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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된 지 꼭 1년이 된다. 1년 전 정부는 거대시장 미국으로의 경제고속도로가 연결됐다고 자축했다. 자동차부품과 섬유의류 등을 중심으로 수출이 늘어 국내 기업들이 큰 이익을 볼것이라고 했다. 반면 국내 농축산업 등의 피해도 우려됐다. 지난 1년 한미FTA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오마이뉴스>는 중소 수출기업과 감귤농장 등의 현장의 목소리와 전문가 등과 함께 향후 대안을 고민해본다. [편집자말]
 수확중인 김정현씨의 천혜향 하우스. 아직 따지 않은 열매들이 나무에 달려있다.
수확중인 김정현씨의 천혜향 하우스. 아직 따지 않은 열매들이 나무에 달려있다. ⓒ 김동환

"걱정 많이 되지. 서울 사람들이 싼 거 먹겠지, 국산이라고 제주도 것을 사주겠어?"

지난 8일 오후 5시 제주도 서귀포시의 한 감귤 농가. 농가 주인인 김정현(65)씨는 날랜 손놀림으로 바구니에 이날 수확한 천혜향을 담으며 반문했다. 그가 집은 천혜향은 지난 1년 사이 가격이 20% 가까이 떨어진 제주산 고급 오렌지 품종 중 하나다.

최근 천혜향 가격은 1킬로그램(kg)당 4000원 선. 해가 거듭되면서 어디까지 가격이 떨어질지 가늠할 수 없다. 그만큼 불안감은 더하다. 천혜향 가격 하락의 주범으로 꼽히는 미국산 캘리포니아 오렌지가 한미FTA 1년을 맞는 올해 3월부터는 지난해보다 5% 더 낮은 25% 관세로 수입되기 때문이다. 그는 "천혜향 가격이 kg당 3000원 밑으로 내려가면 농사짓는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한미FTA의 여파로 국내 감귤농가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FTA 발효 이후 지난해 연말까지 집계된 미국산 오렌지 수입량은 약 11만5500톤. 전년 동기에 비해 23.2% 급증한 수치다. 이렇게 수입된 '오렌지 폭탄' 중 절반이 감귤밭에 떨어졌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국내 소비자 4명 가운데 1명은 오렌지 구입을 늘리는 대신 국내산 과일 소비를 줄였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49.6%는 소비를 줄인 과일로 감귤류를 꼽았다.

FTA '점령군' 미국산 오렌지... 피난가는 '한라봉' '천혜향'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제주도의 넉살 좋은 택시기사들은 제주 산남지방 중에서도 대표적인 감귤 산지로 이름난 이 마을을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농촌'으로 소개한다. 국내에서 가장 품질 좋은 감귤류 과일들이 재배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 고부가가치 농업의 상징격인 고장이지만 지난해 한미 FTA 발효와 함께 사정은 바뀌었다. 이날 찾은 이 동네 농가에는 짙은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미국산 오렌지와의 판매 경쟁 때문이다. 이곳에서 제주산 오렌지인 '한라봉'과 '천혜향'을 재배하는 김아무개씨는 "한미FTA 이후 고급 감귤인 만감류의 가격과 판매 가능한 기간이 크게 줄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산 오렌지 관세가 50%였는데 FTA 이후 3월부터 8월까지 그게 30%로 줄어들게 됐어요. 가격이 싸지니까 수입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많이 사먹잖아요. 대신에 우리 과일은 안 먹는거죠. 예전에는 한라봉 출하 가격이 kg당 4000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3200원 정도에요. 천혜향은 5000원 하던게 4000원까지 떨어졌습니다. 이익은 20~30% 줄었고요. 고급 과일인 한라봉·천혜향이 이 정도인데 감귤은 말 다했죠." 

 김아무개씨의 만감류 창고. 등급별로 분류된 과실들이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있다. 이 지역의 젊은 농민들은 대부분 과일을 도매상에 넘기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와 직거래 방식으로 출하한다고 한다.
김아무개씨의 만감류 창고. 등급별로 분류된 과실들이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있다. 이 지역의 젊은 농민들은 대부분 과일을 도매상에 넘기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와 직거래 방식으로 출하한다고 한다. ⓒ 김동환

한라봉과 천혜향은 비닐하우스와 난방시설을 이용할 경우 이르면 11월부터 수확이 가능하고 시설 없이 기른 나무들에서는 3월 초쯤 열매를 거둔다. 이들 과일들은 비교적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간 국내 감귤 농가들은 수확한 과일들을 일부 저장하면서 11월부터 이듬해 7월 말 사이에 적당히 나눠 시장에 내놓아 왔다. 그런데 오렌지 계절 관세 기간이 이와 거의 겹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한미FTA 첫 해에 생긴 '오렌지 학습효과'는 가격뿐만 아니라 올해 만감류 과일의 판매기간에도 영향을 가져왔다. '3월 넘기면 제값 못 받는다'는 인식이 농민들 머릿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에 저장했던 사람들이 오렌지 때문에 크게 낭패를 보는 바람에 지금은 농민들이 무조건 3월 이전에 빨리 팔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길게는 9개월 정도이던 판매기간이 실질적으로는 4개월 정도로 줄어든 셈이다. 이같은 변화는 계절관세 적용 오렌지가 수입되지 않는 1·2월 시장에도 다시 영향을 미쳤다. 평년에 저장고로 향하던 물량이 시장으로 출하되면서 추가 가격 하락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그나마 올해 사정은 비교적 나은 편이다. 지난해 초 이상 한파가 찾아오면서 꽃눈이 맺히지 않은 나무가 많아 농가 생산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2011년에 수확한 한라봉이 7000kg인데 올해는 4000kg정도로 줄었다"며 "농가마다 수확량이 줄었는데도 가격은 떨어지니 내년에 물량이 정상적으로 나오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소농들은 이제 감귤 농사만 가지고는 먹고살기 힘들어"

