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잠자리를 뒤척이게 했던 빗소리가 말끔히 가시고 청명한 하늘이 봄을 확인시켜 준다. 상쾌한 아침 공기도 계절이 바뀌었음을 몸으로 느끼게 한다. 출근길에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따스한 봄 햇살과 시원한 공기가 필요할 것 같은 친구 이 아무개가 궁금해서다.
"어, 나야. 웬일이냐 형한테 전화를 다 하고…."수신음이 한참 전달된 후 막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이 아무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눌함이 느껴지지만, 목소리에 힘도 있고 무엇보다도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반응이어서 반가웠다.
"아침은 먹었느냐? 날 좋은데 봄바람이라도 쐬러 밖에 좀 나오지 그래?""너… 잔 말 말고… 지금 어디냐? 지금 다 와 가니까 사무실로… 아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 거 뭐냐… 왜 새로 생겼다던 쌈밥, 후배 누구…? 에이, 집사람 바꿀게."적극적인 의사소통은 아직 무리인 듯 말이 매끄럽지 않다. 며칠 전 후배가 새로 개업한 쌈밥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는 얘긴데, 끝을 맺지 못하고 결국 부인을 바꾼다. 그렇잖아도 날씨가 쾌청해 병원에 외출 신청하고 벌써 안흥 경계를 막 들어섰다고 했다.
친구 이 아무개는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에서 두 달여를 보냈다. 다행히 초기에 빠른 병원 이송과 응급조치로 몸에 마비가 오거나 말을 아예 못하는 등 위급한 상황은 모면한 상태였다. 이미 2010년 지방선거가 열기를 더할 무렵, 내 선거운동을 돕던 중 미약하지만, 한 차례 증상이 왔던 것을 감안하면 그것만으로도 천운이라고 다들 다행스러워했다.
한때, 중환자실에서 심각한 상태로 지냈다. 인지능력이 떨어져 소리를 지르고 집으로 보내달라고 몸부림을 치는 통에 몸을 침대에 묶어 놓은 채 치료를 진행했다. 때로는 극도로 불안해하고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의료진들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해 부인이 애를 많이 먹었다고 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보며 엉뚱한 말을 앞뒤 없이 내뱉는 증상이었다. 한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함께하고 지금도 가장 친한 친구로 통하는 임 아무개가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 엄마 아니냐?"고 딴소리를 하더라며 무척 속상해했었다. 워낙 중환자실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잠깐 일반 병실로 옮겼었는데, 여전히 소리를 지르는 등 이상 행동을 해서 다시 중환자실 신세를 지게 됐다며 낙담 어린 소식을 전하는 부인의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어언 두 달이 다 돼갈 무렵, 친구 부인이 들뜬 목소리로 한결 좋아진 이 아무개의 상태를 전해왔다. 처음 있던 병원에서 증세가 많이 호전돼 일반병실로 가려 했으나 입원실이 없어 부득이 인근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의사소통도 한결 좋아져 짧은 통화도 가능하다며 전화를 바꿔주기도 했다.
새로 옮긴 병원은 최근에 개원한 곳으로 모든 병실이 1인실이고 시설도 아주 깨끗했다. 창문을 열면 바로 산이 인접해 공기도 좋고 쾌적했다. 이곳에서 병세가 빠르게 회복됐다. 며칠 전부터는 하루 두어 차례씩 전화를 걸어와 완전치는 않지만, 안부를 묻고 한참씩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기억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매일 외출허가를 받아 고향마을과 친구의 일터인 농산물유통 사무실을 보여 주곤 한다고 했다.
오늘도 그렇게 아침 일찍 병원을 나선 것이다. 점심시간, 식당은 개업 초기인데다 구미가 당기는 메뉴들 때문인지 손님들이 넘쳐났다. 생선구이 쌈밥을 주문했는데, 친구에게는 잘 맞는 음식인 듯했다. 밥 한 공기와 적지 않은 음식을 간단히 비운 친구는 며칠 새 빠졌던 살이 다시 찐 것 같다며 '허허' 웃기도 했다.
"그런데, 이 친구를 잃어버렸단 말이야. 얼굴을 봐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딴 사람은 많이 알겠는데 이 친구는… ."휴대전화 통화 목록에 나와 있는 유년시절 친구 임 아무개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입을 뗀 친구의 표정이 다시 흐려졌다. 부인이 가장 친한 친구라고, 걱정도 많이 해서 병원에도 여러 차례 다녀갔다고 말해주는데 자신은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며 답답해했다. 내친김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 주었더니 몇 마디 더듬거리다가 이내 전화기를 내게 넘기고 만다.
며칠 전, 병원을 옮겼다는 말을 듣고 이제는 친구들에게 알려도 되겠다 싶어 '이◯◯ 병세 호전, △△병원 입원 중'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돌렸다. 많은 친구들이 내게 안부를 묻기도 하고 병원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했는데, 그 중 한 친구가 이 아무개 부인에게 들려주었다는 이야기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 친구 왈, 요즘 들어 눈이 좀 침침해져 글씨가 가물가물하던 터에 문자메시지를 열어보는 순간 '이◯◯ 별세…△△병원…'으로 읽혀 졌다는 것. 순간 "결국 이 친구가…!"라며 충격에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다시 확인하고서야 안도했노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두 달여 만에 함께한 이 아무개와의 점심 식사 자리가 이렇게 유쾌하게 끝났다. 재삼 다행임을 되뇌지 않은 수 없다. 내게는 유일하게 고향을 함께 지키며 서로 의지하던 친구인데다, 얼마 전에는 지역에서 묵묵히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던 후배가 쓰러진 후 일주일 만에 세상을 하직한 일도 있었던 터라 내심 조바심이 컸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정상의 모습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야! 커피 한 잔 타봠~뫄."라고 소리치며 사무실 문을 열어 젖힐 것 같다. 밤새 몰아치던 비바람이 이내 봄을 가져다 놓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