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농활을 처음 가보고 나서 농촌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는 김영삼 정권인 1997년이었다. 농부 아저씨들은 저마다 농협에 큰빚이 있었는데 대부분 경운기나 트랙터 등 농기계를 구매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보기에도 농부 아저씨들의 시름은 깊어 보였고 표정에 패배감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농사일을 하찮게 보는 주위의 시선에 대한 시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골 출신이긴 하지만 바닷가 동네여서 농사일은 잘 모른다(그렇다고 바닷일을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 고향 제주도에는 농업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정권교체를 통하여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우르과이라운드가 FTA로 바뀐 것처럼.
농촌에 배정된 예산이 적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을 만큼"만 보조해준다는 느낌이었고 별로 관심을 갖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 추이는 이러한 현상을 뒷받침한다.
2012년 12월 27일 농림수산식품부와 농협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2.6%로 해당 통계를 작성한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식량자급률은 1970년대 80.5%에서 1980년대 56.0%, 1990년 43.1%, 2000년 29.7%로 계속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 쌀을 제외한 곡물의 자급률은 불과 3.4%로 CECD 34개국 가운데 28위 수준이다. 1990년대의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대비 농가소득은 97.3%에서 59.1%로 급락했다. 말 그대로 '농업의 위기'다.
한편 도시에서는 귀농·귀촌 이 유행처럼 번졌다. 통계청의 최근 발표를 보면 2011년 귀농가구는 1만75가구로 전년의 5405가구에 견줘 86.4%나 늘었다. 2012년도에는 2만가구에 육박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올해의 귀농귀촌 예산은 작년에 비해 28%나 늘었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계류중인 예산만도 242억 원이나 된다.
하지만 귀농·귀촌 열풍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미디어에서는 성공사례가 보고되지만 과장되는 경우도 많고 실질적인 현실과 괴리된 경우가 많다. 특히 실패 사례가 더욱 많다. 귀농·귀촌에 대한 마땅한 철학이나 시스템이 약하다 보니 얼마 전에는 귀농·귀촌을 미끼로 한 사기 사건이 생긴 일도 있다.
2011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귀농자의 평균 연령은 52.4세로 전년도에 비해 조금 젊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귀농'이란 말은 도시에서 현역생활을 마치고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만년에 돌아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최근의 귀농·귀촌 열풍에서도 농업은 '주변 산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농업은 주변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생각은 세계적인 추세이며, 이 흐름에 뒤처지면 식량전쟁이 본격화될 때쯤이면 국가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다. 최근 전세계 금융위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조업 등 실물경제가 받쳐주지 못하는 금융산업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실물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체력은 '먹거리'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몰라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차에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찾아왔다.
대구사회연구소에서 나에게 원고 하나를 보내주며 이 글의 저자 선생님과 동행해줄 수 있느냐고 요청한 것이다. 나는 원고를 밤새 읽어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내가 생각했던 농촌의 모습이 담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무려 18년 전부터 그 그림을 그려오던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주인공은 일본 6차 산업의 전설 소네하라 히사시 대표(비영리법인(NPO) 에가오츠나게테)다.
<농촌의 역습>은 어떤 책?
처음 <농촌의 역습>을 펼쳤을 때 10조엔 플랜(원화 117조원)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10조엔을 채우는 그 내용이다. 농업의 6차 산업이라는 개념은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농업의 6차 산업화란 농업자나 농업생산법인 등의 다양한 경영체가 농업생산(1차)에 머무르지 않고 가공(2차), 판매 및 서비스(3차)까지 (1X2X3=6)를 표현한 총합적인 사업 전개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소네하라 대표는 이 일을 18년째 해오고 있다. 시골 출신이 가지고 있는 건강한 상상력과 자연에 대한 겸허함이 몸에 배고, 대학 시절 음악세계에 심취해 하모니를 이해하고, 15년간 은행의 경영 컨설턴트를 하면서 돈의 흐름에 대해서 깊이 체험한 바탕이 마치 예술처럼 펼쳐진다. 예컨대 1.5톤의 쌀을 그대로 팔면 30만엔에서 40만엔의 수입이 되지만, 모내기 체험 등과 함께 상품화하게 되면 수입이 500만엔으로 10배가 넘는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오랜 고민과 행동을 통해서 얻어낸 결과이기 때문에 희망제작소 시절의 박원순 시장이 몇 번 방문해서 배우기도 했고, 최근에는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방문해 배워가기도 했다. 세계적인 언론사인 BBC, CNN 등이 방문해 취재를 해가기도 하고 아예 미국 일간지에 관련 기사가 소개되기도 했다.
