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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른이 됐어도 여전히 치과에 가기 싫어한다. 어릴 때는 치과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이도 잘 닦지 않아서(그땐 그랬다) 소위 '누런 이똥'을 달고 다녔고, 이를 가로로 박박 닦아도 '세로로 닦아야 한다'고 일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이를 잘 닦지 않거나 대충 닦을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기껏해야 이를 잘 닦지 않아서 생기는 충치 정도가 있었다.

혹시 풍치라고 들어본 적 있는가. 잇몸과 이 사이에 이를 둘러싸고 있는 보호막이 부실한 관리 때문에 조금씩 녹아 없어져 이와 잇몸만 달랑 남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빈번히 염증이 생겨, 잇몸이 붓고 피가 나며 이가 흔들리다가 결국 빠지게 된다. 이걸 풍치라 한다.

40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풍치를 느꼈고, 내 이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때부터 이 관리를 잘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노력을 해도 효과가 크지 않아 자주 치과를 찾아야 했다. 평소에 이 관리를 잘하면 됐을 걸.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격이었다. 치과 의사는 온갖 방법으로 이를 뽑지 않고 버티는 시술을 해줬지만 무너지는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양쪽 위의 어금니 두 개를 뽑았고, 이어서 그 옆 어금니 하나도 마저 뽑기 위해 치과에 가게 됐다. 값비싼 임플란트는 점점 내게 현실이 되고 있었다.

치과에 가려고 할 때 나는 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는 점. 나는 왜 두려운지를 물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듯 물었는데, 이는 나름의 성찰이었다. 아픔 때문인가? 아니면 차가운 치과 도구들의 감촉 때문인가? 또 아니면 기계 소리가 주는 냉정함 때문인가? 시린 느낌이 싫어서일까? 마음을 내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두려움의 원인은 그런 외부적인 감각보다는 두려움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적 인식에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이란, 나는 치과를 두려워한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데서 나온 무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그 두려움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므로, 이제부터는 그 두려움을 선택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도달하고 나니 문득 나에게 너그러워지는 느낌을 받았고, 마음이 많이 자유로워졌다.

그런 마음으로 치과를 둘러보니 비로소 치료를 하고 있는 마른 체형의 의사가 눈에 보였다. 그리고 안쓰러워졌다. '대충 봐도 한 20명 정도의 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거나 대기 중인데, 저 의사가 겪는 노동의 강도는 얼마나 센 것인가'라는 측은지심이 생겼다. 환자가 되레 의사를 걱정해주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다니.

사유 세계가 담겨있는 서재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 ⓒ 천년의상상
나는 그때 정여울의 책 <마음의 서재>를 들고 갔다. 이는 어쩌면 묘한 인연일지 모른다. <마음의 서재>는 마침 인문학과 삶의 성찰을 다루고 있었는데, 내 아픈 치아들과 치과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내 삶의 주제들을 짧게나마 성찰할 수 있도록 가만히 손을 내밀어 줬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는 이 책에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책날개는 저자 정여울을 '사람을, 여행을, 문학을,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글쓰기를 통해 '타인의 삶'에 조용히 노크하기, 그것이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일'이며, 자신이 '학창시절에 책과 문학을 통해 힘을 얻고 길을 찾았기에 사람들에게도 그 길을 전파하고 알리려 힘쓴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3년간 <한겨레> '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 코너에 연재한 글을 모은 책이다. 그러나 '청소년' 인문학 코너라고 해서 사유의 소홀함은 어디에도 없다.

정여울이 말하는 '마음의 서재'는 뭘까? 그것은 책에서 밝힌 바, '앞으로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의 목록' 때문에 '이미 읽은 책들이 놓일 마음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자신이 읽은 책들로만 이뤄진 작고 아름다운 서재를 가꾸기로 했으며 이 책이 바로 그 '세상에서 제일 작은 내 마음의 도서관'이란다. 읽어야 할 책에 대한 강박과 조바심을 내려놨다는 그녀의 말이 반갑다. 우리는 종종 이런 휘둘림 속에서 되레 갈피를 잡지 못 하고 길을 잃은 적이 많지 않았던가?

동양학자인 조용헌은 얼굴에는 관상이 있고, 집의 구조와 형태를 보는 가상(家相)이 있듯이, 서재에도 서상(書相)이 있다고 말했다. 서재의 구조와 정돈 상태 그리고 소장하고 있는 책들의 질과 양을 모두 따져보는 것을 '서상'이라 하며, 서상을 보면 그 서재를 가진 사람의 정신적 깊이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인다. "관상이 불여(不如) 서상"이라고.(<동양학을 읽는 월요일>·조용헌·RHK) 정여울의 서재는 어떤 서상을 가진 것일까? 거기엔 주로 인문학이 꽂혀 있고, 그 모양은 단정하면서도 서재를 더듬는 손길은 깊고 날카롭다.

<마음의 서재>에는 사랑의 문제를 제법 깊이 다루고 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다단한 문제들, 이를테면 교육과 훈육의 문제, 자유와 교양의 문제, 예의·애도·세대·폭력과 타자·소통의 문제·권력과 통제·결핍과 용기·정치와 정의 등 수많은 주제들을 모두 50개의 장으로 나눠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도달한 사유의 시냇물을 '조근조근' 우리에게 흘려보내고 있는 것.

