통하는 매체가 굿이잖아요. 중세 때 미디어(media)는 '영매'를 가리켰다고 해요. 백남준은 굿을 소재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현대의 샤먼이었어요. 하늘과 지상 세계를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게 예술가의 역할이지요.
고조선 단군의 본뜻은 '하늘'입니다. 몽골어로 '탱그리 칸'(天王)'라고 하구요. 탱그리가 백남준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아야 백남준 코드도 알 수 있어요. 백남준을 '몽골의 대장장이 샤먼'으로 보면 많은 게 쉽게 이해되지요. 주술과 예술은 원래 같은 뿌리고 테크놀로지는 그 매개역할을 한 것이지요."
- 왜 백남준은 모든 걸 그렇게 부수고 자르고 파괴한 것일까요? "왜 백남준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파괴적이냐고요. 새로운 야만인이 오는 거죠. 세상을 다 걸고 싸우는 그 명분을 아무나 스스로 설정하기 어렵죠. 정치가 중에 그런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나요. 영구혁명을 꿈꾸던 인물이 예술가였으니까 용납이 되었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감옥을 들락날락했을 수도 있겠죠.
백남준은 위대한 전사였어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굴었고 집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떠돌았지만, 그 정신은 정말 대단히 위대했어요.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죠. 유를 부서야 창조가 나와요. 파괴 없이 창조 없어요.
겁쟁이나 좀비들에게 창조는 없어요. 창조자에게 기생하거나 합세하여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그들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죠. 기존의 것을 부숴서 잡석으로 만들어 길을 내는 자, 그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자가 바로 창조적인 야만인이죠.
'1회 백남준예술상'을 수상한 프랑스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B. Latour)'는 백남준은 근대에 대한 강박이 없던 유일한 인물이라고 했어요. 백남준은 탈모던이 아니라 세계 최초의 '비(非)모던' 예술가입니다. 로컬리티의 중요함도 함께 실천한 최초의 글로벌 아티스트이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현대미술사는 다시 써야 합니다."
- 백남준의 '랜덤액세스'를 일상에서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지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어떨까요. 흔히 '랜덤액세스'는 무작위의 접속을 말하는데 이제 누구나 그것을 하고 사는 인터넷 세상이 왔잖아요.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 우연히 떠오르는 걸 반복하며 사는 거죠. 언제 어디서 어떤 이와 어떤 일로 어떻게 만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예술을 하려면 그런 비상의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담대함이 필요한 것이라 봐요. 선불교의 화두집에 온통 그런 이야기가 가득하고요. 백남준이 남긴 드로잉 가운데 '삼계무법(마음이 곧 부처, 부처가 곧 사람)'이 그런 내용입니다."
- 백남준이 증오한 '부르주아 교양취미'가 뭔지 한마디 해주시죠?"'부르주아 교양취미'가 뭐냐면 항상 좋은 자리에 참석하여 좋은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고, 좋은 음식만 먹고, 좋은 소리만 듣고, 좋은 말만 하고 고상한 척, 유식한 척하고 행세를 하는 것이에요. 결국은 가진 사람,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기존의 질서만 유지하려고만 하는 거죠."
- 그러면 백남준이 '몸'을 중시한 것이 여기서 나오나요?"백남준이 이런 '부르주아 교양취미'를 부수는 데 사용한 무기가 바로 '몸'이죠. 그래서 예술에 몸을 도입해 행위음악, 해프닝아트가 생긴 거고요. 그런데 여기서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 건 그가 말하는 몸 예술은 발레나 고전무용과는 전혀 달라요. 그건 이미 길들여지고 익숙해진 방식으로 철학이 없는 그저 우아한 몸짓일 뿐이거든요.
백남준은 몸을 던진 것은 바로 깨달음과 각성을 얻기 위한 행위라고 봐요. 백남준을 관념주의자 '헤겔'로 접근하면 곤란합니다. 그에게 '니체'가 중요해요. 독일 유학할 때 교과 과정에서도 있었고 독일친구들과 니체를 많이 읽었어요.
그리고 백남준이 예술에 몸을 대입하는 방식이 예술이론보다는 우선적으로 몸이 먼저입니다. 예술적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방식이죠. 그러니까 그는 몸으로 춤을 추는 철학을 한 셈이지요."
- 백남준과 존 케이지,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는 어떤 관계인지요?"백남준에겐 스승이 없어요. '존 케이지'는 백남준의 스승이 아니에요. 케이지가 가르쳐 준 것도 없고요. 그냥 백남준이 그의 공연에서 어떤 착상을 얻게 되었고, 감동했을 뿐, 백남준이 일본음악전문지의 통신원(기고자)할 때 케이지와 한 인터뷰를 보면 백남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면에 대해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묻곤 했어요.
케이지의 선지식이 나이브했던 것에 백남준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더욱이 케이지 뿐 아니라 서양인에게 크게 알려졌던 일본의 선(禪)지식인 '스즈키(Suzuki)'에 대해 세일즈맨이라며 질타했어요. 일본에서는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미국에서는 평화주의자인 척하는 위선을 백남준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봤죠.
케이지가 선불교로 반문명적 예술행위를 포장했다면, '요셉 보이스'는 2차 대전 전투조정사로 출전했다 추락해 죽을 뻔한 그를 살려줬다는 타타르족 이야기를 지어내 자신의 비합리적 정치예술을 포장했어요. 그런데 보이스 예술탄생의 내막에 백남준이라는 귀재의 상상력과 착상이 작동한 게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들어요.