기업 또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기업 이미지를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폐화된 농촌을 생명의 땅으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팀워크와 뇌 자극이 일어나 업무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관찰 결과들이 일본에서 보고되고 있다. 이것은 농촌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분야는 현대 자본주의를 관통하는 산업이 될 여지가 충분하다.
<농촌의 역습>이 산업의 혁신에 머물렀다면 부러운 이웃나라의 사례 정도로 다가왔을 것이다. 6차 산업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과 워크스타일 자체가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땅을 일구고 농산물을 키우는 것 자체가 다른 의미를 얻고, 농산물을 소비하는 것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농사를 짓는 일은 생명을 일으키는 일이기도 하고, 자기계발을 하는 일이기도 하고, 대체에너지 자원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 자급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소네하라 대표의 두 가지 통찰에 특히 놀랐는데, 첫 번째로 놀란 것은 일본의 버블 붕괴와 식량자급률과 에너지자급률 하락, 실업률 상승, 고령화, 경작 포기지 확산 등 총체적인 문제가 "농촌을 지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본 부분이다. 여기서 제대로 한 수 배웠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각 사회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연결고리를 잘 잡아낸 것이다.
행정에는 권위주의가 있고 대학의 권위에 약한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행정과 연대 체제를 만들고 싶다면 우선 대학에 접촉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대학은 섹셔널리즘에 빠져 있어서 학제적 활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NPO와 연대하기를 바라는 연구자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NPO는 자금 부족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금이 있는 기업과의 매칭 기회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기업은 감독관청, 행정에 약한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기업과 연대하려면 우선 행정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가면 원만하게 진행되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업은 행정과 연대한 NPO활동의 장이 되면 참여하기가 쉬워집니다. (258쪽)마치 '가위 바위 보'처럼 각 연결고리를 정확하게 짚을 수 있는 것은 각 단위들과 함께 오랫동안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농촌의 역습>을 읽다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놓치기 쉬운 것들이 멋진 산업의 자원이 되고 있는 모습에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농업의 미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3박4일의 대장정
소네하라 대표는 2월 26일 서울에 왔다가 3월 1일 귀국했다. 작달막한 키에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길렀고 피부는 까무잡잡한 게 전형적인 시골 아저씨 풍이었다. 얼굴은 항상 웃고 있는 모습이어서 미소를 따라 주름이 졌지만 아이 같이 해맑아 보였다. 사소한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고 영어와 일본어, 바디랭귀지를 써가며 질문하였고 신기해 했다. 비언어 소통의 달인처럼 말이 통하지 않아도 몸짓과 영어, 일어 등을 섞어서 웬만한 의사소통이 되었다.
소네하라 대표를 처음 보는 순간 그가 어떻게 10조엔 플랜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서울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여독을 푼 후 다음날 아침부터 강행군이었다. 박원순 시장이 희망제작소장으로 있을 때부터 오랜 인연을 맺고 강연도 다녀갔던 희망제작소 강연을 오전에 끝내고 오후에는 제주 올레길을 걷고 제주 젊은이들, 농업인들과 만났다.