<마음의 서재>는 단순히 책의 내용과 인문학적 구성만 적절히 버무려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그 속에는 저자의 또 다른 사유 세계가 담겨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이 말한 사랑의 담론을 소개하면서 풀어낸 저자의 말을 옮겨보자.

아무리 실패한 사랑이라도, 사랑은 자아에 매몰된 협소한 삶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우리정신의 터전을 확장시킨다. 그런 열정과 그런 숭고함은 사랑 아닌 것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마음껏 사랑에 빠지자. 사랑에서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 전전긍긍하지만 않는다면, 사랑은 자아를 확장하는 최고의 연금술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진 채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채 꼿꼿한 자아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백만 배쯤 낫다. 어떻게 평생 '나'와 더불어 오직 '나'로만 살 수 있겠는가. 사랑은 타자를 자아로 변신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나조차도 낯선 타자로 만드는 영혼의 마술이다.(본문 52쪽)

아, '사랑은 자아를 확장시키는 최고의 연금술'이라니! 도대체 정여울의 사유적 촉수는 사랑의 속살에 얼마나 깊이 닿아있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무척 궁금했다. 사랑의 실패, 그에 따른 고통과 슬픔이 두려워 손을 내밀지 못하는 '나'에게 성공이든 실패든 사랑의 감정에 늪처럼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보다 백만 배쯤 낫다니! 이 또한 얼마나 깊이 사람을 위로해주는 말인가. '두려움' 없이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나'를 확장시킨다는 것은 정녕 아름답다.

잃어버린 자신감의 회복, 그게 인문학의 쓸모

책의 곳곳에서 이와 같이 빛나는 사유의 사금파리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악역을 자처하는 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진정한 필요가 아니라, 조직이나 대의를 위해 필요한 역할을 연기한다는 점이다. 악역을 도맡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일을 해낸다는 일종의 영웅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말에 나는 흠칫, 놀란다.

또한 타인의 상처를 함께 아파할 수 없다면 어떤 위로의 제스처도 섣불리 취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 때로는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해주는 것도 최소한의 예의가 된다. 진정한 예의는 단지 불쾌한 행동을 삼가는 자기통제술이 아니라 타인과의 거리감을 존중해주는 기술이라는 말에도 식은땀을 흘렸다.

'지못미'는 또 어떤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는 상실감을 제대로 표현한 말이 아니라는 것. 정여울은 '지못미'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교묘하게 정당화 한다고 바라봤다. 죽은 것만으로 충분히 처벌받은 사람마저 '지켜줘야 할 무력한 대상'으로 타자화시킨다. 무엇보다 '지못미'는 너무 즉각적이며 간단명료하다. 애도는 그렇게 인스턴트 푸드처럼 편리하게 대체할 수 없다는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참으로 이런 만남의 순간 뒤에는 '두려움' 없이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음을 느꼈다. '용기'가 생긴다. 용기에 대해 말한 정여울의 용기를 되뇌어본다.

용기(courage)라는 단어 자체가 '심장'을 의미하는 라틴어 코어(cor)에서 나왔는데, 용기는 바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온 마음을 다해 솔직히 이야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행복한 사람들은 '나는 불완전하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다.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기에, 우선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결핍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거절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늘 먼저 사랑을 고백하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아도 진정 원하는 일을 선택하고, 건강검진 결과를 기다릴 때조차도 불안에 떨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런 확신이나 보장 없이, 그 어떤 예측이나 계산 없이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용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본문 128~129쪽)

나는 <마음의 서재>를 읽으며, 저자인 정여울의 이름을 생각해봤다. '여울'은 그 예쁜 어감과는 다르게 시내나 강폭이 얕거나 좁거나 꺾어지는 곳을 말한다. 여울에서 물 흐름이 급격히 빨라지고, 소리가 난다. 고요히 흐르다가도 여울에서 출렁이며 튀기고 자빠진다. 변화한다. 달라진다. 새로워진다. 낯설게 한다. 우리가 함께하는 인문학처럼.

정여울은 자신에게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시켜'준 것이 인문학이 가진 쓸모라고 했다. 그 자존은 '단지 공격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 기술이 아니라, 끝내 타인과 접속하기 위한 영혼의 준비운동'이며, '끝내 이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영혼의 안테나'라는 것이다.

치과를 다녀오고, 정여울의 책을 읽으며 나는 다짐한다. 접속하자. 그리고 주파수를 맞추자. 그리고 두려움을 성찰하며, 두려움에 끌려가는 내 자존을 회복하며, '번쩍하는 인문학적 순간'을 만나자고!

덧붙이는 글 | <마음의 서재>, 정여울, 천년의상상, 2013년 2월 18일, 1만 6천 원



마음의 서재 - 정여울 감성 산문집, 개정판

정여울 지음, 이승원.정여울 사진, 천년의상상(2015)


#마음의 서재#인문학#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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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의 작은 대안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시집 <느티나무 그늘 아래로>(내일을 여는 책), <너를 놓치다>(푸른사상사)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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