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스페인의 청년 실업률은 50%를 넘었다. 이는 사회적 시민권을 박탈당한 청년이 절반을 넘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미래를 도둑질 당한 청년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도시의 광장은 그들에게 점령당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분노가 향한 곳은 사민당과 대형노조들이었다.
당시 사민당은 정부 여당이었다. 2004년부터 거의 7년 동안 집권했던 사민당이 행한 것은 퇴직연금연령 인상이나 공무원 임금삭감과 같은 신자유주의적인 정책들이었다. 여당이 된 사민당은 오히려 우파 정당보다 훨씬 표독스럽게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집행했다.
또한 그런 사회당을 가장 지지하고 옹호했던 조직은 정규직 위주의 대형노조들이었다. 중년의 고숙련 남성 노동자 위주의 대기업노조와 그 노조들이 먹여 살리던 사민당이 젊은이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사회안전망이라는 그물코 사이로 맥없이 빠져내려 맨바닥으로 추락해 가던 사람들의 희망은 기성 권력화되어버린 진보세력에 의하여 철저하게 짓밟혔다. 믿었던 이에 대한 배신감은 더 큰 법이다.
두 번 배제당한 사람들사실 우리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 여성, 저숙련공, 이민자는 현안에서 소외된 노동자, 그 안에서도 배제된 집단이다. 한 번은 회사로부터 또 한 번은 같은 노동자로부터 두 번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른바 노동과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의 존재이유를 설명해 주는 소재이자 풍경일 뿐이다. 마치 배경을 담당하는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기만 하면 될 것이지, 직접적으로 정치현장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홍세화, 박노자, 김소연, 이선옥이 쓴 <발자국을 포개다>에서 오슬로 대학의 박노자 교수는 분리정치, 즉 노동자들을 가르고 적당히 포섭하는 방식으로 얼룩져 가는 사회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은 80퍼센트의 노조가 비정규직은 받아주지 않는다. 일본을 제외한 세계 어느 산업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조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나 쌍용차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누어져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한국의 정규직 노조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이다. 심지어 비정규직에 대해서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189쪽)한편 노동자대통령을 표방하며 지난 대선에 뛰어들었던 김소연 후보는 이러한 노동의 굴종을 목격하고 이렇게 지적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본은 노동 내부를 수직적 분업체계로 배치했지요. 노동계급 내에도 배제에 의한 적대적 관계가 형성되었고요. 조직화된 노동의 상층부는 자본에 포섭되는 반면 자기 몫을 잃어가는 노동자들, 해고노동자나 비정규직 등 약한 하위 부분은 일방통행으로 내몰리고 있어요. 자본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는 계급성을 토대로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아가야겠지만 그러려면 서로 간의 일정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미 노동계급은 이해관계가 다른 적대의 경계로 나뉘어져 버렸습니다." (41쪽)
등촌동 본사 앞에서 열리는 콜트콜텍의 목요 정기집회 현장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가 위안을 얻었다. 한바탕 어울린 그들은 웃으며 한진중공업으로 떠났다. 우리가 가서 도와야 한다고. 결국 그들 서로를 위로하는 것은 또 다른 배제된 자들이었다.
가장 극한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끼리 힘을 얻는다니. 얼핏 들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벌이는 싸움은 단 한 번도 그들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재능교육 노동자들은 단지 자신들만의 복직이 아니라, 노동자로도 불리지 못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기륭전자와 송전탑 위의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파견으로 인정받았으니 정규직화하라'고 하는 대신 '불법이든 합법이든 모두가 비정규직으로 고통을 당했으니 모든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라'고 외쳤다.
결국 두 번의 버림받음과 두 겹의 외로움을 이해하는 그들이 택한 것은 모든 노동자들과 법의 보호에서 배제되는 이들의 권리를 위한 싸움이었다.
잊지 말자, 우리의 발자국만으로도 힘을 얻는 이들이 있음을...코오롱 2940일, 콜트콜텍 2230일, 재능교육 1906일, 쌍용차 1385일, 현대차 최병승·천의봉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철탑에서 146일, 재능교육 여민희·오수영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 회복'을 위해 혜화성당 종탑에서 34일.
우리사회의 가장 아픈 곳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지금도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이들을 안아줘야 한다. 불안정한 노동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다.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노동과 삶의 가치에 응원을 보내줘야 한다.
밤이면 노동자들은 대부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뉴스에서 쌍용차 투쟁을 어떻게 보도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소식에 절망과 희망이 교차할수록 고향집 늙은 소의 씀뻑이는 순한 눈의 노동자들은 물끄러미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폭도와 강성노조로 시뻘겋게 도배질하는 언론의 보도를 보며 '정말 우리가 그럴까?'란 생각을 수없이 했다. (95쪽)나의 인생이 소중한 만큼 남의 삶도 귀중하다. 마치 자신의 인생만이 세상의 굴레에서 뚝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서로 맞물려 있는 생명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은 나아가 인생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의지하는 세상, 이것이 곧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치유와 구원의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
새순이 돋아나는 봄, 눈밭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들의 외로운 족적 위에 부디 당신의 발자국이 살포시 포개질 수 있기를.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충분한 위안이 될 터이니.
덧붙이는 글 | <발자국을 포개다>, 홍세화외 14인 지음, 꾸리에 펴냄, 2012.12,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