<농촌의 역습> 원고를 읽고 나자마자 떠오른 사람은 바로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이었다. 농촌 출신 소네하라 대표가 17년 동안 은행의 경영 컨설턴트를 하다가 농촌으로 돌아갔다면, 서명숙 이사장 역시 무려 24년 동안 현역 저널리스트로 일하다가 고향 제주도로 내려와 제주올레 길을 냈다. 소네하라 대표는 농촌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았고, 서명숙 이사장은 감춰졌던 길을 걷어내며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두 분이 남매처럼 어깨동무하고 포옹도 하며 찍은 사진은 지금 생각해도 감회가 새롭다. 제주 올레는 현재까지 20코스의 길을 내었지만 당분간은 새로운 코스를 내지 않을 계획이라고 한다.
서명숙 이사장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코스 속에서 공동체가 어우러지는 일을 고민할 때다"라고 말했다. 제주 올레는 '올레꾼'을 제주로 불러들이는 큰 역할을 했고, 올레꾼들이 동네 상점에서 사먹는 생수와 각종 소비재, 민박과 게스트하우스 수입 등으로 제주의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제주의 길에서 제주의 마을로 어떻게 끌어들이고 함께 호흡하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깊이 하고 있었다.
올레길을 통해 마을 공동체의 지속적인 수입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획도 곁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소네하라 대표는 현 상황에서 올레와 제주 지역에 신선한 자극을 던져주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지 제주의 소리, 헤드라인 제주, 제주저널 등 많은 제주 언론이 이 강연에 주목하고 기사로 관심을 표명했다. 소네하라 대표 역시 에가오츠나게테에서 '길'에 대한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강연회를 계기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돕기로 약속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주로 초대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에도 강행군이 이어졌다. 대구의 농업기술센터 강의에서는 200~300명이 넘는 인원이 자리를 채워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대구 역시 경제 상황이 좋지만은 않기 때문에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다. 오후에는 충남발전연구소 초청으로 강연을 했다. 80명이 들어가는 강연장에 의자가 부족해 일부는 일어서서 들어야 했다.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은 시간까지 질문이 이어졌다.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구매하여 현장에서만 70권 넘게 팔려나갔다. 충남은 6차산업센터가 처음으로 생긴 곳이며 유명한 풀무학교가 있다.
28일 밤에 충남 홍성의 홍동마을로 이동해 풀무학교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푼 후 홍동마을의 '뜰'이라는 주점에서 주민, 활동가들과 함께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동네에 호프집이 없어지자 마을 자체적으로 호프집을 만들었는데 '뜰'이라는 공동체 화폐로 구매가 이루어지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지역화폐를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튿날은 공교롭게도 3·1절이었다.
홍동마을은 일제 시대 의병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지역이어서 마음이 묘했다. 홍동마을의 전설적인 어른인 홍순명 도서관장님을 만나고 오찬을 나눴다. 풀무학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남강 이승훈 선생의 오산학교에서 씨알 함석헌 선생과 동급생으로 활약한 이찬갑 선생이 충남 홍성에 내려와 1958년 설립했다. 홍순명 선생은 2년이 지난 1960년부터 풀무학교에 참여한 이래로 지금까지 풀무학교와 홍동 마을을 지키고 있는 큰어른이다. 홍순명 선생은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시며 소네하라 대표와 한담을 나눴다.
홍동 마을의 풀무학교는 자연적인 방문객만 한 해에 14만명이 되는 세계적인 명소다. 홍순명 선생과 소네하라 대표는 농업이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고, 미래 산업의 열쇠가 되어야 한다는 데 생각을 같이 했다. 두 분의 만남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농업'에 대한 나의 편견이 눈 녹듯 씻어나갔다. 농업이 괜히 '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아니며, 이 말은 미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홍순명 선생은 콘텐츠를 하나 하나 가꿔왔다면 서명숙 이사장은 길이라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소네하라 대표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이를 코디네이터하는 일을 해왔다. 이 대가들의 근거지가 농촌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