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 나풀거리며 내 속눈썹을 간지럽힌다. 눈을 뜨는 아침이면 상큼한 바람이 알 수 없는 어디선가 불어오고 여전히 구름으로 가려진 하늘이 오늘 하루의 날씨가 어떨지를 가늠하기 어렵도록 아리송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날이 시작된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여지없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묵직한 허리춤부터 하품이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오후가 되면, 듬성듬성 하늘을 채운 회색구름들 사이로 어김없이 말개진 모습의 햇살이 삐져나오는 요즘 날씨는 그야말로 봄, 봄, 봄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이런 봄날에 내가 꼭 하고싶은 일이 있다면, 어깨에 가벼운 배낭을 메고 꽉채운 물병 하나 그리고 오후의 봄볕 햇살을 막아낼 만한 널찍한 챙있는 모자를 챙기고는 갈짓자 걸음하며 서너시간을 산책하는 것 그러다가 어디 넙데데한 바위라도 하나 만난다면 눌러앉아 시원한 물한모금 넘긴 후에 대자로 하늘을 향해 누워서는 지나가는 구름에 이름을 붙여보거나 눈에 들어오는 심심한 경관들을 반사상태로 감상하고는 누엿누엿 해가 빠지기 시작하는 무렵에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터벅한 걸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스물한 느낌의 나뭇가지에서 새로 일어나 초록을 피워대는 어느 한 생명을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하릴없이 목적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적지않은 나이에 복이터진 나는 두 주전에 그런 시간을 가졌다. 산행을 계획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시간이 늦어졌기에 별 수 없이 산행을 하지못하고 그저 주말에 집안에 앉아있으려니 답답해 차를 몰고 바람이나 쐬자며 나선 것이기에 별달리 준비할 것도 없는데다가 어디 갈 곳도 정하지 않았으니 그저 한가한 마음으로 나선다. 하지만 어쩌랴 하루가 멀다하고 다니던 길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게 인간이라고, 맘내키는대로 달리다보니 고작 간곳이 아이들와일드.
샌하신토 올라서는 뒷길로 가보려 마음먹었는데 웬걸, 올라가는 고갯길 후미진 곳마다 눈이 허벌하게 쌓여있다. 아마도 지난 주 시내쪽에 가벼운 빗발이 치던날 올려다뵈던 시커먼 먹구름이 바로 여기다 죄다 눈을 쏟아부은 모양이다. 얇다란 경등산화 신고나왔으니 언감생심 크램폰없이 올라갈 일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포기하고 릴리랔 주차장에 올라가 허옇게 쌓인 눈밭에서 괜히 발에 차이는 돌들에게 발길질만 하고는 차를 돌려 좀더 따뜻한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죠슈아 트리로 차를 몰았다.
골고니오 정상엔 오늘 심상치않은 먹구름이 진을 치고있고 계곡 속으로 올려다뵈는 하신토의 정상쪽은 맑은 모양이다. 낯익은 죠수아트리 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하고 45마일 제한속도 표지판이 나타난다. 늘 들르곤 하는 맥도날드에 들러서는 커피를 한잔 사고 화장실을 이용하고 공원으로 향한다. 연방정부가 문을 닫네 어쩌네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여파가 있는 것인지 공원입구 매표소가 아예 문을 닫아걸었다. 공원안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바위에 들러붙어 암벽을 타는 돌잡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늘 해보고 싶었던 것이 있다, 이곳엔. 헤밍웨이 근처 피크닉 장소 건너편에 있는 보이스카웃 트레일을 눈여겨 봤었기 때문이다.
차들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많이들 떠난것 같아보인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트레일을 시작하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시간에 쫓길 것 없고 들고가는 짐이 없으니 맘은 가볍다. 이미 햇살은 머리꼭대기에서 따갑게 느껴지지만 이걸 즐기러 왔으니 이것마저 감사할 뿐이다. 배가 약간 고프기는 하지만 먹어도 되고 안먹어도 될만큼 허기가 지지는 않았으니 다녀와서 간단히 먹으면 될일이다.
간간히 바위꾼들을 구경하면서 먼지 풀풀나는 길을 걷는 맛을 오랜만에 느끼니 가슴에 한줄기 시원한 바람을 만나는 느낌이다. 절대로 오지않을 것 같은 이 사막 한가운데의 봄은 내 앞마당보다 먼저 찾아와 있는가 보다. 누렇게 뜬 얼굴같은 푸석한 풀들을 얌전히 덮고 자리잡은 노란색의 야생화들. 가까이 다가가보니 새끼손톱만도 못한 작은 꽃잎인데 앙증맞은게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꽃이다. 꽃들의 이름에 유달리 무식한 나로선 이름도 모르지만 노란융단꽃이라면 어울릴까. 진분홍빛, 핏빛을 닮은 붉은꽃등 이름모를 야생화들이 발닫는 곳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빼곡히들 피어있다. 풀풀 먼지만 나는 이 불모의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 꽃들이 어디서 무엇을 먹고 자라는 것인지, 자연의 거대한 비밀과 창조의 힘은 나같이 개딱지만한 지식으로 무장한 소인배에겐 감히 의문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리라.
