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44년 만에 찾아온 수원화성이다.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에서 성곽에 둘러싸여 있는 수원 시내를 내려다보는 감회가 너무나 크다! 1969년 1월 14일, 나는 수원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수원에서 생활을 하였다. 근무처는 팔달문 근처였고, 숙소는 화서문 앞에 있는 한 작은 한옥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다. 당시 하숙비가 한 달에 1200원으로 기억된다.
수원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격랑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화성행궁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시설물이 소실되어 버리고 없었다.
"북문은 부서지고, 동문은 도망하고, 남문은 남아있고, 서문은 서 있다."내가 수원에서 직장생활을 할 당시 부서진 수원화성에 대하여 떠돌아 다니 던 말이다. 지난 2월 23일 44년 만에 다시 찾은 수원화성은 거의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오마이뉴스> 창립 13주년 기념 <2012 시민기자> 수상자들과 함께 1박 2일 워크숍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수원화성은 많은 감회를 안겨주었다. 용인 워크숍 장소 부근에서 이른 아침 해장국으로 몸은 데운 일행 40여 명은 오전 10시 수원행궁 터 앞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아기자기한 행궁길을 걸어서 팔달문에서부터 성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김종성 기자(동아시아역사연구가, 문화재청 헤리티지채널사업단 자문위원)의 해설을 들어가며 성곽을 오르게 되어 더욱 의의가 깊었다.
"수원화성은 효심의 지극한 정조(사도세자의 아들)가 아버지의 능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를 계기로 그의 정치적인 약점을 극복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여 왕권을 강화하여 강력한 조선을 건설하려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수원 화성의 서반부를 돌아보면서, 이 속에 서린 정조의 꿈과 비애를 음미해보기로 하겠습니다."둘레 약 5.7km, 높이 4~6m의 원래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조선 제22대왕)이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침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2년 9개월만인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성의 축조는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건축되었다.
현재의 화성은 1975년부터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하여 보수·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9년도에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97년 12월 이태리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에 이르렀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역사를 말해주는 성곽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는 청설모들이 오르내리며 재주를 피우고 있었다. 일명 '화성장대'라 부르는 서장대에 서니 사방 백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수원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 앉은 자리에서 백리 안쪽의 동정을 통제할 수 있는 곳이다.
서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와 화서문에 도착했다. 화서문에 도착하자 44년 전 하숙을 했던 추억의 하숙집이 떠올랐다. 당시 화서문은 4개의 문 중 가장 완벽하게 남아있었던 건물이다. 주인이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하숙집에는 여고 3학년생 딸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던 나와 여고 3년생이었던 하숙집 딸은 비슷한 나이 또래였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유난히 수줍음을 탔던 것 같다. 그 여고생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수원화성의 역사보다도 1년 반 동안 하숙을 했던 하숙집과 하숙집 딸의 모습이 더 궁금해졌다. 옛날 그 하숙집을 상상하며 골목을 돌아보았지만 몰라보게 변해버린 거리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화서문에는 당시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는 오래된 편액이 지금도 그대로 걸려 있어 200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답사 코스의 마지막인 장안문에 도착하여 김종성 기자는 다시 열변을 토했다.
"수원화성은 완벽한 공사실명제를 도입하였습니다. 공사 참여자의 이름과 공역 일수, 각 시설물의 위치와 모습, 그리고 비용을 낱낱이 기록한 공사보고서를 펴냈습니다. 석공 아무개가 어느 고장 출신이며, 어느 현장에서 며칠을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값으로 받았는지 일일이 기록을 하여 <화성성역의궤>라는 제목의 책에 실어서 공개를 했습니다. 이 기록은 1970년대 성을 복원하고 보수하는 데 지침서로 사용하였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데에도 톡톡히 한 몫을 하게 되었지요. 성의 건설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곧, 정조를 비롯한 당시 정치가들의 청렴하고 자신감 있는 국정 수행을 집행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개혁의 꿈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48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과 꿈, 그리고 못다 한 개혁의 한이 서린 유서 깊은 유적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웅장한 장안문(북문)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 했다. 수원화성을 떠나며 하필이면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이 날까? 정조와 노무현! 이 두 사람은 200년 역사의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닮은꼴의 정치를 했던 사람이다. 두 사람 다 기득권 세력의 벽에 부딪혀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안은 채 세상을 하직한 정치인들이다.
정조의 죽음은 정약용 같은 실학파의 후퇴를 가져와 조선의 과학 발전 중단시켰다. 그 결과 형편없는 무기로 일본군과 맛선 조선은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을 맞이해야 했다. 노무현의 죽음은 민주주의를 저만큼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그러나 같은 법 앞에서 힘이 없는 사회적 약자는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하고, 힘이 있는 자(권력과 돈을 가진 자)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고도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가며 버젓이 활보를 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그런 와중에서도 역사의 수레바퀴는 도도히 굴러가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물음을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