미국산 오렌지 수입 증가로 모든 농가가 예외없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중에서도 온도 차이는 있었다. 가격 하락과 줄어든 판매기간으로 보다 즉각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농사 규모가 작은 소농들이었다. 반면 재배면적이 큰 대농들은 "아직은 버틸만 하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김아무개씨는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로 정부의 FTA 지원책을 꼽았다.

"정부에서 FTA 지원책으로 시설현대화 사업 지원을 해 줘요. 보통 1650㎡(500평)짜리 밭에 하우스를 올리면 7000만 원 정도 드는데 그중에 3500만 원을 보조금으로 주고 2100만 원은 농협에서 2~3%대 저리로 빌려줍니다. 

농민은 1400만 원만 있으면 일단 하우스를 지을 수 있는데 지원을 받으려면 조건이 있어요. 품질 향상 시킨다는 명목으로 밭에 있는 과수를 반으로 줄여야 해요. 그런데 그러면 당장 그해 수입이 반토막나니까 밭이 1~2개 뿐인 소농들은 이걸 하기가 어렵죠."

김씨는 그러면서 자신의 농장을 예로 들었다. 2310㎡(700평) 규모의 하우스 농원에서 한라봉을 재배하는 김씨가 거름값·농약값·하우스 난방비 등 매년 고정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은 약 1000만 원 정도. 여기에 3년마다 하우스 비닐 교체 비용이 500만 원 가량 추가된다.

김씨가 올해 이 농장에서 거둬들인 한라봉은 약 4000kg. 판매 평균가를 kg당 4000원으로 잡아도 김씨의 한 해 이익은 434만 원 정도에 그친다. 그는 "시설 재배니까 이 정도가 나온거고 일반 밭은 수확량이 더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러니 한 해 벌어 한 해 쓰는 소농들은 실질적으로 FTA 지원책의 도움을 받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지난해 제주도가 FTA기금 지원 사업으로 지원한 감귤하우스 면적은 총 221ha. 김씨는 "'있는 사람들'만 나라 지원을 받아 하우스를 짓고 그게 또 생산량이랑 직결되니까 밭이 하나인 농민들은 불만이 많다"고 털어놨다.                              

위미리에서 1만3200㎡(4000평)에 걸쳐 감귤류 농사를 짓는 이방식(45)씨는 "3300㎡(1000평) 미만 밭으로 농사짓는 분들은 이제는 농사만 가지고는 먹고 살기 어려워졌다"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한미FTA 이전에는 수확량이 많지 않아도 가격이 어느 정도 보장됐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농민들도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불안한 건 대농도 마찬가지"라며 "오렌지 수입량이 얼마나 늘어날지는 봐야 알겠지만 관세는 매년 내려갈테니 최대한 빨리 수확해서 빨리 팔아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3월 8일 김정현씨 가족들이 비닐하우스에서 농가에서 수확한 천혜향을 분류하고 있다.
3월 8일 김정현씨 가족들이 비닐하우스에서 농가에서 수확한 천혜향을 분류하고 있다. ⓒ 김동환

"올해는 딸기, 참외, 토마토, 수박도 피해 입을 것"

한국 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 1월 내놓은 '농업전망 2013'에서 2012년 미국 오렌지 생산량이 전년보다 4%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국내 수입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캘리포니아산 네이블 오렌지 역시 2%가량 생산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가격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가능성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올해는 오렌지 수입으로 인한 피해가 감귤류 이외의 다른 과일로도 확산될 전망도 있다. 문한필 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올해 2월에서 5월 사이에 출하되는 과일들이 평년 수준의 작황이 나온다면 과채시장에 가시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에는 한파의 영향으로 2~5월에 나는 과일들의 생산량이 20~30% 줄었어요. 그래서 시장 공급이 줄다보니까 자동으로 가격 방어가 된 측면이 있는데 올해는 이상 기온이 없었거든요. 딸기·참외·토마토·수박까지도 피해가 클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 부연구위원은 "정부가 FTA 협상할 때는 고려치 못했던 부분"이라며 "가장 큰 피해가 우려되는 것은 감귤류이지만 감귤은 정부 지원이라도 받는 반면 이들 과일들은 오렌지 때문에 피해를 보더라도 보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감귤#한라봉#천혜향#한미FTA 반대#미국산 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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