보이스카웃트레일은 이곳 트레일 헤드에서부터 인디언코브까지 이어지는 길인데 전체 길이가 편도 7마일이니 왕복하려면 14마일을 걸어야한다. 경사도 없고 걷는 길도 산책로마냥 푸석한 흙들뿐이라 걷는데는 문제가 없다지만 햇빛이 쨍쨍내리는 한여름에는 절대로 할일이 아닌듯하다. 온통 붉고 희멀건 바위들만 있는 길을 7마일이나 걸어갔다가 다시 얼굴에 직통으로 후려쳐지는 햇빛을 받으며 돌아오는 길이기에 꼭 걸어보고 싶다면 아침 일찍이거나 한겨울에 하면 좋을 산책로이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반바지에 짧은 팔의 윗도리를 입고 허리에 물병을 찬 놈 하나가 등뒤에서 허벌나게 뛰어온다. 생각해보니 한 몇십분전 내 앞쪽에서 뛰어오던 그 놈이다. 마라톤 연습을 하는 모양이다. 하루죙일 몇번을 왕복 14마일의 거리를 왔다갔다를 반복하면서 연습하는 것이리라. 나 이외에는, 한창 작업중인 몇몇의 쌍쌍들이 한가롭게 산책을 하거나 아이들 데리고 유모차에 아기를 앉힌채 천천히 걷거나 노인들이 온몸을 긴팔옷으로 무장한채 얼굴을 가리고 산책을 하거나 하는 모습들뿐이지 잔뜩 어깨에 큰 배낭을 메고 트레킹폴을 들고 씩씩거리며 걷는 사람들은 하나도 눈에 안띄어서 그런지 그 어느때보다 한가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다.
여유있는 걸음으로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버릇이 들어서인지 오히려 천천히 걷는게 더 힘이 든다. 2.5마일 정도 걸은 후에 앉아서 물한모금 마시고 하늘을 보고 바위꾼들을 본다음 다시 1.5마일 정도를 더 걸어서가니 Willow Creek이라는 한적한 장소가 나온다. 별달리 볼것은 없고 사막 한가운데 언제인가 왔던 빗물이 모여 만들어진 웅덩이가 있고 그 웅덩이 근처에는 모기와 벌들이 겁나게 많이 이주해있는 수양버들닮은 나무가 있고… 그게 다인 풍경이지만, 매번 잔뜩 겁먹은채 바위에 매달려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몸에 잔뜩 불필요한 힘만준채 주변을 둘러볼 기회가 없었던 내게 이렇게 가까이서 돌의 표면을 만지고 등산화 신은채 돌사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꽃들에 가까이 다가가 접사할 기회를 얻고하는 한가로운 시간이 오랫만에 날 느슨하게 풀어주는 느낌이라 나는 소풍나온 초등학생마냥 그저 좋을뿐이다.
돌아오는 길은 이미 해가 뒤로 떨어지는 시간이라 오른쪽 얼굴이 타오르듯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바지춤에 있던 수건을 꺼내서는 오른쪽 모자 밑으로 찔러넣으니 그나마 얼굴에 닿는 빛은 피할 만하다. 너무 뜨거운 햇빛 때문이었는지 주차장에 돌아오는 내 마지막 발걸음이 엄청 빨랐다는것을 감지하였다. 시간을 보니 거반 4시… 느리게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대략 7마일의 거리를 3시간도 안걸려 걸은 것이다. 자갈도 없고 대부분 평지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내겐 심히 빠른 걸음걸이인 셈… 느리게 걷는 게 말같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 산책이다.
후끈거리는 얼굴을 하고서는 공원밖의 맥도날드로 돌아와 시원한 물로 세수를 하니 이제서야 살 것 같다. 얄팍하게도 천천히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때는 언제이고 걷다보니 시원한냉수 한사발을 들이키고 싶고 민망함 무릅쓰고 웃통을 벗어제끼고픈 맘이 간절하게 드는게 그래서 이게 바로 사람 마음인가보다 한다.
그래도 오랫만에 걷고싶은만큼 걷고 보내고 싶은만큼 시간을 보내며 느긋한 산책을 오후 내내 하고나니… 그동안 쌓였던 가슴의 앙금들이 개수대에서 걸러지듯 체에 걸러져 휴지통안으로 사라진 것 같은 쌉쌀한 개운함이 발가락 끝에서부터 잔잔히 번져온다. 이런 유유한 산책같은 산행을, 하루종일 가슴이 새가슴 마냥 콩닥거리고 발가락 하나의 세포마저 내맘대로 실컷 휘저으며 내디디는게 허락되지 않는 천생 초짜 신세로 보내는 인고의 시간들중 틈틈히 숨좀 크게 쉬는 이같은 느긋함을 취한다해도 문제없는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산행은 여럿이 왁자지껄 사람 냄새풍기는 모습보다는 단촐하게 둘이서 또는 혼자서 자연을 벗삼아 대화하며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걷는게 일품일거란 생각도 함께 든다. 그러기엔 이리 한낮의 볕이 좋고 바람도 간간히 부는 봄날이 적격일 것이고.
봄타령 하다보니 글이 어째 재미없는게 늘어난 아줌마 속곳같이 뽄대없이 촌스런 모습이 되어버렸다. 어른들 보시기엔 얼마안된 여직 청춘이지만, 풋풋한 샴푸향기를 바람에 시원히 날리며 화사한 색감의 옷으로 봄치장하기에 바쁜 젊은 직원들을 회사내에서 하루종일 보다보면 거무튀튀하게 기미낀 눈가밑으로 늘어가는 잔주름이며 깔깔한 봄바람에 건조해질대로 건조해져서 더이상 제대로 먹지도 않는 파운데이션 그리고 아침에 집을 나서기위해 옷장을 열면 죄다 무채색 색깔의 옷만 눈에 들어오는 같은 내 칙칙한 현실을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되뇌이다 보면... 예전에, 나름 잘나가던 시절에(?)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덤벼들고 대들고 좌충우돌하며 지내던 나의 봄날이 슬쩍 그리워지곤 하는게… 바로 이게 늙어가는 증세 아닌가 싶다.
우울하다, 내 몸 닮지않은 미치도록 아름다운 봄날이 곁에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