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굳게 닫아 놓았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맑은 공기가 들어옴과 동시 봄 향기가 물씬 풍긴다. 앞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는 파란 색깔이 묻어나고 있다. 봄이 왔다는 신호다. 3월을 시작하는 첫날이 휴일로 3일 연휴가 이어졌다. 그런 탓인지 거리에는 수많은 차량들로 넘쳐났다. 덩달아 나도 집을 나섰다.
웬만한 여행자라면 통영 산양일주도로를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듯하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해안도로에 선정된 이 길은 '동백나무와 함께하는 꿈의 60리 산양도로'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예전에도 몇 번 이 도로를 따라 돈 적이 있지만, 이번에 또 나서 본다. 이 도로에서 가지처럼 붙어 있는 풍화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어서였다.
풍화일주도로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통영대교를 넘어서야 한다. 통영대교에서 약 2.3km 지점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길이 갈라지는데, 이곳이 들머리인 셈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가 고요하다. 물결은 잠들었는지 움직임도 없다. 어선 세 척도 한 몸으로 묶어 꼼짝하지 않고 있다. 흰색과 붉은색을 한 양식장의 부표가 이곳이 바다임을 느끼게 해 주는 징표다.
한적한 도로는 오가는 차량 없이 나홀로 이 도로를 점용하고 있다. 동백나무는 수많은 송이의 꽃망울을 틔웠다. 햇살을 받은 잎사귀는 역광으로 은빛물결을 이룬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전거 동호인들이 힘겹게 언덕을 오른다. 향촌삼거리에서 길이 갈라진다. 바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돌아가야 바다풍경을 즐길 수 있다. 이곳부터는 2차로가 아닌 1차로로 조심운전이 필요하다. 숲길과 바다가 조망되는 길이 반복된다. 작은 포구가 있는 마을에 차를 세우고 갯가로 내렸다. 비릿한 내음이 가슴속 깊이 스며들지만, 그래도 좋기만 하다. 어릴 적 고향 냄새이기 때문이다.
통영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풍화일주도로를 돌아 산양일주도로로
16.3km의 풍화일주도로를 한 바퀴 도니, 다시 산양일주도로가 이어지고 가까이에 삼덕항이 있다. 이 항은 욕지도로 떠나는 카페리터미널이 있는 곳이다. 휴일을 맞아 주차장은 빈틈이 없고, 터미널은 표를 끊는 여행자들로 넘쳐난다. 10여대의 자전거를 실은 차량이 배에 오른다. 자전거로 섬 일주를 할 여행자가 부럽게만 느껴진다.
산양일주도로에서 제일 유명한 곳을 꼽는다면, 아마 '달아공원'이 아닐까 싶다. 그리 넓지 않은 주차장과 도로변에는 차들로 빼곡하다. 힘들게 주차하고 공원 언덕에 올라서니,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정면과 좌우로 펼쳐져 있는 크고 작은 섬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언덕 전망대 안내판에는 사진과 함께 섬마다 제 이름을 적어 놓았다. 왼쪽으로부터 대매물도, 비진도, 학림도, 오곡도, 소지도, 송도, 국도, 연대도, 저도, 연화도 그리고 만지도다. 반대쪽 안내도에는 두미도, 추도, 소장두도, 남해도, 가마섬, 대장두도, 곤리도, 사량도 그리고 쑥섬이 이어진다. 참으로 많은 섬이 제각각의 사연을 안고 제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달아'라는 이름은 이곳 지형이 코끼리 어금니와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의미도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아기(牙旗, 장군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깃대 끝을 상아로 장식한 호화스런 깃발)를 꽂은 전선이 당포에 도달하였다"하여 '달아(達牙)'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바다를 본다'는 뜻을 지닌 관해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운치를 더한다. 이 정자에 올라서면, 한산대첩과 당포승첩을 이룩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청정해역을 스치는 바람도 부드럽지만, 낙조나 달밤의 은빛 파도는 여행자의 가슴을 설레기에 충분하다. 이곳 해넘이는 관광명소로 각광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삼덕항에서 출발한 카페리는 섬과 섬 사이를 뚫고,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욕지도로 향하고 있다.
해넘이 최고의 명소 달아공원, 섬과 섬을 뚫고 욕지도로 향하는 카페리
맞은편 또 다른 언덕에는 통영수산과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 역시도 높은 곳에 위치하다 보니 아래로 내려다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과학관 안으로 들어서니 배 한 척이 전시돼 있다.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느껴지는 통영지역 전통어선인 '통구밍이'다. 이 과학관은 기획전시실, 해양실, 수산실, 체험실, 지방특색실, 화석 및 어패류 전시실 그리고 영상실 등으로 구분돼 있다.
제4전시실인 체험실에는 살아있는 바다생물을 관찰하고, 만져볼 수 있는 체험학습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바닷물을 담은 수조에는 멍게, 해삼, 게, 키조개 등 살아있는 해산물이 들어 있는데,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어느 딸아이의 아빠가 게 한 마리를 잡아 쥐고 아이에게 만져보라고 하자, 아이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친다. 엄마는 불안함을 느끼는 아이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듯 함박웃음이다.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다.
과학관 야외마당에도 볼거리가 풍부하다. 돌이 되어버린 규화목 전시장에는 여러 종류의 규화목을 볼 수 있다. 이곳을 지나 전망데크에 올라서면 달아공원에서 본 것처럼 크고 작은 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멀리 희미하게 거제도가 손짓하며 달려올 것만 같다. 하얀 물살을 가르고 지나는 작은 배 한 척이 용감무쌍하다.
'발해 1300호' 기념탑에서 머리를 숙이다야외공원 한 쪽에는 '발해 1300호 기념탑'이 있다. 이 탑은 발해의 해상항로를 따라 뗏목으로 항해하다 바다에서 산화한 '발해 1300호' 4인의 대원(이덕영, 이용호, 임현규, 장철수)을 기리는 기념탑이다. 1998년 1월 23일 오후, 오른손을 다친 장철수 대장은 일본 해상보안청의 구조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왼손으로 항해일지의 마지막을 썼다.
그들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16:00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오늘 한일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그들의 속셈이 드러난다고 보아진다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탐험정신발해정신18:15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다20:25MAY DAY를 외친 후
죽음을 앞둔 위험한 상황에서 그 누구도,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심 아닐까. 그럼에도 죽음을 앞두고,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의연한 그 마음. 대체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나올까. 오후 4시, 설마하면서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시작하는 일기는, 4시간 반이 지나는 8시 25분에서야 절망으로 끝을 맺는다. 비 앞에 서서 숙연한 마음으로 일기를 읽는 동안 눈시울이 뜨겁다. 다시 한 번 머리를 숙여야만 했다. 의연해야만 했던 그들의 끝나지 않았던 성공적인 항해를 위해.
온몸으로 봄을 느끼러 떠난 통영여행. 풍화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아 산양일주도로를 도는 내내, 남해 푸른 바다는 봄의 싱그러움을 가득 안겨주었다. 집으로 향하는 시간, 발해 1300호 장철수 대원이 쓴 일기가 머리를 떠나지 않고 감돌고 있다. 봄소식은 왔건만, 아직 까지도 희망의 새 소식이 없는 지루한 기다림은 계속되는 느낌이다.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다"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남 거제지역신문인 <거제타임즈>와 블로그 <안개 속에 산은 있었네>, <경남이야기>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