- 이야기를 바꿔 백남준은 자신이 '황색재앙'이라 했는데, 21세기를 여는 문화칭기즈칸을 꿈꾼 건가요? "1962년에 그런 말을 했을 때 그는 이미 '칭기즈칸'입니다. 그 해가 바로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이라 몽골에서 성대한 축제가 있었고, 독일에서는 그와 관련된 국제스포츠행사도 많았어요. 시사에 민감하던 백남준이 충분히 그것을 활용한 겁니다. 농담처럼 백남준이 말했지만 그것은 반농담반진담이었죠.
텃세가 판을 치던 인터내셔널리즘 시대의 국경을 넘나들며 글로벌 아트의 세상을 연 백남준은 지금부터 860년 전에 이미 최초의 글로벌 세상을 살았던 그 몽골리언의 세상으로 날아가 정보고속도로의 아이디어를 예술계로 끌어들인 겁니다.
성인 칭기즈칸이 "말에서 내려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에 온 이유"라고 한 말을 백남준이 계승해 전자세계를 이용해 대륙을 잇는 위성아트를 한 거죠. 그는 언제나 외부를 향해 떠나는 자였고, 내부로는 가장 먼 곳으로 잠수해 들어간 고래였어요."
- 어느 글에서 백남준의 유토피아를 '해원상생(평화공존)'로 보셨는데요?합리적이고 직선적인 선형적 시간의 매듭 끝자리에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온통 다 끊어진 것을 이어놓은 회로로서의 유토피아, 그건 올 것이 아니라 지금 오고 있는 평화세상으로서의 유토피아지요. 그래서 2009년 '고르디아스 매듭 다시 묶기'라는 주제와 '백남준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국제세미나를 열었어요.
정주민의 왕 알렉산더가 소아시아 지방을 정벌했을 때 기둥에 묶여 있던 매듭을 무력(칼)으로 잘라내서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는 게 바로 '고르디아스 매듭'이야긴데요, 칼로 베지 않고는 풀지 못하는 정주민의 무력에 맞서 유목민처럼 그걸 치유하고 다시 연결하는 정신이 지금 필요하지 않겠냐는 관점이었지요.
백남준은 처음부터 그걸 알았고 평생 그 일을 한 것입니다. 동과 서를 연결시키려 한 게 바로 '바이 바이 키플링', '글로벌 그루브' 등의 작품이죠. 이를 연결하기 위해 우리는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창안해야 합니다.
- 이제 결론적으로 백남준과 그의 예술에 대해 한마디 더 하신다면?"하늘의 이치(天理)와 마음의 이치(心理)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믿음, 백남준 비밀코드의 열쇠입니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끈이죠. 오늘날엔 '인터페이스'라는 말을 쓰죠. 일방형보단 쌍방형을, 결과보단 과정을, 수직보단 수평을 중시하는 '자유를 위한 자유', 사람 간에 접촉과 대화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백남준 선생이 좋아하는 선시 중에 '무봉탑'이 있어요. 이음새가 없는 탑을 말합니다. 요즘 모바일, 유튜브, SNS 등 바로 그거잖아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부처의 진리를 담은 단지 조각이 아닌 '스투파(큰 사리탑)'가 되는 거죠. 그것이 너무 크고 넓어 모든 인간을 담고도 남아도는 탑으로서의 예술이죠.
끝으로 이 시대에 백남준은 하나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86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새로운 글로벌 시대의 칭기즈칸, 그가 바로 백남준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지금과 같은 다중 시대에 백남준식의 정치적 감각, 예술적 사유, 창조적 실험정신은 훨씬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영철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서 석사를 마치고 중앙일보에서 기자로 일을 하다가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교 현대미술사 박사과정을 다니던 중에 2회 광주비엔날레 일을 위해 도중에 귀국하였다.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아시아문화개발원'(대통령령 특별법 28조 근거)의 원장(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위한 싱크탱크역할을 담당하는 정부기관. 그는 2회 광주비엔날레와 1회 부산비엔날레 예술 감독을 역임했고,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창립 총감독, 백남준 국제아트페스티벌 총감독을 역임했다, 저서로 평론집 <상황과 인식>, <현대 미술과 문화 정치학 총서> 백남준 자료집 <백남준의 귀환> 등이 있다.
[참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사업은 2002년 고 노무현대통령이 '광주 문화수도육성' 선거공약으로 발표(12.14)로 시작되었고 올해 11년째를 맞고 있다. 2015년에 개관할 예정이다.
홈페이지
http://www.acc04.com 덧붙이는 글 | [관련전시_하나] 백남준아트센터 2013년 전반기 상설전 : <부드러운 교란_백남준을 말하다>(Gentle Disturbance-Talking Paik) 전시기간 : 2013년 1월 29일-6월 30일 장소 : 백남준아트센터 1층 참가작가 : 백남준, 저드 얄커트, 만프레드 레베, 샬럿 무어먼. 이 전시는 백남준과 맑스, 쇤베르크 그리고 성(Sexuality)이 주제.
[관련전시_둘]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 [New & Now_서울시립미술관 2012 신소장작품] 2013년 1월18일-3월17일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본관1층에서 백남준-보이스 사진 전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